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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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초상화

이지(李贄, 1527년~1602년)는 중국 명나라양명학 좌파에 속하는 사상가이다. 처음에 대지(戴贄)라 하고, 탁오(卓吾)라고 불렀다. 조선에는 이탁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다.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는 루머에 시달림당했다. 천주(泉州) 진강현(晋江縣-현재의 푸젠 성에 속함) 사람이다.

생애[편집]

그의 관직 생활은 허난 성·베이징·난징의 하급관리 및 남경 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쳐, 51세 때에 윈난 성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가 되었다가 54세에 그만둔 것이 전부이다.

회교도였던 그의 성격은 지극히 독존적인 인품으로 시비를 즐겨 도전적·전투적이었다. 더욱이 기행(奇行)을 좋아하고 반유교적(反儒敎的)·파괴적 언사를 써서 당시 모순 많은 명대 사회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의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왕양명과 왕용계를, 도를 얻은 진인(眞人)의 불사자(不死者)라고 존숭하였다. 그의 사상에 있어서의 〈동심설(童心說)〉, 역사 비판에 있어서의 선악·현부(賢否)의 상대화 등은 양명학의 발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교나 노장사상의 영향도 받은 것이다.

저서[편집]

《분서》(焚書)[편집]

이지의 저작으로 전 6권이며 《속분서》(續焚書) 5권이 부가되었다. 이 저서는 이탁오가 관직을 그만두고 허베이 성 황안현(黃安縣)의 경정향(耿定向)의 처소에서 기거하다가 사상적인 대립으로 절교한 후 마성현(麻城縣) 용호(龍湖)의 지선원(芝仙院)에 거주하고 있던 시절(59세 이후)의 십여 년 동안 써놓은 서간·수필·시 등을 수집한 문집이다. 이 저서 중에서 대표적 논문은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동심설(童心說)〉이다. 동심이 상실되는 것은 문견(聞見)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고 도리(道理)가 들어와서 안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특히 그 도리를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론에서 본다면, 음란을 가르치는 《서상기》라든가 도둑을 가르치는 《수호전》과 같은 속문학(俗文學)이 고금의 지문(至文)이며, 6경(六經)·《논어》·《맹자》는 도학자들의 구실로서 위선자를 만드는 본원이라고 한다. 이 외에 《분서》에는 “사람이 각각 생지(生知)를 소유하고 각인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卷一 答周西嚴), “의복을 입고 밥을 먹는 것. 이것이 인륜의 물리(物理)이다”(卷二 答鄧石陽)등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견해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장서》(藏書)[편집]

이지의 대표적 저작으로서 전68권, 《속장서》(續藏書) 27권이 부가되어 있다. 《분서》가 그의 문집으로 잡다한 것을 수집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전국 시대에서 원대(元代)까지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종합 역사서이다. 이것은 이탁오가 지선원에 체류하고 있었던 시절의 십수년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서두의 〈장서 세기열전 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에 보이는 것처럼 시비선악에는 정체(定體)가 없고 전부 상대적·병존적이라고 한다. 이 입장은 장자의 사상과 많이 비슷하다. 〈세기총론〉(世紀總論), 〈덕업유신론〉(德業儒臣論) 및 〈후론〉(後論), 기타 이 책 전반적인 논조는 무위(無爲)·무사(無私)에의 반론과 공리의 주장이라든가 전통적 가치관·규범의식에의 반발과 송유도통론(宋儒道通論)의 부정 등 종래의 사서(史書)인 《사기》, 《자치통감》,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있어서의 춘추학적(春秋學的) 발상을 무시하였다. 매우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견해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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