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최홍희 (崔泓熙)

출생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군
사망 2002년 6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최홍희(崔泓熙, 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5일)는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국제 태권도 연맹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이다.[1]

항일 투쟁[편집]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2]

해방 후[편집]

1955년 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3]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59년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

1961년 논산 육군훈련소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를 논의하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소외되었다. [4]

1962년 4월 말레이시아 대사로 발령받았다. [5]

1966년 3월 22일 에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하였다.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최홍희의 영향으로, 스위스에서는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식 태권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6] 북한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제6부~제9부는 최홍희의 삶을 다루고 있다.[7]

주석[편집]

  1. tae kwon do (martial art)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2. "아래로 보던’ 박정희, 쿠데타 성공 뒤 껄끄러운 관계로", 《중앙일보》, 2008년 9월 7일 작성. "일본 주오(中央)대 법학과 1학년이었던 최홍희는 44년 1월 징용돼 평양의 42부대에 배치됐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 그러나 부대를 탈출하기 직전 그의 조직은 일망타진됐다. 6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3. 서울신문, 1959년 6월 16일자.
  4. "아래로 보던’ 박정희, 쿠데타 성공 뒤 껄끄러운 관계로", 《중앙일보》, 2008년 9월 7일 작성. "61년 3월 초 논산훈련소장 최 소장이 대구 2군사령부에 들렀다가 ‘마지못해’ 박 준장과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회고록 『태권도와 나』에서 ‘사상뿐 아니라 선후배 차이가 심했다’고 했다. 술을 마시며 ‘나라 꼴’을 개탄한 둘은 곧 쿠데타를 계획했고 박정희 사무실에서 모의를 계속한다."
  5. "崔泓熙씨任命", 《동아일보》, 1962년 5월 1일 작성, p. 석간1. "政府는 外務部待機大使로 있던 崔泓熙씨를 30日字로 「말라야」聯邦駐箚特命全權大使로 任命했으며"
  6. 최효찬 기자 (1999년 7월 27일). 맨주먹으로 일군 ‘태권 스위스’. 경향신문사.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스위스에서는 「북한식 태권도」가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제3대 대한태권도협회장(65~66년)을 역임하고 월북한 최홍희의 제자들이 활동했다. 지금은 북한인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7. 문철 기자 (1996년 9월 2일). 북한상식 연작영화 「민족과 운명」. 동아일보사. “그동안 이 다부작은 ... 崔泓熙(한국외교관출신·전국제태권도연맹 총재) .... 등 지도급 해외동포들의 생애를 다뤘다.”
제1대 주(駐)말레이시아 대사
1962년 4월 ~ 1964년 11월
후 임
최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