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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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스웨덴어: Baron Carl Gustaf Emil Mannerheim, 1867년 6월 4일~1951년 1월 27일)은 핀란드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후에 대통령(1944년~1946년)이 되었다. 핀란드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아스카이넨(Askainen)에서 귀족 가문의 셋째 아이로 태어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집안에서 쓴 스웨덴어 외에도 핀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만네르하임 가는 독일의 사업가 하인리히 만네르하임이 스웨덴예블레에 정착한 때로 올라간다.

러시아 군인에서 핀란드 국가통치자로[편집]

그가 태어날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령 핀란드 대공국이었다.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니콜라이 기병대 학교를 다니고 러시아 황제 근위대에 들어갔다. 1904년 러일 전쟁 때는 자원해서 만주에서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 후 새 정부가 들어서자 제대하여 새로이 독립한 핀란드에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1918년에 만네르헤임은 거의 없다시피한 핀란드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남아 있던 러시아 주둔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곧 이은 핀란드 내전 때 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핀란드 정부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 1918년 핀란드를 잠시 떠났다.

그해 가을 핀란드인들의 요청에 의해 핀란드에 돌아온 만네르헤임은 임시로 국가통치자가 되었다. 만네르헤임을 왕으로 세우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영국미국으로부터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는 볼셰비키를 반대했지만 러시아 내전에 백군과 연합하여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백군 장교들은 핀란드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919년 국회에서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에게 대통령 선거에 패한 뒤 정치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는 인도주의 활동에 힘을 쓰고 핀란드 군대의 발전에 노력했다.

소련과의 전쟁[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소련이 핀란드의 영토 일부를 요구하고 핀란드가 이를 거절, 양국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만네르헤임은 다시 핀란드의 최고 지휘관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미켈리에 사령부를 세우고 전쟁을 대비했다. 11월 30일 소련의 침략으로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만네르헤임은 공식적으로 최고 지휘관이 되어 핀란드군을 지휘했다.

1941년 다시 소련과 핀란드가 맞붙은 계속전쟁 때 여전히 최고 지휘관이던 만네르헤임은 나치 독일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 전투에 핀란드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2차례에 걸친 소련과의 전쟁에서 만네르헤임은 군사적으로 완벽하진 않았고 많은 영토를 소련에게 빼앗겼지만 핀란드의 독립을 수호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은 더욱 뛰어나서 독일의 군사 지원을 받을 것은 받으면서도 껄끄러운 독일과의 동맹 조약은 피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이 약해진 기미가 보이고 소련 전선이 결렬되자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의 전쟁을 끝낼 기회라 여겨, 대통령 리스토 뤼티가 사임하고 국제적 명성이 높은 만네르헤임이 1944년 8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짧은 임기[편집]

만네르헤임은 소련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핀란드에게는 혹독한 조건이었지만 소련에게 흡수당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립을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핀란드는 소련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후퇴하는 독일군을 상대로 핀란드 북쪽에서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만네르헤임은 1946년 3월 건강을 이유로 사임했다. 핀란드 국회는 그에게 '핀란드의 원수'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를 받은 이는 만네르헤임 뿐이다.

만네르헤임은 회고록을 집필하러 스위스몽트뢰로 물러났다. 1951년 1월 28일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 임
리스토 리티
핀란드의 대통령
1944년 ~ 1946년
후 임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