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로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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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대-로마 전쟁
1세기경의 유대 상황
1세기경의 유대 상황
날짜 66년 - 73년
장소 유대
결과 로마의 완승
교전국
로마 제국 유대지방의 유대인
지휘관
세스티우스 갈루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기샬라의 요한
시몬
엘르아잘[1]
요세푸스
므나헴[1]
병력
80,000명 1,200,000명


제1차 유대-로마전쟁(第1次 - 戰爭, 영어: 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獨立戰爭, 66년 ~ 73년)은 때때로 위대한 반란(偉大-反亂, 히브리어: מרד הגדול, 영어: The Great Revolt)으로 불리는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의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 중에 첫 번째 전쟁을 말한다[2].

이 전쟁은 66년에 발발했는데.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3] 이 전쟁은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배경[편집]

헤롯 왕이 죽은 뒤 유대 속주는 로마의 총독에 의해 직할지배를 받았지만, 헤롯 왕의 손자 아그리파 1세의 친로마 노선으로 기원후 41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그리파 1세가 기원후 44년에 병사하자 다시 유대 속주는 로마의 직할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며 통치자로서 균형을 유지했으나, 다신교 문화인 지중해 세계 안에서 그리스나 에스파냐, 갈리아,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대 속주는 일신교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고, 이들은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며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폭리가 취해졌고 그로 인해 불만이 높은 상태에서[4] 이교도인 로마인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에게 희생제의(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을 지명하자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불만은 39년경에는 칼리굴라 황제 자신이 스스로 신을 자청하며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성전에 세우게 한 사건을 계기로 터져버렸다. 야훼(하나님)외에는 주(主)가 없다고 믿어온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로마제국의 종교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로마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와 로마제국이 임명한 제사장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비리도 로마제국에 대해 극단적인 무력항쟁[5]을 벌이던 열심당의 세력이 커져가게 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의하면 유대독립전쟁당시 열심당원들은 대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고,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6] 죄의 증거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7]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와 그 배후인 로마제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었다.

전쟁의 내용[편집]

원인[편집]

요세푸스에 따르면 전쟁의 발발은 66년 카이사레아에서 지역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들과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8] 그리스어를 할 줄 하는 로마 주둔군이 중재를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과 희생을 바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어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하였다는 것이다.

유대 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9]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한 데서 비롯된 폭동은 마침내 66년 6월에 로마 세력을 완전히 유대에서 몰아냈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내부의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에서 가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퍼져 나가서,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평소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쟁 초기[편집]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장이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진압을 위해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하고 마침 11월이라 케스티우스는 안티오키아로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그 직후 병으로 죽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유대 전쟁 모든 기간을 통틀어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한다.[10]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사다 항전[편집]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km 지점의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의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마사다의 세 요새에서 급진파들은 항전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 반란 진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ref>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했던 군단 가운데 3게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냈는데, 71년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남은 유대인 저항군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그의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다.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후 처리[편집]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의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은 이때를 전후해 크게 바뀌었다.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 가운데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기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일부는 이집트로 보내져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포로는 노예로서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11]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70인회도 폐지되었으며 여지껏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그 보조병을 합쳐 1만 명의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는 몰락했으며, 기존에 유대인들이 해마다 2드라크마씩 성전에 바치던 봉납금은 유대인에게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의무적으로 부과한다는 '유대인세'의 이름으로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보내졌다. 로마가 점령한 유대 지구에 대한 통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유대 북동부: 그 전대로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가 통치(일종의 유대인 자치구)
  • 유대 서부의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항구 도시: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사이의 중재자로서만 역할[12]
  • 예루살렘 및 내륙 지역: 시리아 속주 총독의 부하인 장관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유대 속주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림.

다만 반항하지 않은,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까지 그들의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된 기원후 73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얌니아(예루살렘과 오늘날의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라는 도시에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원)의 설립을 허가했으며,[13]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도시의 야외극장을 방문한 티투스에게 유대계 주민들을 안티오키아에서 추방해줄 것을 진정했지만 티투스는 허락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유대계 주민들의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해달라는 요청도 티투스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관련 작품[편집]

  • 『로마 제국의 탄생과 몰락』제4화 '유대인 반란'(영국 BBC 방송국 제작)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내분으로 살해
  2. 두 번째는 키토스 전쟁 115년 - 117년, 세 번째는 바르 코크바의 반란 132년 - 135년
  3. Josephus, War of the Jews II.8.11, II.13.7, II.14.4, II.14.5
  4. 로마 제국의 세금징수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불만은 마태복음에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을 나오는 것이나, 누가복음에 예수가 세리장 자캐오(삭개오)의 집을 방문했을때 민중들이 '저 사람은 죄인의 집에서 머무는구나.'라며 불만스러워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5. 열심당원들은 남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민족의 적'으로 여겨지는 사람을 죽일만큼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므로,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불만은 곧 열심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
  6.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세 즉, 수입의 십분의 일을 성전세로 내게 하고, 이를 못 내면 땅을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성서학자중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때에 환호한 민중들이 성전의 착취로 땅을 뺏긴 농민들로 이해하기도 한다.《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오경준 지음/홍성사
  7. 《역사적 예수》/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김준우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8. 요세푸스는 펠릭스ㆍ페스투스ㆍ알비누스ㆍ플로루스로 이어지는 52년부터 66년까지, 14년 동안 유대 속주를 통치했던 이들 네 명의 유대 장관의 악정에 원인이 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도 "플로루스 시대까지는 유대인의 인내가 계속되었지만 플로루스가 장관이었던 시기에 반란이 일어났다."며 비슷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9. 이는 서민의 생활 수준에서 560명의 1년 수입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양이라고 한다.
  10. 로마군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여 투항하려다 급진파들에게 살해당한 이들도 많았다.
  11. 티투스가 카이사레아에서 2,500명의 유대인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12. 이는 유대 지구 외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다른 외국도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3. 《성서 입문 상권: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정태현 지음/한님성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