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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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郑律成
정율성
기본 정보
본명정부은(鄭富恩)
출생1914년 8월 13일(1914-08-13)
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사망1976년 12월 7일(1976-12-07) (향년 62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성별남성
국적중화인민공화국
직업작곡가
배우자딩쉐송(정설송)
가족아버지 정해업,어머니 최영온,딸 정샤오티(정소제),외삼촌 최흥종,최영욱,외숙모 강명환,김필례

정율성(중국어 간체자: 郑律成, 정체자: 鄭律成, 병음: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1976년 12월 7일)은 일제강점기 조선 광주에서 출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해 활동한 음악인, 작곡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한 후 중국에 건너가 항일 운동에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항일 운동 성격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역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중국을 위해서 한 것인지 성격이 불분명하며, 객관적인 증거자료로 입증되지는 않음)[1] '조선인민군행진곡'과 '팔로군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6.25 당시에는 북한인민군 위문 활동을 하여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부역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1956년 북한의 연안파 숙청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고, 문화대혁명 당시 수색으로 수모를 당하였다. 1976년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1914년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5남 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2]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3월 신흥학교에 입학하였고, 합창단에 들어가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의 노래를 지도하였다.[3][4][5]

1933년에 정율성의 셋째 형 정의은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을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하였다. 정율성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6]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책에 의하면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정율성 항일 운동 공적의 대부분이 측근의 일방적인 증언 및 구체적 내용없이 비밀공작 수행 이런식의 기럭으로 증거자료로 입증되지가 않았다.[7]

그리고 신분 은폐를 겸하여 상하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율성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시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릴적 이름인 '부은(富恩)' 대신에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에서 '율성(律成)'으로 개명했다.

1936년 5월에 중국의 좌파 청년들이 참여하던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정율성은 추취도(鄒趣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그의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을 만돌린을 연주하며 직접 발표하였다.

1937년 10월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중국 공산당루쉰 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등에서 학습을 나갔다. 정율성은 1939년 1월에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 문예 공작에 참여하였으며,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앞서 1937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정설송(중국어 정체자: 丁雪松 딩쉐송[*])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설송은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중공 외사판공실 비서장 등을 거쳐 덩샤오핑 정권에서는 1979년과 1982년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맡기도 했다.

정율성은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처녀 두었녀성', '조선의용군행진곡', '연안송' 등 사회주의적 색깔이 짙은 노래들도 작곡하였다.

공산당 소속의 사회주의자였던 정율성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팔일오 광복으로 해방을 이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북조선로동당 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하였다.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중국에 머물며 후방의 위문 활동을 하였더. 이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의 직접적인 부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멈춘 후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아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정권의 공산주의 혁명 음악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수색으로 인해 많은 악보와 작품들을 잃어버리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1976년 12월 7일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고혈압 등으로 사망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이 안배한 바바오산의 혁명투사 공동 묘지에 시신이 묻혀 있다.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정율성의 가족엔 큰 외삼촌 최흥종 목사가 있다.

기념사업[편집]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화순군 등의 정율성 기념사업과 관련된 시설물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공통적인 문제점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제기되었다.[8]

(1) 증거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은 정율성의 항일운동을 부각시키고 항일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로 단정하여 포장하고 있다. 참고로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책에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 이런 식으로 정율성 항일운동 공적의 대부분이 측근의 일방적인 증언 및 구체적 내용없이 비밀공작 수행 이렇게 기술된 것이 대부분으로 증거자료로 입증되지가 않았다.[9]

그렇기 때문에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중국 국빈방문 직후 국가유공자 서훈 검토가 있었으나 국가보훈처의 공적심사 결과 정율성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지역 선동부장을 맡고 조선인민군가를 작곡하는 등 부역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정율성을 대한민국 유공자로 추서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며 국가보훈처 내부에서도 난색을 표하였다. 결국 2018년 제3회 독립유공자 제1공적심사위원회 제3분과 위원 회의에서 보훈처는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고 밝히며 정율성의 유공자 서훈을 부결시켰다.[10][11] 당시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심사 과정에서 독립운동 공적이 발굴되기는 커녕 해방 이후 북한 정권 관련 활동이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고 설명했다.[12]

(2) 반면 증거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된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선전 활동을 하고 북한 군가 작곡 등 이런 대한민국에 반하는 부역 활동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으며 이는 정율성음악축제 홈페이지의 정율성 소개란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정율성 기념시설들은 정율성의 항일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 하였고 객관적인 근거자료도 없지만 항일운동가로 단정하여 포장하고 있으며 반면 객관적인 근거자료로 입증된 6.25 전쟁 당시 부역 활동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광역시와 강기정 시장 측은 기념사업의 문제점을 부정하였으며 오히려 진영논리와 냉전시대의 반공 사상으로 위대한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를 모욕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민족문제연구소나 진보 언론들은 철지난 색깔론이라며 정율성 기념사업 문제점 자체를 비판하였다.

작품[편집]

  • 옌안송
  • 팔로군행진곡
  • 연수요
  • 싱안링에 눈이 내리네
  • 십륙자령 3곡
  • 오페라 <망부운>
  • 벌목요
  • 생산요
  • 강대한 함대 바다에서 행진한다
  • 우리는 행복해요
  • 초록빛 조국
  • 소산에 이르러
  • 매화를 읊노라
  • 장정
  • 진아를 기다리며
  • 청평악-육반산
  • 물길에 내 마음 싣고
  • 심원춘-장사
  • 포정함대 출동했다
  • 광창길에서
  • 매령3장
  • 중조우의 <中朝友誼>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노석조; 양지혜 (2023년 8월 25일). “정율성, 6·25때 북한군과 서울까지 내려왔다”. 《조선일보》. 2023년 9월 1일에 확인함. 
  2. 정율성의 생년에는 두 가지 이설이 있다. 1918년이라는 설은 부인 정설송(중국어 정체자: 丁雪松 딩쉐송[*])의 '우리는 동갑이었다'는 회고 및 중국인 후원자 라청의 '1937년 나는 36세의 중년이었고 정율성은 17세 꼬마청년이었다'는 회고를 바탕으로 한다.
  3. 중국의 "악성"-정율성은 한국인, 중앙일보, 1988년 8월 13일. 정율성은 1929년에 5년제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학년 1학기인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4. '중국 혁명음악 대부' 정율성 선생 '모교' 전주신흥중에서 명예졸업장,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13일. 2008년 3월에 전주신흥중학교가 정율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5. 전주신흥학교 총동문회는 2019년 1월 28일 정율성에게 자랑스런 신흥인상을 수여하였다.
  6. 정율성이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는 의견에 노기욱, '정율성의 음악관에 투영된 사상적 지향'
  7. 박희석 (2022년 7월 26일). “추적‘6·25 남침’ 때 ‘中·北 군가 작곡자’를 추앙하는 光州”. 《월간조선》 (조선뉴스프레스). 2023년 9월 1일에 확인함. 
  8. 민주·평화·인권 도시’가 ▲남침 독려 ▲독재자 찬양 인사 기리는 ‘모순
  9. 민주·평화·인권 도시’가 ▲남침 독려 ▲독재자 찬양 인사 기리는 ‘모순’
  10. 文정부, 방중 직후 정율성 국가유공자 서훈 추진했었다
  11. 정율성, 6·25때 북한군과 서울까지 내려왔다
  12. [문재인 정부 때 정율성 서훈 시도… "공적심사에서 부결"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