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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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마을에 게양된 태극기

자유의 마을(自由-)은 한반도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 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 지역으로, 대성동 마을(臺城洞[1]-)로도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정전 협정에 따라서 1953년 8월 3일 군사정전위원회가 평화의 마을과 함께 조성하였다. 행정 구역 상의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며, 인구는 2012년 3월 19일 기준 47세대 49가구 212명이 거주하고 있다.[2]

자유의 마을은 유엔사의 민사규정과 대한민국 법률이 공동으로 적용되는 특수 지역으로, 행정 구역 상 파주시에 속하나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은 유엔군 사령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마을의 주민은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 받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군사분계선 북쪽에는 기정동(機井洞) 평화의 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마을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지이다. 자유의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한반도의 분단과 대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3] 위치 상의 특성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는다.

2012년 파주시에서는 자유의 마을을 안보 관광과 농촌 체험 마을로 조성하기로 계획하고, 2014년까지 총 25억원을 투입하여 마을에 작물 재배 체험장, 특산품 홍보 판매장, 마을 주변에는 안보 체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4]

역사[편집]

해방 이후 행정 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造山里)였다. 약 50세대 300여명의 주민이 농업을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교통이 불편하여 외부와의 접촉이 없는 시골 벽촌이었다.[5]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주민들이 후방으로 피난을 가면서 마을에는 16세대 60명의 노인과 아이들만 남게 되었으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자 피난을 떠났다 돌아오는 주민도 있었다.[6] 1951년 10월, 정전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면서 판문점 근처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군사분계선 상에서 유일하게 전투 지역에서 제외되었다.[7]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조인되고, 부칙에 따라서 당시 비무장지대 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게 되면서 같은 해 8월 3일 30세대 160명의 주민이 마을을 조성하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5][8][3] 1962년 11월 21일, 장단군 군내면에서 파주군 임진면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으며,[9] 1973년 1월 1일 임진면이 다시 군내면으로 변경되었다.[6]

1959년 유엔사가 그 해 크리스마스 전까지 낙후된 자유의 마을을 근대화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의 알선으로 미군이 기증한 발전기를 도입하고, 근대식 벽돌 문화 주택을 건설하였으며, 공회당 자유의 집과 동사무실. 의무실, 목욕탕 등의 공공 시설이 세워졌다.[10] 보건사회복지부와 미국 USOM이 무상으로 건설한 문화 주택의 경우, 부실 공사와 농가에 맞지 않는 설계를 이유로 주민 측이 입주를 거부하였는데, 검찰이 내사에 착수하여 공사 담당 회사의 보충 공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11]

남북간 체제 경쟁이 치열했던 1970년대 들어, 대한민국 정부는 특수 지역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자유의 마을의 생활 여건 개선과 표준 복지 농촌, 선전 마을 조성을 위해 대성동 종합 개발 사업을 실시하였다. 1차 종합 개발 사업은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주택과 도로, 공동 시설, 전기 가설, 경지 정리 등을 추진하였다.[12] 1980년부터 1981년까지는 2차 종합 개발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총 65억원을 투자하여 주택 개량과 시설 현대화, 학교 개축, 하천 정비, 상수도 설치, 경지 정리 등의 23개 사업을 추진하였다.[13][14]

지리[편집]

자유의 마을은 한반도 비무장지대 북위 37° 56′ 28.03″ 동경 126° 40′ 44.92″ / 북위 37.9411194° 동경 126.6791444° / 37.9411194; 126.6791444 (37.941118, 126.679144)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 구역상으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다. 자유의 다리로부터 북으로 약 12.5킬로미터, 개성특급시로부터 남으로 약 11.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마을 북동쪽 약 1킬로미터 지점에는 판문점이 위치하며, 서쪽에 위치한 군사분계선과는 4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군사분계선 건너편에 위치한 기정동 마을과의 직선 거리는 1.8킬로미터이다.[15][16]

경제[편집]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대한민국 정부와 유엔사의 지원으로 농업 환경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이로 인해 1962년의 벼 생산량은 1만 가마였으나 1993년에 들어서는 3만 8천 가마로 상승하였다.[7] 주요 농산물은 인삼, 으로,[17] 2010년 11월을 기준으로 전체 경작 면적은 4.83㎢이며, 전체 43농가 기준 농가당 11.23㏊를 경작하고 있다. 호당 평균 소득은 6,700만원으로 다른 민통선 북쪽의 마을에 비해 1.5배 가량 높은 편이다.[18]

경작권은 인정하나 미수복 지역이기 때문에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19][20] 따라서 토지의 매매가 불가능하며 경작권의 양도만 가능하다.[6]

시설[편집]

자유의 마을 내 유일한 교육 기관인 대성동 초등학교의 이정표. 들판 너머로 교회와 대형 국기 게양대가 보인다.

마을 입구의 현판은 1994년 6월 설치한 것이다.[21]

마을의 유일한 교육 기관인 대성동초등학교는 1954년 2월 1일 마을 자치로 운영되던 간이학교에서 시작하였으며, 1968년 대성동 국민학교로 3학급을 인가 받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2009년 9월 파주시 공동학구(學區)로 지정되면서 스쿨버스를 운행, 파주시 전역에서 입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졸업 후에는 경기도 내의 국립 학교 중 어디든 원하는 곳을 선택해 입학할 수 있다.[22]

마을에는 철탑으로 만들어진 99.8미터 높이의 대형 국기 게양대가 있으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는 가로 18미터, 세로 12m 크기이다.[23] 국기 게양대는 1980년 12월 18일 85미터로 설치하였으나,[23] 1981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보수 공사를 거치면서 99.8미터로 다시 설치하였고, 1982년 2월 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기정동 마을의 80미터 국기 게양대를 165미터로 다시 설치하였다.[7][24] 태극기는 바람으로 마모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2, 3달에 한번 정도 교체하는데, 교체 비용은 1년간 1000만원이 책정되며, 한번 교체시 140만원을 소요한다.[19]

마을 회관은 1983년 10월 건립하였으며, 노인정, 회의실, 여성회관, 식당, 관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5] 2009년 10월 21일에 회관 2층을 영화 상영관으로 리모델링하여 개관하였다.[25] 2012년 3월 19일에는 롯데시네마와의 협약을 통하여 기존의 상영관을 개봉 영화관으로 업그레이드하여 개관하였으며, 매월 2회 신작 영화를 무료 상영한다.[26][2]

1980년 12월 18일 파주시에서 방문객들을 위해 설치한 팔각정은 망원경 없이 북조선 전경을 볼 수 있는 2층 짜리 정자이다. 2010년에는 총격 등의 상황에 대비하여 2층 북측 방향 전면부 3개면에 방탄 유리를 설치하였다.[27]

특징[편집]

자유의 마을은 유엔군 사령부가 관리하는 비무장지대에 있기 때문에 정전협정의 부칙에 의거,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엔사의 관할 구역이다. 이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 민정(民政)중대가 상주하여 마을의 민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형법 및 행정권의 효력이 존재하나 대한민국이 법률적 통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유엔사의 동의가 필요하다.[7]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특성으로, 마을 주민은 참정권과 교육권을 가지고 있으나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 혜택을 누린다.[7] 또한, 마을에서 생활하는데 여러가지 제약이 있다. 매일 19시부터 20시까지 민정중대의 가구별 인원 점검이 있으며, 0시부터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 영농 활동 시간을 2~3일 전 미리 군에 보고하여야 하고,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영농 활동을 할 때는 군인이 동행하여야 한다.[28] 외부인의 마을 출입은 1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 출입이 가능하고, 언론인 또한 대성동 초등학교 졸업식 행사를 포함하여 1년에 3~4차례만 방문이 허용된다.[8]

주거와 주거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만 주민의 자격이 유지되나, 초등학교 이외의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기준에서 제외된다.[29][19] 외부인이 마을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남자는 아들이 없는 집의 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가 되는 경우, 여자는 마을 남자와 결혼할 경우 입주가 허락된다.[7] 남자 주민은 외부인과 결혼할 경우 계속해서 마을에 거주할 수 있지만, 여자 주민은 외부인과 결혼할 경우 계속 거주할 수 없다.[3]

똑같은 마을 이름을 가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2리 대성동 마을과는 자매 마을이다. 1989년 12월 10일 제주 대성동 마을이 감귤 풍작으로 감귤 1,500kɡ을 파주 대성동 마을로 보낸 것이 첫 인연으로, 다음 해 1월 25일 파주 대성동 마을 측에서도 보답 형식으로 설날 제수용 쌀 8㎏ 100부대를 보냈다.[30] 이후 1993년 5월 12일 자유의 마을 팔각정에서 각 마을 이장과 주민들이 참여한 결연식을 통해 자매 결연을 맺고, 두 마을 간 특산품 교류를 매년마다 진행하고 있다.[31]

사건[편집]

자유의 마을은 군사 분계선 접경 지역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종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인민군의 접촉이나 도발이 있었다. 1958년 7월 마을 주민 이영기가 월북하고,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마을 주민 이대성이 인민군 헌병 5명에게 살해되어 판문점 남방 130미터 지점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유엔사는 진상 조사 결과 인민군이 이대성을 유엔군이 살해한 것으로 조작하였으며, 이대성이 간첩 활동을 해오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 당하였다고 발표하였다.[7][32]

1975년 8월 26일에는 무장한 인민군 2명이 군사 분계선 남방 50미터 지점에서 영농 활동을 하던 마을 주민 김세연을 납치했다. 9월 3일 군사정전위원회 367차 본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김세연이 의거 월북하였다고 주장했고, 유엔사 측이 공동감시조 입회 하에 김세연을 납치 현장 부근에 데리고 나와 자유롭게 남북을 택하도록 하자고 제의했으나 북조선 측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33]

1997년 10월 17일 영농 지역에서 일하던 마을 주민 2명이 도토리를 줍다가 군사 분계선을 넘어가 북조선군에게 붙잡혔으나, 같은 달 22일 판문점을 통해 조기 송환되었다. 유엔사는 최초 상황과 목격자 진술 등의 당시 정황으로 북조선군의 납치로 단정하였으나, 현장 조사 결과 주민의 실수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임이 드러났다.[34]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각 지방 표정, 《문화일보》, 2000년 6월 13일, 2012년 2월 19일 확인
  2. 남경우. "최북단 대성동 마을에 영화관 생겼다", 《G뉴스플러스》, 2012년 3월 19일 작성. 2012년 11월 21일 확인.
  3. 자유의 마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년 1월 9일에 읽어봄.
  4. 우영식. "최북단 '대성동마을' 안보관광ㆍ농촌체험마을 된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21일 작성. 2012년 11월 21일 확인.
  5. 대성동 마을소개. 2012년 1월 19일에 확인.
  6. 전만길. "이색 마을을 가다 (11) 남북 분단의 산물 … 자유의 마을", 《동아일보》, 1973년 2월 17일 작성. 2012년 2월 9일 확인.
  7. 유영호. "대한민국의 별천지, <대성동 '자유의 마을'>", 《통일뉴스》, 2008년 1월 28일 작성. 2012년 1월 9일 확인.
  8. 우영식. "<6.25 60년 르포> DMZ '대성동 마을'의 소망", 《연합뉴스》, 2010년 6월 14일 작성. 2012년 1월 9일 확인.
  9. 법률 제1178호 수복지구와동인접지구의행정구역에관한임시조치법 (1962년 1월 21일 공포, 1963년 1월 1일 시행, 행정안전부)
  10. "망치 소리 요란한 자유의 마을 갈대만이 넘실대는 휴전선상의 대성동", 《동아일보》, 1959년 11월 13일 작성. 2012년 2월 9일 확인.
  11. "보충공사키로 말썽난 대성동주택",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 작성. 2012년 2월 9일 확인.
  12. (한국어) (1981-01-01). 대성동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2012-01-19에 확인. "정부에서는 1972년 5월, 특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주택과 도로, 공동 시설, 전기 가설, 경지 정리 등을 추진한 바 있습니다."
  13. "대성동 종합개발완공 국교신축 상수도등도 설치", 《동아일보》, 1980년 12월 18일 작성. 2012년 1월 19일 확인.
  14. (한국어) (1981-01-01). 대성동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2012-01-19에 확인. "81년 5월 말까지로 되있으며, 주택 개량과 학교 개축, 경지 정리 등 23개 사업으로서, 대성동을 표준 복지 농촌으로 건설하려는 사업인 것입니다."
  15. 그리운 산하 실향민촌 파주 대성동 마을. 전북 김제 황토마을. 2012년 1월 23일에 확인.
  16. 대성동 마을”.. 네이버. 2012년 1월 24일에 읽어봄.
  17. 한성희 (2006년 9월 10일). 르포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가다. 《민족화해》 (22). 2012년 1월 29일에 확인.
  18. 이상호. "‘DMZ마을’ 40년 만에 부촌으로 변모", 《경향신문》, 2011년 7월 20일 작성. 2012년 11월 21일 확인.
  19. 강영진. "기획 北 최남단 마을과 800m 두고 ‘이웃’", 《제주일보》, 2007년 10월 18일 작성. 2012년 1월 12일 확인.
  20. 문철. "대성동 「자유의 마을」 200여주민 논밭 소유권없이 경작하며 생활", 《동아일보》, 1997년 10월 18일 작성, 3면. 2012년 1월 13일 확인.
  21.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유통지도과 (2004년 11월 22일 작성). 〈04 추곡 대성동 방문 보도자료〉. (HWP). 2012년 11월 21일에 읽어봄.
  22. 대성동 초등학교 홈페이지. 2012년 1월 19일에 확인.
  23. (한국어) (1981-01-01). 대성동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2012-01-19에 확인. "이 날, 새로 세워진 85미터의 대형 국기 게양대에는 가로 18미터 세로 12미터나 되는 대형 태극기가 게양됐습니다."
  24. 김준회. "대성동 태극기와 기정동 인공기", 《오마이뉴스》, 2000년 7월 31일 작성. 2012년 1월 19일 확인.
  25. 김도윤. "최북단 DMZ 대성동마을에 영화관 생겼어요", 《연합뉴스》, 2009년 10월 21일 작성. 2012년 11월 21일 확인.
  26. 권숙희. "최북단 DMZ 대성동마을에 개봉 영화관 문 연다", 《연합뉴스》, 2012년 3월 17일 작성. 2012년 4월 25일 확인.
  27. 이유미. "최북단 DMZ 대성동마을 팔각정에 '방탄유리'", 《연합뉴스》, 2010년 11월 4일 작성. 2012년 1월 29일 확인.
  28. DMZ 특별취재팀. "<DMZ 속으로> 앞엔 北초병, 뒤엔 南초병… 주민들, 양측 사이서 농사 지어", 《조선일보》, 2010년 6월 25일 작성. 2012년 1월 29일 확인.
  29. 김정섭. "<분단의 상징 대성동마을 주민 남다른 기대>", 《연합뉴스》, 2000년 6월 13일 작성. 2012년 1월 12일 확인.
  30. "민통선 대성동마을주민 쌀선물로 회답", 《연합뉴스》, 1990년 1월 25일 작성. 2012년 2월 10일 확인.
  31. 정재환. "'대성동' 같은 마을 이름 인연 15년째 '끈끈한 유대'", 《뉴시스》, 2008년 12월 12일 작성. 2012년 2월 10일 확인.
  32. "중립지대 대성동민피살", 《경향신문》, 1958년 12월 16일 작성. 2012년 1월 19일 확인.
  33. ""납북농부 즉각 송환" 정전위 본회의, 유엔 측서 촉구", 《경향신문》, 1975년 9월 3일 작성. 2012년 1월 19일 확인.
  34. 김도형. "대성동 주민 조기송환 배경 납치상황 아닌 우발적 사건 반영", 《한겨레》, 1997년 10월 22일 작성. 2012년 1월 19일 확인.

좌표: 북위 37° 56′ 28″ 동경 126° 40′ 45″ / 북위 37.941118° 동경 126.679144° / 37.941118; 126.67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