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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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駐美國大韓民國大使館)은 1949년 미국 워싱턴 D.C.에 개설된 대한민국 외교부 소속의 대사관이다.

한미 관계의 시작[편집]

조선-미국 관계[편집]

1882년 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申憲)과 전권부관 김굉집(金宏集)은 미국 전권대신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의정(議定)했다.[1]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편집]

임정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사관격으로 1919년 8월 한인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9월 구미위원부로 정식 발족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워싱턴 D.C에 체류하며 미국유럽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1. 김규식 1919년 8월 - 1919년 9월
  2. 이승만 1919년 9월 - 1928년
  3. 이승만 1928년 - 1945년 10월 2일
  4. 임병직 1945년 10월 2일 - 1948년 10월, 구미위원부 해체

역대 대사[편집]

대수 이 름 임기
제1대 장면(張勉) 1949년 2월 - 1951년 2월
임시 한표욱(韓豹頊) 1951년 2월 - 1951년 4월
제2대 양유찬(梁裕燦) 1951년 4월 - 1960년 4월
제3대 정일권(丁一權) 1960년 5월 - 1960년 10월
제4대 장이욱(張利郁) 1960년 10월 - 1961년 6월
제5대 정일권(丁一權) 1961년 6월 - 1963년 4월
제6대 김정렬(金貞烈) 1963년 5월 - 1964년 10월
제7대 김현철 (金顯哲) 1964년 12월 - 1967년 10월
제8대 김동조(金東祚) 1967년 10월 - 1973년 12월
제9대 함병춘(咸秉春) 1973년 12월 - 1977년 4월
제10대 김용식(金溶植) 1977년 4월 - 1981년 6월
제11대 류병현(柳炳賢) 1981년 7월 - 1985년 11월
제12대 김경원(金瓊元) 1985년 11월 - 1988년 4월
제13대 박동진(朴東鎭) 1988년 4월 - 1991년 3월
제14대 현홍주(玄鴻柱) 1991년 3월 - 1993년 4월
제15대 한승수(韓昇洙) 1993년 4월 - 1994년 12월
제16대 박건우(朴健雨) 1995년 1월 - 1998년 4월
제17대 이홍구(李洪九) 1998년 5월 - 2000년 8월
제18대 양성철(梁性喆) 2000년 8월 - 2003년 4월
제19대 한승주(韓昇洲) 2003년 4월 - 2005년 2월
제20대 홍석현(洪錫炫) 2005년 2월 - 2005년 9월
제21대 이태식(李泰植) 2005년 10월 - 2009년 2월
제22대 한덕수(韓悳洙) 2009년 2월 - 2012년 2월
제23대 최영진(崔英鎭) 2012년 2월 - 2013년 5월
제24대 안호영(安豪榮) 2013년 6월 - 현재
장면 대사(1951년)
한승주 대사 (2003년)
한덕수 대사 (2009년~2012년)

1949년 1월 2일 이승만이 장면을 주미 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내는 한편, [2] 대기중이던 장면 특사에게 미국에 그대로 머물러 주미 대사관 창설 작업을 착수하도록 지시하는 전문을 보냈다. 장면은 귀국할 예정으로 모든 짐을 본국에 부친 후였고, 대사 임명과 같은 일은 예기치 못했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었다. 그러나, 곧 대사관을 창설하라는 이승만의 전문을 받고서는 워싱턴으로 달려가 한국인 비서 한 사람을 구해 그와 함께, 임시정부 때 쓰던 구미외교위원부를 깨끗이 청소하고 우선 사무실을 꾸몄다. 이로써 주한미국대사관의 첫 건물은 구미외교위원부에서 시작하였다. 이렇게 장면은 주한미국대사관 개설 준비에 착수하여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다. 대사관이라고는 하나 처음 하는 일이라 이튼날부터 파리 유엔총회 때 얼굴을 익힌 각국 대사들을 찾아다니며 솔직히 입장을 이야기하고 서식, 편제 등 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3] [4]

1949년 4월 10일 주미 대사관에,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을 비밀리에 실천하라는 지시를 담은 편지가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장면 대사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의회내 극우파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장면 대사와 조병옥 특사의 외교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그 후 미국의 대(大)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트루먼 행정부의 대공유화(對共宥和) 정책을 비난하고 "두 한국 외교관의 호소는 미국으로부터 당연히 응답을 얻을 수가 있어야한다"고 지적했다. 미국내에서 군사원조에 대한 여론이 호전되고 있을 때, 미국 극동담당 차관보인 윌튼 버터워스(W. Walton Butterworth) 가 장면대사에게 국무성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버터워스는 조병옥 특사와 장면 대사의 미국정부에 대한 군사원조 요구와 주장을 미국내에서 여론화시키는 작업때문에 국무성이 곤경에 빠졌으므로 장면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를 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 사정을 미국 일반시민에게 직접 호소해서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것은 정당한 방법도 아니며 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강력한 방위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여 국민으로하여금 정부의 방위력을 믿게 하고 또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하면서 정상적인 외교절차를 밟아 무기와 군장비를 요청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국 정부가 계속 이대로 남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는 성명을 낸다면 한국 국민사이에 불안감만 조성하여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의 목적과 활동을 돕는 결과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국무성의 항의에 대해 장면 대사는 "우리는 어떤 책략으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우리의 위급한 사정을 우방인 미국국민에게 호소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도의적인 책임을 환기시키고자 했을 뿐"이라고 응수했다.(장면 회고록을 재인용) [5] 1949년 6월 14일 주미 대사 장면은 미국 국무장관 서리, 딘 애치슨과 회담, 무기 원조를 요청하였다.

1949년 12월 중순, 이승만은 주미 대사 장면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6] 1950년 1월 20일, 장면은 극동 차관보 버터워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장면은 1월 19일, 경제협력처의 대한(對韓)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1월 19일에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7]

관련 웹사이트[편집]

주석[편집]

  1. 1882년 ~ 의정(議定)했다.: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93쪽.
  2. [대한민국 제1호] 張勉 초대 주미대사 붓글씨로 신임장 작성-조 선일보 "1949년 1월 1일 미국이 가장 먼저 우리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자, 정부는 당시 유엔 파견 수석 대표였던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3. 장면 회고록, "한알의 밀이 죽지않고...
  4.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경향신문》, 1975년 3월 12일 작성. "."
  5. "秘錄 韓國外交<32> : 政府樹立 직후⑭", 《경향신문》, 1975년 3월 26일 작성.
  6. 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4페이지
  7. FRUS 1950 Vol. VII Korea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