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외 관계
조선 시대의 대외 관계에서,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명(對明) 외교에서 사대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왕조의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대하여 1년에 세 번 사절을 파견하는 등, 정치적 목적과 함께 문화 수입과 교역을 행하였는데, 명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
조선왕조의 영토 확장 정책은 남방으로도 미쳤다. 고려 말 공민왕 이후로 식량과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본 하급 무사, 즉 왜구(倭寇) 때문에 해안 지방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그만큼 식량 부족이 심각하고 선진문명에 대한 욕구가 컸다. [1]
고종 24년(1887년)에 조선 정부에서 주외 공사를 파견키로 하고 8월에 민영휘를 도승지로서 주차 일본 변리공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주재케 한 후, 다시 박정양을 주미 공사로 부임케 하고 조신희(趙臣熙)를 영불 각국 공사로 파견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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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 [편집]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親命政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3]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조공과 사무역 [편집]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금은(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한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3]
양란 [편집]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모된 사이에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명나라의 주력부대와 함께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때도 도원수(都元帥) 강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 원병을 보내게 된 사실을 말하여 두 나라 사이에 별 일은 없었다.
그 뒤 후금은 더욱더 세력을 떨치게 되었는데도 국내에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쓰자, 후금은 명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한다. 이에 조선에서는 마지못해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 뒤 후금의 태종(太宗)은 더욱 국력을 확장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강화도를 함락시키니,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여 군신의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며 청에 대해서 해마다 막대한 세공을 보내기로 하니,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일컫는다. [3]
종속관계의 소멸 [편집]
이와 같이하여 항복한 뒤에도 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서 국론(國論)이 일치하지 않다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명을 추모(追慕)한 반면,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군신 간에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이 논의되었을 정도로 깊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사신의 내왕은 빈번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고도로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와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이 한국에도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하였고, 두 나라 학자들 사이에는 활발한 문화적 교류도 있게 되었다. [3]
임오군란이 일어나(1886년 7월(음력 6월)) 일본을 배후에 두고 있던 민씨 일족이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청나라는, 마침 임오군란 당일인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에 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임오군란)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한편 1895년 청이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3]
일본과의 관계 [편집]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이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도 했다.(대마도 정벌)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를 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자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조선과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조선은 다시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여진과의 관계 [편집]
조선 시대의 외교정책에서 가장 부심(腐心)했던 것의 하나가 바로 여진과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경우와 같이 여진에 대해서도 대체로 교린정책(交隣政策)을 쓰는 한편, 때에 따라서는 무력행사를 취하기도 하였다.
여진은 본래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명나라가 일어나자 형식상 명나라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분산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개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태조 때에 이미 함경도 지방의 경영에 착수하여 국토가 상당히 확장된 적도 있었다.
그 뒤 태종 때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한때 후퇴를 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북진책을 써서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공략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남방의 각 도(道)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한편 압록강 상류 지방에 대한 개척은 이미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어 처음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둔 이래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세종 때 여진족이 이 지방을 노략질하자, 최윤덕·이천 등을 차례로 보내어 정벌하고 사군(四郡)을 두어 방비케 되었다. 이로써 압록강 상류지방의 경영도 대개 세종 때 끝마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육진·사군을 개척함으로써 압록강·두만강 이남이 한국 영토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여진족이 한국을 자주 노략질하는 동기는 생필품의 결핍에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교린정책으로서 태종 때에는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두어서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다. 여진인이 가지고 오던 물건은 마필을 비롯하여 해동청(海東靑)·산삼(山蔘) 및 각종 모피 등이었으며,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면포·마포·저포·미두(米豆)·염장(鹽藏)·농구(農具)·종이 등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여진인의 조공·귀화(歸化)를 장려하는 한편 여진 추장들에게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하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서울에는 북평관(北平館)을 두어 내조(來朝)하는 여진인을 유숙케 하였으며,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 보냈다. 한편 명나라는 여진에 대해서는 분리정책을 써서 여진족의 통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조선에서 건주위(建州衛)의 도독(都督)에게 관직을 주어 회유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것은 조선과 여진이 결탁하여 명나라에 반항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그 뒤로 조선은 건주위와의 정식 교통을 끊고 때때로 만포진(滿浦鎭)에서 여진인의 요구에 따라 약간의 식료품만을 주게 되었다. 이 결과 생활이 어렵게 된 그들은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므로 세조와 성종 때 모두 4번에 걸쳐서 군사를 내어 여진을 정벌하였으나, 그들의 침입은 여전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여진의 노략질에 별로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1583년(선조 16)에는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 난으로 한때 육진(六鎭) 지방이 자못 위태로웠으나 당시의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粒)의 전공(戰功)으로 난은 평정되고, 따라서 육진이 보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누르하치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새로운 강력한 여진세력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는 누루하치가 사신을 보내어 내원(來援)의 뜻을 알리므로 조선에서는 그 뜻을 알기 어렵다 하여 거절한 일도 있었다.(이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신라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말하였다.이는 후의 대한민국의 역사가들의 의해 애신각라의 증거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여진이나 왜는 조선을 왜란전까지 상국으로 받들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 원병을 보내어 만주지방의 방비가 소홀하게 된 틈을 타서 더욱 세력을 확장시켜 1616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청(淸)으로 고쳤다. 조선에 대해서는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의 두 차례에 걸친 침략을 단행한 결과 형식상으로는 그 종주국이 되었다.[4]
유럽과의 관계 [편집]
유럽 문물의 전래 [편집]
중종(재위: 1506년 ~ 1544년) 이전까지는 조선 사람의 서양에 대한 지식과 의식은 매우 희박하였다. [5] 비록 중국을 통하여 서양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위치한 어떤 나라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5] 1520년(중종 25년) 이적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마카오를 점령한 사실을 전함으로써 조선 양반계급은 처음으로 유럽 사람들의 아시아 진출을 알았다. [6]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7]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8]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8]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8]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8]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8]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8] (↔이수광·한-베트남 관계·조완벽) 1611년(광해군 3년)에도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언제?]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 [9]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 [6] 이광정(李光庭)은 유럽 지도를 수입하였다. [6] 1630년(인조 8년), 정두원은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鍾) 등 서양 기계와 《천문서》,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적을 가지고 왔다. [10] 정두원은 이탈리아 사람 로드리게스로부터 한역(漢譯) 과학서적과 기구 등을 가져왔다. [6]
서양에 관한 지식과 그 문화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선조 말년에 명나라에 갔던 사신이 유럽 지도를 가져온 것이 시초였다. 이어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1593년이나 1594년)가 전래되어 이것이 일부 식자층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 뒤 조선 인조(재위: 1623년~1649년)) 때에는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문물을 가져왔으며(1631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갔을 때 아담 샬과 사귀고 귀국하는 길에 과학 서적과 천주교 서적 등을 가지고 왔다(1645년). 그러다가 김육 등의 소청으로 개량력(改良曆)의 연구를 위하여 청나라에 연구생을 파견, 1653년(효종 4)에는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게 된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5]
한편 남쪽 바다를 통한 서양인과의 접촉도 생기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따라서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Céspedes)가 온 이후, 인조 때에는 네덜란드 상인 벨테브레(박연)가 표착하여 왔다(1627년). 조선은 벨테브레 등 네덜란드 인들을 통하여 서양식 무기의 제조를 시도하였다.(1628년)[5] 이와 때를 같이해 제주도에 표착(1653년)한 네덜란드인 하멜(H. Hamel) 일행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 제조와 역법(曆法) 사용을 가르쳤다. 하멜은 13년 만인 1668년에 조선을 탈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생활을 소개하니 이는 조선의 사정을 서양인에게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 [5] 이 같은 서양문화 및 서양인과의 접촉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동양을 세계의 전부로 알던 좁은 의식은 이리하여 점차 변화 확대되었다.
천주교 탄압과 전쟁 [편집]
유럽과의 통상 개시 [편집]
그러나 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적 큰 물결에 뜬 한낱 잎사귀에 지나지 못한 일로서 효종 때 나선정벌(羅禪征伐, 1654년, 1658년)과 같은 거병(擧兵) 사실이 있었으나 조선이 서양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역시 고종(재위: 1863년 ~ 1907년) 때부터의 일이었다. [5]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케 한 구미 열강은 한국에 대한 개항 압력을 점점 노골화하였으나 흥선대원군(섭정: 1863년 ~ 1874년)은 이에 응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맞섰다.[5]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없앴고,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및 미국(1871년, 신미양요)과 강화도에서 각각 군사 분쟁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교섭은 중단되었다. [5](→흥선대원군)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하야(1874년)를 계기로 종래의 쇄국주의 정책에서 탈피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게 될 기본 계기였던 서구제국과의 개국통상(開國通商) 관계의 길을 처음으로 트게 된다. 문호가 개방되자 각국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요구하여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자, 이 사실은 유럽에도 알려져 영국(1883년)·독일(1883년)·러시아(1884년)·이탈리아(1884년)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지난날 천주교 신부를 조선에 밀파한 바 있고 병인양요 등으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아 국교가 지연되어 오다가 1886년 6월 4일 마침내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천주교의 포교가 직접 규정되지는 아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실상 포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조불 수호 통상 조약) 또한, 조선은 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5][11](→한불 관계)
이 같은 조약의 체결은 당시 일본의 세력진출을 두려워하던 청나라의 강력한 배후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한국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고 정치적 부패와 재정적 타격을 받던 이 나라를 둘러싼 열강(列强)의 세력다툼은 치열하여 조선의 약체화(弱體化)를 조장하였다. [5] 특히 그 중에서도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영국의 세력확장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은 한때 동양함대(東洋艦隊)를 보내어 거문도를 점령(1885년)하고 러시아와의 무력적 충돌을 기도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5] 그러나 한국에 대하여 가장 끈덕지게 세력진출을 꾀한 것은 러시아로서 외교 수완이 능숙한 베베르(Woeber)를 내세워 조정에서 큰 세력을 잡고 친러파(親露波)를 형성케 하여 정계를 좌우하고 한때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이치(移置)시켜 친러파 내각을 조직,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한 적도 있었다. [5] 이러한 러시아의 진출은 필경 일본·청의 세력과 대립되어 마침내는 러·청·일의 대립을 보게 하여 조선은 완전히 이들 3국의 각축장(角逐場)으로 변해 버렸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5] 그 결과 일본의 승리로 그들의 세력진출은 막히게 되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침탈사가 개시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해 [12]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5] 그리고 마침내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멸망한다.
한편 문호개방 이후 입국한 각국의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개별적인 접촉도 빈번하여 우호와 문화교류에 공을 세워 이를 계기로, 당시까지 서양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외국에 소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특히 종교·교육·의료사업에 공이 컸다. [5]
함께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조선초의 대외관계〔槪說〕〉
- ↑ 이선근. “續朝鮮最近世史 (156) 甲午以前의 內情 東學亂과 日淸戰爭(9)”, 《동아일보》, 1934년 9월 22일 작성.
- ↑ 가 나 다 라 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과의 관계〉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여진과의 관계〉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구미 열강과의 관계〉
- ↑ 가 나 다 라 송건호, 《송건호 전집1》 한길사 (2002) ISBN 8935655015
- ↑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어떤 자료[출처 필요]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 9788991221284
- ↑ 이은직 저, 정홍준 역, 《조선명인전 3》 일빛 (2005) 407쪽ISBN 8956450889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두원〉
- ↑ 한국이 근대적 의미에서 외국과 조약을 맺은 것은 1876년 일본과의 조약체결이 최초이다.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과 서구 제국의 관계〔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