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 서울 출생)은 한국의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훈민정음 원본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내고, 전쟁 속에서 지켜냈으며, 이를 모아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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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906년 서울에서 으뜸가는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우리의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62년 사망 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편집]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이다. 특히 안동에서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편집] 훈민정음
1942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최초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간송 선생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천원을,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격으로 만원을 치렀다. 당시 천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거간 노릇은 한 김태준과 이용준은 사회주의자로, 판매한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고,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한다.
[편집] 고려청자
개츠비로 부터 사들인 국보급 고려청자 20점은 모두 사십만원에 사들였는데 원래 제시한 가격은 오십만원 이상이었으나 간송 선생의 문화재 사랑에 감동하여 판매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편집] 6.25 전쟁
6.25 사변 중 북한이 간송의 소장품들을 모두 가져가려하자 포장을 맡아하던 소전 손재형 선생과 혜곡 최순우 선생이 이 핑계 저 핑계로 못가져가도록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부러뜨리기 까지 하였다고 한다. 간송 선생 또한 피난을 가지 않고 보화각 근처 빈집에 숨어 소장품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였다 한다.
[편집] 참고 자료
- 간송 전형필, 이충렬 저, 김영사
-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샘터
- 지식채널e - 바보같은 남자,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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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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