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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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역사
ប្រវត្តិសាស្ត្រខ្មែរ
Bayon Angkor in Cambodia 001.JPG
초기 역사
암흑시대
근현대
v  d  e  h

진랍(眞臘, 첸라(Chenla))은 6세기 메콩 강 중앙 유역에서 일어난 크메르족의 나라이다. 수서 권 82에 처음 진랍이라는 이름이 나오나 뚜렷한 문자로 남지 않았고, 관련 사료가 없어 국명의 유래가 불분명하다.

역사[편집]

진랍은 초기에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차츰 강대해져 7세기에는 역으로 부남을 병합하였다. 왕통은 은자 칸브와 선녀 멜러를 시조로 한다고 알려졌다. 사료상으로 598년자야바르만 1세가 재위하였고, 수서에 기록된 질다사나(치트라세이나 마헨드라바르만) 왕이 600년에 재위했다고 한다. 두 왕 모두 메콩 강의 중앙 유역에서 캄보디아 북서부까지를 그 영역으로 하였으며, 다음 왕인 이샤나바르만 1세는 616년 처음으로 중국 수나라에 조공을 했다.

수도는 현재의 산보르 플레이 쿡 유적으로, 왕을 알현하는 대회당 및 2만호 이상이 거주하는 큰 성으로 국내에 30개의 다른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639년에는 바바바르만 2세가 즉위하였고, 아들 자야바르만 1세가 남부 메콩 강 삼각주 지역까지 정복하며, 국내를 통일했다. 그러나 후계자의 부재로 인해 내정은 군웅 할거 상황이 되었다.

중국 측 사료에 의하면, 신룡연간(705년 - 706년)에 호수지역의 진랍과 내륙의 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호수 진랍은 해안에 가까운 메콩 강 삼각주 지대에 자리를 잡고, 몇 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내륙 진랍은 메콩 강 중앙 유역, 댄 렉 산지 북방에 위치하였다. 내륙 진랍이 8세기에 몇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견사(당견사)를 파견했지만, 호수 진랍의 자바 지역 세력에 점거되어 있었다.

8세기 말에 자야바르만 2세가 국가를 다시 통일하고, 802년크메르 왕조를 열면서 자바와의 종속관계를 끊는 의례인 데이바라쟈를 행하였다. 자야바르만 2세 이전을 전앙코르 시대라고 부른다. 야소바르만 1세는 앙코르에 최초의 수도인 야쇼다라프라를 축조하였고, 이후 진랍의 왕들은 인근지역을 정복하고 이어서 수도와 대사원을 건립하여, 전성기를 이룩했다. 수르야바르만 2세앙코르 와트를 건설하였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의 전역을 정복한 자야바르만 7세는 곧 남쪽에 앙코르 톰을 세워서 진랍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이후 진랍이 급속히 쇠퇴하여 1296년에 진랍을 방문한 원나라주달관은 그곳을 둘러보고 견문록인 《진랍풍토기》를 남겼다. 14세기 후반부터 타이 아유타야 왕조가 진랍으로 처들어와, 1432년앙코르 왕조가 멸망하고, 푼니아 야트왕은 남쪽 지역으로 천도하였다. 그 이후 진랍이란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16세기 후반부터는 캄보디아란 이름이 등장하였다.

진랍풍토기[편집]

진랍풍토기는 중국 원나라 시대에 저술된 진랍(크메르 왕조)의 여행 견문록으로, 당시의 풍습, 사회, 문화, 산물 등을 적은 책이다.

주달관저장성 온주 출신으로, 항해의 경험이 많고, 학식이 깊은 인물이었다. 주달관은 원나라 성종의 명에 의해 사신으로 선택되어 1296년 진랍을 출발하여, 1297년 귀국했다. 진랍풍토기는 귀국 직후에 쓴 개인적인 견문록이지만, 약 1년간 머물면서 관찰한 상세한 조사보고서이며,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중세 캄보디아의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진랍풍토기에는 진랍의 명칭에 관한 내용과 온주로부터의 출발하여 수륙의 여정을 상세히 적은 기록과 성곽(앙코르 톰), 복식, 관속, 종교, 임산부, 질병, 사망, 농경, 무역, 수레, 속군, 촌락, 목욕 그리고 왕의 출입까지 42개의 항목에 걸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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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