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삼세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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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삼세황제 영자영(秦三世皇帝 嬴子嬰, ? ~ 기원전 206년) 혹은 진왕 영자영(秦王 嬴子嬰)은 중국 진나라의 제33대 국왕,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국왕,마지막 황제이다. 사후에 후세 사람들이 상황제(殤皇帝)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렸다.[1]

출신[편집]

그의 출신에 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다.

  •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손자이며, 시황제의 적장남이자 황태자였던 부소(扶蘇)의 장남이라는 설.
  • 진 장양왕(秦莊襄王) 영자초(嬴子楚)의 아들로 시황제의 아우라는 설.
  • 진 시황제의 아들이자 진 이세황제(秦二世皇帝) 호해(胡亥)의 형이라는 설.
  • 진 시황제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영성교(嬴成蟜)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이 중에 부소의 장남이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시황제 사후, 이세황제인 호해가 즉위했으나, 실권은 환관 조고의 손에 있었다. 조고는 진나라의 개국공신인 이사몽염고문 끝에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 가족과 함께 숙청하였다. 심지어는 황위까지 탐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7년 10월에 조고는 호해가 술과 여색에 빠져 제국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명분을 이끌고 호해를 자결시켰다.

그 후, 조고는 황제에 맞는 적임자를 찾았고, 그 적임자가 바로 억울하게 죽은 시황제의 황태자 부소의 장남 영자영이었다. 영자영은 여러 장수들과 협조하여 조고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즉위식 전에 은밀히 자객들을 보내 조고와 그 가문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서 영자영은 곧 보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진 삼세 이다. 하지만 이미 육국이 모두 부활한 상황에서 황제라고 칭할 수가 없어서 그냥 진왕(秦王)이라 칭했다. 그리고 이미 진나라는 그의 조부 시황제의 폭정으로 인하여 곳곳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선동으로 유명한 진승과 오광의 난 등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당시 유방항우 등 여러 호걸들도 진나라에 대항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영자영에게 제위에서 물러나라고 간청하였고 영자영은 이 의견을 수렴하여 수도 함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유방에게 가 항복을 청하고 옥새를 바치니, 불과 재위 36일 만이었다.

당시, 항우는 영자영이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방에게 항복한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항우는 함양에 들어오자 영자영에게 트집을 잡고 계속 캐물었다.

겁이 난 영자영이 우물쭈물하자 항우는 나라를 잘못 다스린 죄가 크다며 영자영의 목을 베었으며 이 때, 영자영의 죽음을 본 많은 백성들이 항우에게 항의하자 항우는 그들 역시 무자비하게 참살하였다고 한다.

주석[편집]

  1.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인용된 도공 연기(陶公年紀)에 기록되어 있다.
전 임
숙부 진 이세황제 영호해
제3대 중국 진나라황제
기원전 206년
후 임
-
(황조 멸망)
전 임
숙부 진 이세황제 영호해
중국 황제
기원전 206년
후 임
초 의제 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