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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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년 11월 15일- 1957년 5월 2일)는 미국의 정치가이다. 위스콘신 주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단적인 반공 활동과 공산주의성격을 가진 미국 유명인사에 대한 청문, 고소 및 추방으로 알려져 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초기 생애

조지프 매카시는 위스콘신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고학으로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 마켓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마켓 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 재직 시절 위스콘신 주의 낙농업을 하는 농부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어 낙농업이 발달한 위스콘신 주에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위스콘신 주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 전쟁 참전 전에 낙농업 관련 판결로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어,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편집] 매카시즘의 시작

이 부분의 본문은 매카시즘입니다.

상원의원 재직 초기 매카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선 의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7일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 이었다.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장, 소련의 원폭 실험과 중앙유럽·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당시 미국을 휩쓸던 외국인 혐오증 등은 정치적 상품으로서 반공의 가치를 크게 돋보이게 만들었다.[1]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행한 반공주의 연설에서 이른바 매카시즘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2] 매카시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편집] 매카시 시대

매카시의 연설로 미국 전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면서 국민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청문회를 통해 그의 주장은 허위였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매카시 시대"로 불릴 정도로 반공주의의 바람이 몰아쳤다. 또한 매카시의 반공주의 발언에서 유래한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잡았다. 수백명에 이르는 유명 정치, 예술, 과학인사들이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술하고, 공산주의 성격을 가진 동료의 이름을 밀고하기를 강요당했으며, 졸지에 직장을 잃었다. 1952년 재선된 그는 계속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어느 누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여론을 선동하며 사회적인 심판을 기도하였다.

[편집] 매카시즘의 종말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공화당민주당 양당 지도부,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허풍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3]1954년 12월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편집] 평가

매카시 시대에 적극 동조한 유명인으로는 유명한 반공주의자들인 로널드 레이건, 엘리아 카잔,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피해자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라 미국은 1950년대에 소련 간첩망의 침투를 막을 수 있었고 실제로 그의 간첩망에 대한 주장은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극우주의 논객인 앤 쿨터는 자신의 저서 "Treason: Liberal Treachery from the Cold War to the War on Terrorism"에서 냉전의 붕괴 이후 1995년 공개된 베노너 프로젝트라는 미국의 극비문서에 의하면 그의 주장의 일부가 사실로 밝혀졌고 소련의 기밀문서들과 KGB소속 요원들의 증언 등을 통해 메카시의 대다수 주장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가 지목한 사람들 중 대표적인 소련의 스파이들은 얄타회담에 참가한 국무부 고위 관료 엘저 히스, 원자탄 기술을 소련에 넘긴 로젠버그 부부, 브레튼우즈 협정을 탄생시킨 재무부 고위 관료 해리 화이트 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비슷한 주장을 윌리엄 노먼 그릭과 메드포드 스탠턴 에반스가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류 역사학자들에게 부인주의로 취급된다[4] 또한, 매카시즘에 대한 반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반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전파, 소련의 간첩에 대한 저항감이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켰다.[5] 존 얼 헤인즈에 따르면 매카시가 간첩이라고 지목한 159명 중에서 간첩이라는 증거나 의혹이 있는 사람은 단 9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러한 비율은 도저히 정책으로서는 성공적인 비율이라고 볼 수 없으며 우연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비율이다.

[편집] 주석

  1. Robert Sherrill, 〈The Trajectory of a Bumbler〉, 《New York Times Book Review》, June 5, 1983, p.30.
  2. Barnet Bakerville, 〈Joe McCarthy, Brief-Case Demagogue〉, 《Today's Speech》2 (September 1954), p.14.
  3. 《교실밖 세계사여행》:20세기에 부활한 마녀사냥, 매카시 선풍/김성환 지음/사계절 p.273
  4. Oshinsky, David M. (2005). A Conspiracy So Immense: The World of Joe McCarthy. Oxford University Press
  5. Haynes, John Earl (2000 February). Exchange with Arthur Herman and Venona book talk. 2007년 7월 11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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