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멸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촉한 멸망전
날짜 263년
장소 남정관, 낙성, 양안관, 한성, 면죽관, 검각
결과 촉한의 멸망
교전국
촉한
동오(구원병, 참전은 못 했음)
조위
지휘관
강유
제갈첨
정봉
손이
종회
등애
제갈서
병력
10만 명 40만 명


촉한 멸망(蜀漢 滅亡) 항목에서는 263년, 조위촉한 멸망을 목적으로 한 침공 전역을 서술한다. 종회, 등애, 제갈서가 이끄는 조위 군은 승전하여 촉한 멸망 목적을 달성시켰다.

배경[편집]

당시 촉나라강유의 북벌 실패와 황제 유선의 향락과 사치, 환관 황호의 농간으로 크게 쇠퇴해 있었다.

이에 강유는 환관 황호를 처형하라고 유선에게 간언하지만 유선은 이를 무시하고 강유는 군사 8만 명을 거느리고 답중으로 가 천천히 중원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고 호제에게 한수성을, 왕함에게 낙성을, 장빈에게 한성을, 장서부첨에게 각처의 관문과 요충지를 맡긴다.

이에 위나라의 장수 등애는 이를 눈치채고 사마소에게 표문을 올리고 가충순욱이 의견 충돌을 하지만 사마소는 촉을 정벌하자는 순욱의 의견을 받아들여 등애를 대장으로 삼고 종회를 진서장군으로 삼이 절월을 주어 관중의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등 전 위나라 지역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에 전장군 등돈이 반대하지만 사마소는 등돈을 처형하고 기밀 누설을 염려해 오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청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다섯 지방에 큰 배를 만들도록 명을 내린다.

그리고 263년 7월 종회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촉 정벌을 위해 출정한다.

전투 과정[편집]

종회와 등애의 출정[편집]

종회는 영채를 세워 장수들을 불러모아 감군 위관과 호군 호열, 대장 전속, 방회, 전장, 원정, 구건, 하후함, 왕매, 황보개, 구안 등 80명을 모으고 허저의 아들 허의를 선봉으로 세워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명을 준다.

한편 등애도 촉 정벌의 조서를 받고 사마망에게 강인을 막게 하고 옹주 자사 제갈서, 천수 태수 왕기, 농서 태수 견홍, 금성 태수 양흔, 교위 후평, 시랑 당균, 감군 구본 등과 함께 9만 대군을 모아 출정한다.

곧 종회에게서 한중에서 합세하자는 격문을 받자 등애는 제갈서에게 군사 1만 5000명을 주어 강유의 귀로를 끊고 왕기와 견홍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양측에서 답중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흔은 군사 1만 5000명으로 감송에서 강유의 뒤를 습격하고 자신은 3만 군사를 거느려 왕래하며 돕기로 했다.

남정관 전투[편집]

이 소식을 들은 강유는 황제 유선에게 표문을 보내나 황호에게 무시당하고 그 사이 종회는 남정관으로 진군한다. 남정군을 지키던 촉장 노손은 허의에 맞서 결사저항하여 진군이 지연되자 이에 종회는 직접 전투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그 사이 노손이 군사를 이끌고 종회를 습격해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위장 순개가 활을 쏘아 노손을 사살하고 종회를 구한다. 종회는 순개를 호군으로 봉하고 많은 장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허의를 처형한다.

양평관 전투[편집]

이때 촉장 왕함낙성을, 장빈은 한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종회의 대군이 몰려오자 성문을 닫은 채 지키기만 했다. 이에 종회는 부하 이보에게 낙성을, 호군 순개에게 한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양평관으로 진군한다.

이에 양평관을 지키던 촉장 부첨장서는 상의해 장서는 방어를, 부첨은 선제 공격을 주장하고 부첨은 장서에게 관을 맡기고 3000명을 군사를 이끌고 종회를 추격하지만 장서는 위군에 항복해 양평관은 함락되고 부첨은 위군에게 포위당하자 자결한다.

그러자 낙성을 지키던 왕함과 한성을 지키던 장빈 역시 항복하고 한수성을 지키던 호제는 종회의 대군을 막을 수 없이 수도 성도로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

답중 전투[편집]

답중에 있던 강유는 위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부하 요화, 장익, 동궐에게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아 등애의 부하 천수 태수 왕기와 교전한다. 강유는 왕기를 추격하며 등애와 싸우지만 금성 태수 양흔이 감송을 습격해 영채를 불태우고 강유는 양흔을 물리치고 겨우 빠져나온다.

그리고 옹주 자사 제갈서가 퇴로를 끊자 강유는 부장 영수의 도움으로 공함곡으로 들어가 옹주를 습격하려 하고 이에 제갈서는 크게 당황해 옹주로 후퇴한다. 강유는 요화, 장익과 합류하고 동궐의 2만 원군과도 합치고 종회와 등애가 10길로 나눠 쳐들어오자 남은 군사들을 모아 검각에서 대적한다.

제갈서는 강유의 5000명의 군사에게 패해 종회에게 달아났다가 낙양으로 압송된다.

등애의 대원정[편집]

한편 등애는 종회가 계속 공을 세우자 종회와 상의해 음평 샛길로 해서 한중의 덕양정으로 빠져 나가 성도를 기습할 계획을 세우고 아들 등충과 함께 산세가 험한 지역을 넘나들며 10월 음평을 출발한다.

등애는 산세가 가장 험한 마천령까지 넘어 마융에게 낙오한 군사를 수습케하고 남은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음평을 지나 강유성을 공격한다. 강유성을 지키던 촉장 마막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등애가 오자 항복하고 만다. 곧이어 등애는 부성으로 진군하고 성도로 가는 관문인 면죽관까지 진격한다.

면죽관 전투[편집]

등애의 대군이 면죽관까지 진격해서야 이 사실을 안 유선은 극정의 건의로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그의 아들 제갈상에게 군사 7만을 내주어 면죽관을 방어하게 하고 등애는 부하 사찬등충에게 군사 1만 명을 내주어 내적하게 한다.

하지만 제갈상의 공격으로 사찬과 등충은 크게 패하고 등애는 감군 구본의 건의로 서신을 제갈첨에게 보냈으나 제갈첨은 이마저 거절한다. 이에 등애는 곽배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기와 견홍을 매복시켜 제갈첨을 무찌르고 면죽관이 포위되자 제갈첨의 부하 팽화는 급히 오나라로 가 구원병을 요청한다.

오나라의 군주 손휴는 노장 정봉과 동생 정봉, 손이를 부장으로 5만 군사를 내주고 정봉은 부장 정봉과 손이에게 군사 2만을 주어 면죽으로 진군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수춘을 공격해 오나라의 원군은 3로로 나누어 급히 진군해갔다.

그 사이 제갈첨은 아들 제갈상과 장비의 손자 상서 장준에게 성을 맡기고 등애와 싸우나 전투 도중 활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자결하고 제갈상도 나가서 싸우다 전사했다. 등애는 모든 군사를 일으켜 면죽관을 공격해 장준과 황권의 아들 황숭, 이구가 등애에 맞서 강력히 저항을 했으나 모두 전사하고 면죽관은 함락된다.

유선의 항복과 촉한의 멸망[편집]

강유를 제외한 촉의 모든 군대가 패하자 황제 유선은 여러 관원들과 상의해 남중 칠군으로 파천해 남만의 힘으로 영토 수복을 계획하나 광록대부 초주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리고 오나라로의 피신도 계획하나 초주이 반대로 무산되고 초주가 항복을 건의한다.

이에 유선의 다섯째 아들 유심이 끝까지 반대하지만 유선은 초주에게 항서를 쓰게 하고 사서시중 장소와 부마도위 등량에게 내주어 초주와 함께 옥새를 가지고 낙성으로 가 항복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등애가 성도에 입성해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복 장현을 검각의 강유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며 상서랑 이호를 시켜 문부를 바치게 했다.

이로써 촉 지역 28만호, 남녀 94만 명과 그중 장수와 군사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창고의 식량 40만 섬, 금은 4000근, 무늬비단과 채색비단 40만 필과 그 외의 물건들이 모두 위나라에 넘어갔으며 12월 유선의 항복식으로 전쟁을 종결되어 촉한은 멸망한다.

결과 및 영향[편집]

촉한의 멸망 후 유심은 자결하고 오나라에서 온 구원병들도 모두 물러갔으며 강유는 264년 장익, 요화, 동궐 등과 함께 위의 장수 종회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를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이 항복한 종회를 꼬드겨서 같이 반 사마소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결했으며 종회는 잡혀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위의 사마씨 정권은 촉을 멸하고 천하통일의 기초와 정권 이양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