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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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루이 14세. 많은 사람들이 절대주의의 상징으로 본다.[1]

절대주의(絶對主義, Absolutism)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특색지워 주는 독재정치 형태이다.

개요[편집]

이 시대는 봉건적 대토지 소유자인 영주(領主)의 세력이 점차로 쇠퇴해 가고 있어 농업이나 공업에 소(小) 부르주아적 생산자가 대두하고 있었다. 국왕은 봉건 영주의 약체화에 대응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농민 수탈의 여러 권리를 자기 수중에 집중화(集中化)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면서 국민적 통일국가의 실현을 꾀하고 있었다.

국왕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팽대(膨大)한 관료 기구와 국왕 직속의 상비군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거액의 경상비를 필요로 했다. 이 비용은 왕의 광대한 영토로부터의 수입, 중앙집권화된 지대(地代)로서의 지조(地租), 그 위에 신흥 시민계급인 상인·공업인에 부과한 세수입에 의하여 잘 처리되었다.

이처럼 절대주의의 재산적 기초는 여전히 봉건적 토지 소유 위에 한쪽 발판을 두면서 동시에 신흥 시민계급의 경제적 부(富)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더구나 왕의 영지에서의 수입이나 지조 수입(地租收入)이 고정화되어 옴에 따라 상공업자의 부력(富力)에 의존하는 정도가 한층 굳어지고 있었다.

경제발전은 궁정을 중심으로 한 국왕의 생활을 점점 사치스럽게 하고 여기에 더하여 국왕의 위세(威勢)를 보이기 위해 되풀이되는 대외전쟁은 국가 재정을 핍박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한때 국왕의 권력은 봉건적 세력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고, 시민계급 또한 왕권을 통제할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왕권은 전국민적 이해(利害)를 대표한 듯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이 절대왕제(絶對王制)와 전제주의(專制主義) 일반을 명확히 구별해 준다.

프랑스의 절대주의[편집]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백년전쟁 말기 샤를 7세 시대에서 시작되어 앙리 4세 시대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절대주의가 최성기(最盛期)를 이룬 것은 17세기 후반의 루이 14세 시대였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영국과 달리 봉건적 세력의 해체는 극히 불분명하고 농노 해방은 철저하지 못하여 독립 자영농민의 광범한 형성은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농민의 대부분은 현물지대(現物地代)와 각종 의무 부담이 부과된 절반 소작(折半小作)이었으며, 자본의 축적도 불충분하여 자유로운 공업의 전개는 늦어지고, 도매 상인에게 지배된 길드적 수공업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국내 산업의 육성도 결국 왕립(王立)·국립(國立) 혹은 특권적 매뉴팩처를 조성하는 데 그쳤다. 프랑스에서의 귀족의 세력은 뿌리가 깊어,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왕권에 도전하려 했으며, 특권의 회복을 기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앙리 4세 이래 이러한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의 강화와 국내 통일을 이루려는 시책이 역대 여러 왕에 의하여 실행되어 루이 14세 친정 시대(親政時代)의 왕권은 비할 데 없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에 의한 대외 전쟁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고, 위그노의 추방은 프랑스의 경제적 발전을 극히 저해했다.

루이 15세 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절대주의의 모순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루이 16세 시대에는 이미 이러한 모순은 개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러시아의 절대주의[편집]

15세기 이반 3세에 의하여 모스크바 대공(大公)의 군주권(君主權)이 신장되었는데, 이반 4세(雷帝)는 정식으로 차르의 칭호를 채용하여 귀족을 누르고, 드보랸스토보(士族)의 지위를 향상시켜서 군주권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한편 차르는 지방 행정 개혁을 통하여 행정과 사법의 권한을 귀족으로부터 사족(士族)에 옮겼다. 사족계급의 입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유농민 공동체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 수도원령(修道院領)에까지 영토 확대의 손을 뻗쳤다. 이 정책으로 농민은 궁핍해지고, 도망하는 농민이 늘어났다. 이러한 농민과 귀족계급의 불만은 17세기 초 대동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 동란 중에 많은 명문 귀족을 몰락으로 이끈 사족계급이나 상인을 배경으로 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새로운 전제정치가 성립되었다.

국내 질서의 재건으로 도망농민의 귀환을 강화하고 농민의 영주(領主)에 종속성(從屬性)을 굳혀 사족계급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농노제(農奴制)의 재편성 강화는 1662년의 모스크바 민중 반란이나 1770년대의 스텐카 라진 대반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이 진압되자 차리즘(Tsarism)은 다시 강화되고, 미하일 1세의 아들 알렉세이의 만년이 되면 전국회의(全國會議, Zemckii Sobor, 젬스키 소보르)의 소집은 차차 적어지고 군주권은 강화되었다. 사족계급과 상인층도 확실히 세력을 강화하고, 특히 사족계급 출신 지사(知事)를 중심으로 지방 권력의 이행(移行)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절대왕제의 강화와 중앙 행정기구의 재편성이 진척되었다.

같이 읽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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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ench Absolutism (프랑스 전제군주제). 《SUNY Suffolk history department》. 2010년 3월 29일에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