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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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

이와쿠라시세츠단(일본어: 岩倉使節団 (いわくらしせつだん)) 또는 암창사절단은 메이지 4년 11월 12일인 1871년 12월 23일에서 메이지 6년인 1873년 9월 13일까지, 일본 과도정부 사절단으로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러시아표트르 대제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하여 제안하였다고 알려졌다.[출처 필요] 메이지이신 전에 에도 막부에서도 1860년에 미국에 한 차례, 1862년과 1863년에 유럽에 사절단을 두 차례 보낸 바 있었다. 특명전권대사이와쿠라 토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시세츠단이라고 부른다.

일행[편집]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시세츠단

이와쿠라 도모미와 그 사람을 돕는 부특명전권대사 세 명이 동행하였다. 부특명전권대사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고 함께 데려간 유학생 60명은 미국유럽에서 유학하고 나서 귀국하여 일본을 지도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여정[편집]

그 사람들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간 여행하였다.

임무[편집]

그 사람들의 첫째 임무는 미국영국 그리고 유럽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는 일이었고 둘째 임무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구조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성공했다고 할 만하다.

사절단의 감회(感懷)[편집]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히 충격받았다. 미국의 근대국가다운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스러워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은부(殷富)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라고 적혀 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 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으므로, 이와쿠라는 귀국하고서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으로 관여했으며,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 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요 목적이 되었다.

덧붙여 이와쿠라는 여태까지 상투는 일본인의 혼이라고 생각하여 자르기를 거절해서 미국을 방문할 때도 일본식 상투를 하였지만, 미국에 유학한 자식인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되어 시카고에서 잘랐다.[출처 필요]

참고 문헌[편집]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1권: 미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쪽 번호 필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2권: 영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방광석, 소명출판, 2011년 12월[쪽 번호 필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3권: 유럽 대륙(상)』, 著 구메 구니타게, 譯 박삼헌, 소명출판, 2011년 12월[쪽 번호 필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4권: 유럽 대륙(중)』,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서민교, 소명출판, 2011년 12월[쪽 번호 필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5권: 유럽 대륙(하)』,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선태, 소명출판, 2011년 12월[쪽 번호 필요]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