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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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專諸, ? ~ 기원전 515년)는 중국 춘추 시대 (吳) 당읍(堂邑) 사람으로 《사기》자객열전에 수록된 다섯 명의 자객의 한 명이다.

생애[편집]

전제는 원래 도호(屠戶) 즉 백정 출신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가 극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월절서》(越絕書)에는 한창 싸우다가도 부인이 부르는 말만 들으면 바로 싸움을 그만두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며 그를 구내(懼內) 즉 공처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에서 도망쳐 오에 와있던 오자서(伍子胥)가 이것을 보고 "1만 명과도 대적할 힘이 있다는 네가 어째서 아녀자 한 명이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을 때, 전제는 "여자 한 사람의 손에 굴복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만 명의 위에도 설 수 있을 것입니다(能屈服在一個女人手下的,必能伸展在萬夫之上)"라고 대답했고, 오자서는 이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로 도망쳐 와있던 오자서는 오의 왕 (僚)를 만나 초를 치는 것이 오에게 이득이 됨을 설득했는데, 요의 사촌형이던 공자(公子) (光)은 그것을 오자서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에서 비롯된 것일 뿐 오의 국익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쏘아붙였다. 오왕 요는 초를 치는 것을 단념했지만, 오자서는 공자 광이 요를 죽일 마음이 있음을 알아채고 아직은 전쟁에 대한 문제를 설득할 때가 아니라고 여겨, 전제를 공자 광에게 추천했다.

광은 전제를 얻고 나서 그를 빈객으로 대우했는데, 오왕 요 재위 9년(기원전 516년)에 초에서 평왕(平王)이 죽고, 그 해 봄에 요는 초의 국상을 틈타서 초를 치고자 동생인 공자 갑여(蓋餘)와 촉용(屬庸)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초의 육(六), 잠(潛)의 2읍을 포위하게 하는 한편, 연릉(延陵)의 성주로 있던 계자(季子)를 진(晉)에 보내어 제후들의 반응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초에서는 갑여와 촉용의 퇴로를 차단해버렸고, 두 공자는 오로 돌아올 수도 없게 되었다.

공자 광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전제와 의논했는데, 전제는 평소에 공자 광의 후대에 죽음으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는데, 전제의 어머니는 그에게 대장부가 천지간에 서서 마땅히 이름을 역사에 남길 일이지 집안의 작은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 뒤, 전제에게 목이 마르다며 물을 떠오라고 해놓고 그가 나간 사이에 집의 뒤뜰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기원전 515년 4월 병자일에 무장한 병사를 지하실에 숨긴 채 술자리를 마련해 왕 요를 초청했다. 요는 병사들에게 왕궁에서 광의 집까지 진을 치고 문과 층계 좌우에 자신의 친척을 채워두게 했는데, 모두 장검을 차고 왕을 둘러싼 채 모셨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공자 광은 일부러 발이 아픈 체하며 지하실로 들어가 전제에게 구운 생선 요리를 왕에게 올리게 했는데, 생선의 뱃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왕 앞에 나아간 전제는 생선을 찢어 가르고 그 비수로 요를 찔렀다. 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전제도 왕의 측근들에게 살해되었다.

신하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공자 광은 복병을 내어 왕 요를 섬기던 무리를 모두 주살한 뒤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였고, 즉위한 뒤 전제의 아들을 상경(上卿)으로 봉했다. 아울러 태백(泰伯)의 무덤 옆에 묻히고 싶어했던 전제의 소원에 따라 정중히 장례지냈다고 한다.

(明) 중기 왕오(王鏊, 1450년 ~ 1524년)의 《고소지》(姑蘇志)에는 반문(盤門) 안의 오자서의 사당 옆에 전제의 무덤이 있었다고 적었지만,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홍산(鴻山) 동쪽 고개에도 전제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남아 있으며, 우시 시(無錫市) 다러우 항(大婁巷)에는 전제탑(專諸塔)이라는, 합려가 전제를 따로 예로서 우대하여 묻었다는 묘가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소주성(蘇州城) 서쪽에는 전제항(專諸巷)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천주항(穿珠巷)이라 한다.

어장검[편집]

전제가 오왕 요를 암살할 때 썼던 어장검(魚腸劍)은 어장검(魚藏劍)이라고도 해서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도검 장인 구치자(歐冶子)가 주조한 것인데, 《월절서》에는 (越)의 구천(勾踐)을 위해 적근산(赤堇山)의 주석과 약야계(若耶溪)의 구리를 캐어 「(담금질을 할 때) 비로 씻고 벼락으로 쳐서 천지의 정화를 거친 끝에」 다섯 자루의 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다섯 자루의 검은 각각 어장과 승사(勝邪),담로(湛盧), 순균(純鈞), 거궐(巨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어장검의 칼날 표면에는 생선의 비늘 모양의 혈조가 있었다고도 한다.

검을 감정하는 데에 뛰어났다고 알려진 설촉(薛燭)은 막 완성된 어장검을 가리켜 「도리에 거스르는 불순함으로 무언가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니, 신하가 군주를 죽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데에 쓸 검이다(逆理不順,不可服也,臣以殺君,子以殺父)」라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부피가 작아 정확하게는 검이라기보다 비수에 가까웠고, 칼끝의 예리함은 세 겹으로 된 철갑옷을 꿰뚫을 정도로서, 실제로 오왕 요가 옷 속에 보호용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장검은 그 갑옷마저 뚫어버렸다고 한다.

어장은 구치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월왕 윤상(允常, 구천의 아버지)이 승사, 담로와 함께 오왕 요에게 바쳤고 그것이 오왕 요 암살에 쓰였으며, 합려가 즉위한 뒤에는 이 검이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