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본 기독교의 역사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일본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나가사키에서 죽은 26명의 순교자 기념비

역사[편집]

기독교의 상륙[편집]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는 1549년이며, 예수회 선교사이자 바스크 출신의 에스파냐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들여왔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무슬림유대인이 없는 일본은 선교 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1548년에는 ‘야지로’라는 당시 35세의 청년 부시(무사)를 만나게 된다. 막부 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자국인의 외국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에 야지로는 국가에서 무역을 허락했다는 증서를 소유한 무역선인 슈인선(赤印船)을 타고 인도에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비에르와의 만남으로 기독교 신앙과 에스파냐 말에 능숙해진 야지로는 1549년 일본에 귀국하자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때 하비에르는 다이묘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전도하였으며, 세례성사를 집전하느라 팔이 아플 정도로 많은 신자를 얻게 된다.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에서는 다이묘의 영향으로 영지 내 주민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묘들이 기독교를 묵인한 진짜 이유는 기독교나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호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학식이 풍부한 예수회 선교사를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탄압 시기[편집]

나가사키에서 화형참형으로 순교기독교인들의 모습
기독교인미사를 드리는 모습.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때문에 불교의 예불로 위장한 미사를 드리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환영은 잠시 동안이었고, 바오로 미키를 위시한 26명의 순교자가 나가사키에서 발생하는 등 탄압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조선인 기리시단도 탄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경쟁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이 에스파냐포르투갈식민주의 세력이라고 선동했고, 시마바라 봉기(1638년)라고 불리는 기독교도들의 농민 반란이 벌어져 막부에게 기독교는 일본의 국가 체제에 전면 배치되는 위험한 체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장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전도에는 관심이 없는 네덜란드 이외의 유럽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은 사회 기강을 흐리므로 금한다.’라는 내용의 〈기리시단 금지령〉 발표[1](1612년), 청동으로 만든 예수성화를 밟게 하는 후미에 실시, 로마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모독 강요 등의 탄압을 받자, 불교 예불로 가장한 로마 가톨릭미사를 드리거나, 이불(異佛)이라고 불리는 불상을 가장한 성모 마리아성상을 사용하면서 몰래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수난사는 그 자신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신앙소설 《침묵》과 《여자의 일생》에 잘 언급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편집]

십자가를 숨긴 불상.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탄압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을 숨겨야만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들 가쿠레다 기리시단들은 1857년 강제 개항된 일본에 입국한 프랑스로마 가톨릭 신부 앞에서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 신자임을 밝혔으며, 탄압으로 소멸된 줄 알았던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세계 기독교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이 가쿠레다 기리시단이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신토 이외의 종교(불교, 기독교)를 금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천황 숭배에 반대하였고, 이성교제를 하는 등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주의자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대받고 배척받았다.[2]

기리시탄[편집]

기리시탄(일본어: 吉利支丹 (キリシタン), 切支丹, 포르투갈어: cristão(크리스탕)에서 유래)은 막부시대 일본의 크리스천 즉,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에스파냐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일본 메이지 정부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때까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현재도 일본 로마 가톨릭의 중심지인 나가사키 지역에 기독교 신자들이 집중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이묘들이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가사키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등의 성직자들이 배출될 정도로 일본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 기리시탄[편집]

기리시탄 가운데 조선 기리시탄도 있었는데,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압송된 조선인 중에서 예수회 선교사의 선교 활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전한 신덕(信德)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리 교육도 잘 받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순교자[편집]

  • 복자(福者) 고스마 다케야(コスマ竹屋)
  • 복자 안토니오(Antonio)
  • 복자 가이오(Caio) : 복자 가이오는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평신도 사목을 하였으며, 화형으로 순교했다.
  • 복자 권(權) 빈첸시오(Vincentio) :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수사였다.
  • 복자 가이오 지우에몬(カイオ次右衛門)
  • 복자 가스파르 바스(Caspar Vaz)

수도자[편집]

미디어[편집]

주석[편집]

  1. 《일본 개신교회사》/김수진 지음/홍성사. 일본 토시샤 대학교에서 일본 교회사를 공부한 김수진 목사는 도쿠가와 막부의 기라시단 금지령의 배경에 대해서 당시 기리시단들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를 반대하며, 국가의 권위를 반대하는 반체제적인 무리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2. 일본은 있다/서현섭 지음/고려원.

같이 보기[편집]

출처[편집]

  • '일본과 기리시단의 만남', 《일본 개신교회사》/김수정 지음/홍성사를 출처로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