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토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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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Tyousokabe Mototika.jpg
시대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 덴분 8년(1539년)
사망 게이초 4년 1599년 5월 19일
별명 아명 : 미사부로(弥三郎)
별명 : 토좌시종,
어린 아가씨(姫若子)、
귀신 같은 아이(鬼若子)、
토좌의 출중한 인물(土佐の出来人)
계명 雪渓如三大居士
雪蹊恕三大禅定門
묘소 덴보지산(天甫寺山)(고치현 고치 시
관위 종사위하 궁내소보(宮内少輔), 토좌수(土佐守), 시종(侍従)
주군 이치조 가네사다→자립→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리
씨족 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부모 아버지 : 조소카베 쿠니치카
어머니 : 미노 사이도씨
형제 조소카베 모토치카키라 치카사다(吉良親貞)、코소카베 치카야스(香宗我部親泰)、시마 치카마스(島親益)、누이 모토야마 시게토키(本山茂辰)의 아내、누이 지 요리카즈(池頼和)의 아내、누이 하카와 키요무네(波川清宗)의 아내
아내 정실 : 이시타니 미쓰마사(石谷光政)의 딸
측실 : 소소장(小少将)-호소카와 사네유키(細川真之)의 어머니,
아케치 미쓰히데의 여조카
자녀 조소카베 노부치카(長宗我部信親)
카가와 치카카즈(香川親和)
쓰노 치카타다(津野親忠)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조소카베 우근대부(長宗我部右近大夫, 모토치카의 5남으로 이름 불명, 우근대부는 그의 관위)
조소카베 야스토요(長宗我部康豊)
딸, 이치조 타다마사(一条內政)의 아내
딸, 키라 치카자네(吉良親実)의 아내
사타케 치카나오(佐竹親直)의 아내
딸, 요시마츠 주자에몬(吉松十左衛門, (이름 불명)의 아내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ちょうそかべ もとちか, 1539년 ~ 1599년)는 조소카베가(家)의 제 20대 당주이다. 도사(土佐)의 센고쿠 다이묘로 전성기에는 시코쿠의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1586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침공을 받고 항복, 이후에도 도사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임진왜란정유재란에도 참전했다.

가독 승계까지[편집]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39년(덴분 8년), 조소카베가 제 19대 당주인 조소카베 쿠니치카(長宗我部國親)와 그의 정실 미노(美濃) 사이토 씨(斎藤氏)의 장남으로 오코우 성(岡豊城)에서 태어났다. 휘의 원(元)은 간레이(管領)인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에게서 받은 것이다.

1560년 5월 아버지를 따라 모토야마 씨(本山氏)와의 전쟁에 종군, 나가하마 전투(長浜の戦)에서는 최초의 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그때까지의 나약하다는 인상을 단번에 떨쳐버렸다. 그 해 6월에 쿠니치카가 급사하자 가독을 승계하였다. 1562년에는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의 이치조 씨(一条氏)와 함께 아사쿠라 성(朝倉城)을 공격했다. 1563년에는 이시타니 미쓰마사(石谷光政)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고 이로 인해 사이토 도시미쓰(斎藤利三)의 매제가 되었다. 같은 해에는 자신의 큰 동생 치카사다(親貞)로 하여금 키라 씨(吉良氏)의 뒤를 잇게 하여 세력을 넓혔다. 한편으로는 코소카베 씨(香宗我部氏)에 양자로 들어가 있던 둘째 동생 치카야스(親泰)의 영지에 인접한 도사 동부의 아키 쿠니토라(安芸国虎)와도 충돌했다.

토사 통일[편집]

1567년, 코노씨(河野氏)가 모리씨(毛利氏)와 연합해 이치조 가네사다(一条兼定)를 공격해 승리하자 세력이 무척 약화된 이치조 씨로부터의 독립을 가속화했다. 1568년에는 모토야마 씨를, 이듬해에는 아키 씨를 멸망시키고 서부를 제외한 도사 전역을 장악했다. 이어서 1571년에는 이치조 가의 가신인 쓰노 씨(津野氏)를 멸하고 자신의 삼남인 치카타다(親忠)로 하여금 쓰노 씨를 잇도록 하였으며 1574년에는 이미 전년에 압력을 행사해 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이치조 가네사다를 추방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치조 타다마사(一条內政)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오토모 씨(大友氏)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는 이치조 가네사다에 의해 한때 고전했으나 결국 와다리카와 전투(四万十川の戦)에서 승리하고 도사 내에서의 패권을 공고히 했다.

시코쿠 통일[편집]

토사를 통일한 초소카베 모토치카는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목표가 된 아와(阿波)와 사누키(讃岐)는 오다 노부나가 이전에 기나이(畿内)와 긴키(近畿)에서 세력을 떨치던 미요시 씨(三好氏)가 시코쿠 동부에 둔 기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손잡고 협공해도 만만치 않아 미요시 씨와 그 잔당의 힘이 시코쿠에서 현저히 쇠퇴할 때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사누키 제압의 일환으로 1578년에는 둘째 아들 치카카즈(親和)를 사누키의 유력 호족 카가와(香川) 가문의 양자로 보내었고 1580년까지 이 두 지방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한편 시코쿠 서부에서는 오카모토 성(岡本城)을 공격하던 히사타케 치카노부(久武親信)가 전사하면서 이요(伊予) 지방 공략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토사와 아와의 영유권만을 인정하며 신종을 요구했다. 모토치카는 이를 거절했고 노부나가와는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노부나가는 미요시 씨의 잔당인 소고 나가야스(十河存保)가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는 것을 지원하는 한편 1582년에는 간베 노부타카(神戸信孝)를 총대장으로 하여 시코쿠 정벌군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 측에서 조소카베가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자는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인데 모토치카의 측실이 미쓰히데의 조카이고 처형인 사이토 도시미쓰가 미쓰히데의 일족인 탓도 있었다. 인척인 초소카베가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것과 이후 시코쿠에 비교적 가까운 기나이와 야마토(大和)에서의 퇴거를 명령받은 것이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뜻하지 않았던 이변으로 오다가의 세력이 분열된 틈을 타 모토치카는 소고 나가야스의 세력을 시코쿠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모토치카는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지원했지만 가쓰이에는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자결했다. 그 후에도 그는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손잡고 하시바 히데요시에 대항, 1584년에는 히데요시가 보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격파했다. 1585년에는 사이온지 씨(西園寺氏)와 코노 씨를 굴복시켜 이요마저 제압해 시코쿠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하시바군의 시코쿠 정벌[편집]

이 무렵, 오다 노부카쓰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화친하여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타세력의 지원이 없이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가 총지휘하는 시코쿠 정벌군 12만 명에 대항하게 되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까지 아군으로 끌어들인 상황이었으므로 갓 시코쿠를 제패한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대항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이때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전의 노부나가처럼 모토치카가 도사, 아와를 영유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머지 영토는 포기하라고 요구했는데 모토치카는 이요를 포기하는 것에만 동의했기 때문에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하시바 히데나가·히데츠구(秀次)는 아와로 본대를 이끌고 진입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깃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는 모리 군을 이끌고 이요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군세는 사누키에 각각 상륙해 세 방향에서 동시에 시코쿠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켜 갔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7월 25일 결국 항복했고 도사 일국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시코쿠 정벌의 성공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12월에는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의 직책까지 겸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편집]

1586년, 시마즈 씨(島津氏)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게 된 오토모 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장남 노부치카(信親)와 함께 규슈 정벌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주장은 센고쿠 히데히사였고, 얼마 전까지 적대했던 소고 나가야스 등과도 이번에는 같은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시마즈 군을 얕보아 위장 후퇴를 하는 적군을 곧바로 추격하도록 했고 추격에 나섰던 병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헤즈키카와의 전투(戸次川の戦い). 이때 소고 나가야스와 조소카베 노부치카 역시 전사했다.

1588년 거점을 오다카사카 성(大高坂城)으로 옮겼다. 노부치카의 죽음으로 인해 새 후계자를 지명할 필요가 생겼고 모토치카는 뜻에 어긋나는 의견을 낸 친족들을 할복시키면서까지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차남 치카카즈와 삼남 치카타다를 제쳐두고 4남인 모리치카(盛親)를 후계자로 정했다. 여기에 대단히 낙심한 치카카즈는 얼마 안 가 사망했다.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고 같은 해 말에는 본거지를 우라도 성(浦戸城)으로 이전했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에는 3천 명을, 정유재란에는 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1596년 스페인 선박인 산 펠리페(San Felipe) 호가 태풍을 만나 파손되어 그의 영지에서 수리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스페인의 식민 제국 건설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무시 못할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금지를 한층 더 강화했다.

1597년 3월에는 조소카베 백조목이란 법령을 반포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철수하였고,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삼남 치카타다를 유폐시켰다.

1599년 4월 모리치카와 함께 상경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알현한 후, 후시미 성(伏見城)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5월 19일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향년 61세로 숨을 거두었다.

인물·일화[편집]

청소년일 때에는 희고 창백한 얼굴에 장신이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인해 그를 얕보는 사람들은 모토치카를 '어린 아가씨'(姫若子)라고 불렀다. 나가하마 전투에서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별명이 귀신 같은 아이(鬼若子)로 바뀌었다. 도사의 출중한 인물(土佐の出来)이라는 별명은 도사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생긴 별명이다.

첫 출진 전에는 창을 쓰는 법을 몰랐다. 나가하마 전투 전에 가신인 진젠지 분고(秦泉寺豊後)로부터 창술의 기본을 가르침받은 후 실전에서도 바로 배운 것을 응용했다고 한다.

적지에서 병량을 조달할 때 성 부근의 보리를 전부 베어내고는 주변에 사는 영민들이 안됐다고 생각해 반은 그들에게 남겨 주었다. 영민들은 이 조치에 대해 감사해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진 않은 듯하다. 시코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모토치카를 '새없는 마을의 박쥐(鳥無き里の蝙蝠)'에 비유하며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평했다.

도사 영내에는 금주령(禁酒令)이 내려져 있었는데 모토치카 스스로는 술을 때때로 들여왔다. 하쿠토메 노리시게(福留儀重)의 간언을 듣고는 스스로도 금주령을 어기지 않게 되었다.

한 가신이 "어떤 이유에서 시코쿠의 패자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가신들에게 충분한 은상을 주고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도사 일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가독을 승계한 후부터 불교와 신토라는 당시 일본의 양대 종교를 중시해 시코쿠 통일을 진행하는 중에도 사누키의 사원을 부흥시키고 승려를 보호했고, 신관(神官)이나 승려 출신을 가신으로 발탁하는 예도 드물지 않았다.

헤즈키카와의 전투에서 기대를 걸고 있던 장남 노부치카가 전사하자 자신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하인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 모토치카를 위로하기 위해 오스미 국(大隅国)을 그에게 주겠다고 하였으나 모토치카는 사양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격시 조총의 높낮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다이묘들을 초청해 뱃놀이연회를 열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에게 당시 일본에는 생소하던 만두를 내어 오게 했는데 다른 다이묘과는 달리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만두를 조금만 떼어먹은 후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소카베도노(殿)는 그 만두를 어쩌실 생각이시오?"하고 묻자 모토치카는 "이것은 다이코(太閤) 전하께 고맙게 받은 만두이므로 돌아가서 아랫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마음에 든 히데요시는 모토치카에게 준비해 두었던 만두를 전부 주었다고 한다.

고요군칸(甲陽軍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와 더불어 이름 높은 무장으로 나와 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무덤 (코치 시)

참고문헌[편집]

전 임
조소카베 쿠니치카
도사 조소카베가 20대 당주
1560년 ~ 1599년
후 임
조소카베 모리치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