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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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1세
Carlos I de Portugal.jpg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국왕
별명 희생자 (o Martirizado)
외교왕 (o Diplomata)
배우자 오를레앙의 아멜리아
자녀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
마누엘 2세
본명 Carlos Fernando Luís Maria Victor Miguel Rafael Gabriel Gonzaga Xavier Francisco de Assis José Simão de Bragança Sabóia Bourbon e Saxe-Coburgo-Gotha
왕가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가
부친 포르투갈의 루이스
모친 이탈리아의 마리아 피아
출생 1863년 9월 28일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908년 2월 1일 (44세)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코르메시우 광장

카를루스 1세(Carlos Fernando Luís Maria Victor Miguel Rafael Gabriel Gonzaga Xavier Francisco de Assis José Simão de Bragança Sabóia Bourbon e Saxe-Coburgo-Gotha, 1863년 9월 28일 ~ 1908년 2월 1일) 또는 희생자 (o Martirizado), 외교왕 (o Diplomata)포르투갈 왕국의 33대 국왕이자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가의 3대 군주로 1578년에 죽은 세바스티앙 이후 포르투갈 역사에서 최초로 폭력으로 죽은 군주이다.

초기 생애[편집]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국왕 루이스 1세사보이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탈리아의 마리아 피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 아폰수 왕자가 있었다.

강렬한 교육으로 입헌 군주로서의 준비를 마쳤으며 1883년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과 결혼하려 했지만 영국의 압력으로 하지 못했으며 그 후 만난 오를레앙의 아멜리아와 결혼했다.

포르투갈의 왕[편집]

1889년 10월 9일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890년 3월 잠비아콩코 강을 따라 17세기 포르투갈인들이 정복한 식민지를 순찰하며 영국과의 아프리카 식민지 조약을 체결했다.

1892년 6월 14일 경제 위기로 포르투갈이 국가 파산을 선언했고 이것은 1902년 5월 10일 또다른 국가 파산 선언과 산업 방해, 사회주의와 공화당 간의 대립, 군주제의 비판 등을 가져왔으며 이후 총리로 주앙 프랑코를 선정한 뒤 의회 해산을 수락했다.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해 1894년 항해왕자 엔히크 탄생 500주년 축하 파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895년 리스본에서 유명 시인 주앙 데 켄을 초청했다.

암살[편집]

1908년 2월 1일 리스본에서 빌라 비코사의 궁전에서 알마다까지 여행을 가기 위해 코르메시우 광장을 지나던 중 두 공화당 운동가 알프레도 코스타와 마누엘 뷔카를 만났다.

이때 뷔카는 전직 육군 하사관이자 사격의 명수라 숨겨둔 라이플 권총으로 카를로스를 향해 5발의 총을 쏴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이스 필리프 왕자는 팔에 총을 맞아 20분 후에 사망했으며 차남 마누엘 왕자는 부상을 입었다.

코스타와 뷔카도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죄없는 방관자 몇 명도 죽었으며 이 사건으로 카를로스 왕과 후계자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 모두 죽어 며칠 후 어린 아들인 마누엘이 포르투갈이 왕이 되었고 그는 포르투갈과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 왕가의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전 임
루이스 1세
1861년 ~ 1889년
포르투갈 국왕
1889년 ~ 1908년
후 임
마누엘 2세
1908년 ~ 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