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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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라 투르 (Georges de La Tour)(1593. 3. 13 ~ 1652. 1. 30)는 로렌 공국[1]에서 태어난 바로크 시대의 화가. 거짓과 속임이 난무한 세상의 일면을 통찰하는 풍속화와 경건한 신앙과 고요한 명상으로 이끄는 종교화를 주로 그린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당대에 유명했으나 사후에는 잊혔다가 1934년에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17세기 불란서의 사실주의 화가들」 덕분에 재주목되어 오늘날 불란서 미술사의 주요한 화가로서 인정받게 됐다.

1593년에 로렌 공국의 부유한 가문의 제빵사 아들로 태어나 이태리를 여행하고서 뤼네빌에 정착해 부유하고 명망 있는 시민이 됐으리라 추정되는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성장하던 1600년대 초기 구주 미술은, 1520년경에서 1600년 초에 걸쳐 회화를 중심으로 구주 전체를 풍미한 미술 양식인 매너리즘[2]이 주도하고 있었고 조르주 드 라 투르도 매너리즘 화가인 자크 벨랑주[3]에게 미술을 교육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나 매너리즘보다는 네덜란드의 화가 헨드릭 테르브뤼헌[4]과 이태리의 화가 카라바조[5]에게 크게 영향받은 조르주 드 라 투르는 1617년 귀족의 딸과 혼인했으며, 1620년 아내의 고향인 뤼네빌에 공방을 설립한 후 공방이 번창하자 도제들을 고용하고 토지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일궈 나아갔으나 1630년대 말에 10년간 전쟁과 페스트가 로렌 공작령을 휩쓴 탓에 뤼네빌이 죽음과 약탈로 혼란에 빠지자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전쟁을 피해 파리로 가서 루이 13세의 궁정에 전속된 화가가 되었다. 루이 13세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소장한 뒤 자신의 방에 있던 다른 그림을 모두 치우라고 했을 정도로 조르주 드 라 투르의 그림을 각별히 애호했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은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분위기를 환기하고 종교에 딸린 명상에 잠기게 한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회화로 추정되는 서른다섯 점은 밤 장면과 낮 장면의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낮 장면 회화에 화려한 의상을 차령 입고 등장한, 훨씬 더 많은 수의 人들은 카드놀이를 하거나 점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밤 장면들은 대개 燭火 한 개에 의해 빛나고 소박하면서 친숙한 보잘것없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독교 聖經上 여러 이야기를 묘사했다. 이 밤 장면들은 회화 공간을 채우는 제한된 人들로 규정되어 있다. 절제된 색의 사용과 대담하고 기하학스러운 구성은 진지하고 사실에 부합한 분위기를 더한다. 단순화 형태와 세밀하게 관찰된 세부 묘사, 빛을 능숙히 사용하여 당대 화가인 니콜라스 푸생[6]과 클로드 로랭[7]의 작품과 구별되는, 키아로스쿠로[8]의 대가였던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직접 영향받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빛 그림은 어둠 속에서 빛의 근원을 드러내면서 종교에 딸린 이야기에 고요한 극을 관람하듯이 인상 깊고 감동스러운 효과를 부여했다.


1643년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돌아온 뤼네빌에서 줄곧 머물다가 1652년 신증후성출열혈[9]로 죽었다. 아내는 이미 신증후성출열혈로 죽은 뒤였다. 사후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재주목된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역사에 매몰되었는지는 제설이 분분하지만,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단순하고 외현한 일반 사실만을 표현하며 명암이 뚜렷한 화법이 루이 13세 뒤에 이어진 루이 14세 시대의 거대하고 성대하면서 환하게 빛나고 고우면서 아름다운 분위기에는 상충한다는 의견이 있으며, 조르주 드 라 투르가 파리를 떠나 뤼네빌로 돌아갔지만, 삼십년전쟁[10]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주요한 여러 작품이 대부분 消失됐다고도 하고 또 다른 기록[출처 필요]에 나타난, 말년의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상당한 재산가인 일변으로는 다른 사람을 주먹과 발과 몽둥이를 이용해 거칠고 사납게 제압하는 고리대금업자였고 자신의 집에 매여 일하는 사람에게 절도를 使嗾하는 악행을 일삼은 정황을 이용해 유추컨대 그로 말미암아 잃은 민심도 사후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역사에 서둘러 묻힌 원인인 듯하다. 조르주 드 라 투르가 그린, 종교에 딸린 경건하고 숭고한 분위기의 여러 작품을 고려할 때 불가해한 행동이지만, 조르주 드 라 투르가 일상을 주제로 그린 풍속화를 보면 거짓과 속임이 난무한 세상의 일면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 세계에서도 상반된 분위기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는 『여자 점쟁이』(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목자 성 요셉』(루브르 박물관), 『예수 탄생』(렌 미술관), 『사기꾼』(1635),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1640-1645) 등이 있다.

각주[편집]

외부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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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란서 로렌 () 빅쉬르세유 (Vic-sur-Seille)
  2. Mannerism;Manierismo;Maniérisme;1520년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주로 繪畫를 중심으로 구주 전체를 風靡한 미술 양식. 용어 매너리즘은 17세기 이후부터 미술에 관한 문헌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역사상ㆍ비평상 의미가 함축/복합된 의미로 문학비평과 신학에도 통용됐다. 보통 미술사 시대 구분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履行期인 1530년에서 1600년에 이태리에서 출현했던 過渡期다운 미술 양식을 말한다. 매너리즘이란 成熟期 르네상스 고전주의 衰退를 뜻하거나 對고전주의 반동을 云謂하며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橋梁 역할로 가끔 간주되기도 했다. 명칭은 ‘스타일, 양식’을 의미하는 이태리어 ‘마니에라’에서 유래했고 개성 있는 양식이 아닌 模倣이나 아류를 위시해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내포해서 ‘매너리즘’은 ‘退步에 도달한 전통주의’ 혹은 ‘精神上 위기 시대에 頭角을 나타낸 죽어 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으로 罵倒되기도 했으나 20세기 초 매너리즘 시대 예술가들을 향한 관심이 부활하면서 매너리즘을 엘 그레코에서 정점에 이른 구주의 예술운동으로 소개하기 시작한 독일의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이 독일 표현주의의 歪曲된 미학과 激烈한 정신이 무분별하고 奇妙하게 反映된 양식이라고 간주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매너리즘을 ‘독특한 방식에의 과도하거나 부자연스러운 耽溺’이라고 정의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역사가들은 용어로서 ‘매너리즘’보다 ‘후기 르네상스’를 애호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이 顯露하는 誇張과 緊張을 當代가 르네상스 시대처럼 단일한 理想에 지배되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경향이 交叉하면서 葛藤하던 위기 시대였던 데서 오는 전체에 걸친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13세기에서 15세기의 불란서 궁정문학이나 이태리에서 ‘매너’는 人의 普遍한 행동과 예술 양식에 사용되는 말로서 영어 ‘스타일’과 유의어였다. 바자리는, ‘매너’는 유사한 예술작품의 肯定性을 의미하는 ‘우아’와 사실에 부합한다기보다는 ‘理想化 美, 기품, 洗鍊, 能熟’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술에서 매너리즘의 특징은 왜곡되고 늘어진 구불거리는 형상, 불명료한 구도, 樣式性을 띤 속임수와 기괴한 효과 등이다. 콘트라포스트와 인체를 극도로 길게 늘이는 과장된 표현이 조각과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너리스트 미술은 열광하는 감정, 緊張되고 부조화스러운 감각, 신경의 불안한 감도를 전달한다. 묘사하는 내용 자체는 기묘하고 두 가지 이상이 합해졌지만, 내용보다는 양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고전다운 조화와 미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이상에 고의로 反旗하거나 전통과 단절하려고 한 듯한 이유나 증거는 없는 16세기 이태리의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오히려 조금 더 미묘하고 세련된 優雅를 추구하려고 으며 코레지오와 라파엘로 산지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달성했던 최상 완벽을 계속 추구하려고 했으나 신플라톤주의의 교리와 자연미 재현보다는 예술가들이 사유 가능한 범위에서 가정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미가 강조됐으며, 더 큰 美上 효과를 추구하고자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장려되어 과장되고 정상을 벗어나 불건전하고 과도해 때로는 기괴하기까지 한 작품이 나오게 됐으며 엘리트 소수에게 부응하려면 甚遠한 암시, 驚異, 新鮮을 추구해야 했다. 16세기 말에 와서 고전다운 균형, 이성과 자연의 조화, 편안과 기능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이상은 매너리즘의 불안정성, 畸形 자세, 불안정한 구도, 자의식 강한 기교, 模糊의 강조로 변형되 20세기의 초현실주의의 한 특성을 결국 예고한 일변, 이태리 매너리즘의 裝飾上 優雅, 유식한 에로티시즘은 불란서 퐁텐블로派 속에서 불란서다운 취향으로 변모했다. 영국에서 매너리즘의 영향은 미약하나마 엘리자베스 시대의 예술에서 엿볼 수 있다. 1590년대에 매너리즘은 카라밧지오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신고전주의에 의해 밀려나게 된 후 18세기 말에 낭만주의 화가 몇몇에 의해 일시로 부활됐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과 매너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나 매너리즘을 대상으로 한 20세기의 관심은 전체에 걸쳐 그 동기가 모호하고 해석상 의견도 相衝하며, 전체에 걸쳐 매너리즘은 기교주의, 형식주의, 현상 유지를 고수하는 경향이나 자세를 비판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3. Jacques Bellange
  4. Hendrick Terbrugghen
  5. Caravaggio
  6. Nicolas Poussin
  7. Claude Lorrain
  8. chiaroscuro;회화에서 빛과 어둠의 조화나 대비를 이용해 대상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방법.
  9. 腎症候性出血熱;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한탄 바이러스, 서울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급성 열성 질환;급성으로 발열, 요통과 출혈, 腎不全을 초래하는 인수 공용 감염되는 바이러스 감염증이다. 들쥐의 72%에서 90%를 차지하는 등줄쥐의 배설물이 건조되면서 호흡기를 이용해 원인 바이러스가 전파된다. 도시의 시궁쥐와 실험실의 쥐도 바이러스를 옮긴다.
  10. 三十年戰爭;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歐洲 諸國 간에 종교상 충돌로 말미암아 일어난 전쟁;1273년에 루돌프 一世가 신성로마제국 최초 황제로 즉위한 이래 16세기 전반의 전성기를 거쳐 1918년 카를 一世가 퇴위하기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다스렸으며 독일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던,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歐洲를 중심으로 세력이 막강했던 명문 왕가인 합스부르크家의 舊敎에 의한 독일 통일책을 두고 新敎의 대제후들이 일으킨 반란이 시초가 되어 諸國 간 전쟁으로 비화했다가 1648년에 독일 북부 베스트팔렌 지방의 오스나브뤼크에서 독일, 불란서, 스웨덴를 위시해 諸國이 체결한, 종전하려는 강화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에 의거해 불란서의 승리로 끝난 결과 네덜란드ㆍ스위스가 독립했고 독일의 新敎와 舊敎는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