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 유시민(柳時敏) | |
| 출생 | 1959년 7월 28일 (52세) |
|---|---|
| 거주지 | |
| 국적 | |
| 학력 | |
| 직업 |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
| 정당 | 통합진보당 |
| 배우자 | 한경혜 |
| 자녀 | 1남 1녀 |
| 부모 | 유태우, 서동필 |
| 친척 | 누나 유시춘, 여동생 유시주 |
| 웹사이트 | http://www.usimin.net |
유시민(柳時敏, 1959년 7월 28일 ~ , 경주시)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다. 1980년 5월 초 학생집회 당시 서울역 회군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독일 유학후 귀국, 언론인로서 활동했다.
2002년 문성근 등과 개혁국민정당의 창당을 주도하여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지원세력으로 키웠고, 2003년에는 노무현을 당수로 한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참여정부에서 2006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2010년 한명숙, 이해찬 등과 함께 국민참여당을 창당했으며, 2011년 12월에는 이정희와 심상정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작가 유시주는 그의 여동생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성장기
유시민은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동에서 당시 경주여고 역사교사로 재직중이던 아버지 유태우(柳台佑)와, 어머니 서동필(徐東畢)사이에서 태어났다. 6남매였는데, 누나는 사회운동가 유시춘이고, 여동생은 소설가 겸 작가 유시주다.
그의 아버지 유태우는 한때 만주 소학교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였고 미군정 시기 교장(交長)까지 역임하였다.[1], 큰아버지 유석우는 공무원으로 경주군 내남면 면장을 지내기도 했다.[2] 아버지 유태우가 만주 소학교의 교직원으로 근무한 일은 후에 의혹으로 제기되었는데 이를 두고 그는 “백부가 면장을 한 것은 맞지만 선친은 일제 때 교사를 하지 않았다. ”고 부인했다.[2] 그는 “처음 듣는 얘기라 집안 어르신들께 확인해본 결과 선친은 해방 직후 미 군정이 교사요원을 공채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 후 경주여중에 부임했다. ”며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 ”고 부인했고, “1943년경 만주 소학교에서 잠시 근무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소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고 덧붙였다.[2] 그는 후일 회고에서 '아버지가 청렴한 교사였다[1]'는 점을 자랑하였다.
대구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편집] 청년기
[편집] 학생운동가 시절
1980년 유시민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어졌고, 이는 5월 15일의 서울역 시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날 서울역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18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철수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이수성의 설득으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철수를 결정했으며, 심재철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은 대학총학생회장단 대표자격으로 교육부장관과 담판을 통해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약속받았고, 서울역 철수를 학생들에게 알렸다.[3] [4]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에 빗대어 소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불렀다. '서울역 회군' 이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렸다. 이 때 18개 대학총학생회장 중 신계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등은 철수를 반대했고 유시민도 '서울역 회군' 반대파에 섰다. 하지만 서울역 철수파인 심재철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의 의견이 '서울역 회군' 반대파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어 '회군'하게 되었다.
1980년대 서울대 총학생회 복학생협의회 간부로 활동했으며,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 고문(물고문, 각목고문, 폭행 등)했던 1985년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의 주모자로[5]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이 항소이유서를 계기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 항소이유서는 그의 저서인 《아침으로 가는 길》에 실렸다.
1991년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편집]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가로서의 활동
6.29 선언으로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던 당시 유시민은 수배 중의 몸으로 뽀글이 파마로 위장하고 방송사를 들락날락거렸다. 유시민은 '유지수'라는 가명으로 1988년 3월 7일부터 4월 11일까지 방송된 MBC 월화 미니시리즈 8부작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란 멜로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 유시민은 집필료에 대해 “회당 100만원 정도 받았으며 불법 유인물 만드는데 다 썼다.”고 밝혔다. 또한 1989년 3월 26일에 방송된 《MBC 베스트셀러극장》〈신용비어천가〉란 단막극의 각본도 썼다. 현길언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이 때는 가명이 아닌 유시민 본인 이름으로 방송됐다. 5공 신군부의 언론통제, 기자에 대한 협박, 회유 등을 다룬 것으로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의 텔레비전 드라마 데뷔작이기도 하다.[6]
[편집]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1997년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면서 '97대선 게임의 법칙'등을 저술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책에서 그는 "김대중은 직접 출마하기보다는 제3의 후보인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12월 6일자 <유시민의 세상읽기-김대중 대통령님께> 라는 《동아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7]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경향신문》, 《프레시안》 등에 시사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편집] 교육자로서의 활동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로서 활동했다. 대구 수성구에서 낙선한 이후에는 잠시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경북대학교에서 인문사회자율전공 개설 교양 과목이었던 '생활과 경제' 과목 강의를 맡았다.
[편집]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지지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편이고[8][9], 20~30대 젊은층에서 특히 지지율이 높다.[10]
[편집] 개혁당 시절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신당의 창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2002년 10월,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다수파와 함께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별개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방법, 노무현 후보 혼자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을 구상했다.[11] 뜻이 맞는 40여명이 각자 500만원씩 내놓았고 2억원으로 신당을 만들었다.[12]
2003년 4월 24일 보궐선거[13]에서 당선되어 16대 국회에 진입했다. 같은해 4월 29일 의원선서시 캐주얼 콤비에 라운드 티를 입고 등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선서했다. 또한 평소 자유주의적 소신을 바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기에 이를 굳이 강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2003년 11월 열린 우리당이 출범할 때 개혁당은 많은 개혁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린 우리당에 통합되었다.[14]
[편집] 열린우리당 시절
국회의원이 된 2003년 당시의 이슈는 단연 '이라크파병동의안'문제였다. 유시민은 파병 동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4년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5년 2차 연장 동의안 표결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의 반대표 행사는 비겁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대통령이) 욕먹을 때는 같이 먹고 비가 올 때는 같이 맞아야 되지 않겠나"라며 2차 연장 동의안 찬성표를 행사했다.[15] [16]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이 있었다.
유시민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의 압승이 확실해 지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원하는 유권자의 표가 이탈하여 진보정당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민주노동당 의원을 찍는 행위는 지역구 2곳을 제외하면 사표(死票)가 될 것이므로 정당표는 민노당에 주더라도 후보표는 열린 우리당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과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17] 유시민은 당시 독설로 유명했다.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말했고 17대 국회를 "폭력 국회", "박근혜 국회"라고 논평했다.[18]
유시민은 늘 노무현의 정책을 지지했고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에는 사실상 원맨쇼를 벌이며 옹호했으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19]
한나라당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 제안했을 때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서는 대연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의석을 정당 총득표율에 따라 할당하는 독일식 정당 명부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005년 8월 3일 '우리나라 정당정치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한 노회찬은 대연정 동기의 순수성은 이해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은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옳다며 국민투표 방식을 제안했다.[20]
유시민은 선거구제 개편을 시행하면 최종적으로 창조적 분열 뒤 5당 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역구도를 탈피하게 되면 이념에 차이가 있더라도 지역주의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정당이 해체되면서 왼쪽에 민주노동당, 그 다음에 개혁당, 맨 가운데에 열린우리당 중도우파 및 합리적 민주당파 및 일부 한나라당, 그 오른쪽에 한나라당 다수파 및 보수적 민주당, 맨 오른쪽엔 '5공당'의 순서로 정당이 개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하며 연정을 통한 독일식 선거구제로의 이행이 그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1]
2007년 2월 20일 열린 우리당의 분당 사태를 비판하면서 분당으로 인해 열린 우리당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망하고 분당으로 인해 10%였던 재집권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99%"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그는 열린 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부터 분당이 예견되었다고 말했는데 열린 우리당은 공화제적인 공천 구조를 추구했으나 이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기존의 보스에 의한 공천이 사라진 상태에서 공화제적인 공천을 원하는 세력과 자기들이 공천권을 갖기를 원하는 그렇지 않은 세력간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이어져 분당사태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22]이에 대해 범여권은 평화민주개혁세력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과정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비판했다.[23]
2007년 3월 13일 제이유그룹 사기사건 조사과정에서 서울 동부지검의 검사가 이재순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연루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의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한 내부 감찰결과 및 후속 대책을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 장관이 "앞으로 인권존중 수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영상 녹화제를 확대하겠다." 고 대책을 내놓자 유시민은 "이재순 전 사정 비서관이 무혐의로 결론 났는데, 실추된 그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되느냐. 요즘 시중에는 검찰 내부에 청와대 조지면 영웅 된다던 말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김 법무부 장관을 몰아 붙였다.[24]
2007년 5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한 이후, 일단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하되 향후 저술 활동도 하고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25] 7월 11일에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개조론'을 출간했고 8월 20일 열린우리당 임시전당대회 직후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공식 입후보(선언, 예비후보 등록은 21일)[26]했다. 지지율이 낮았던 유시민은 단일화 움직임에 따라 당내 경선에서 사퇴하고 이해찬 지지선언했다.
[편집]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2006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 대한 대한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 99년 7월부터 2000년 8월까지 13개월 동안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또한 소득을 축소 신고함으로써 건강보험료 수백만원을 덜 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국민연금 보험료를 일시적으로 미납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고 해명했다.[27]
[편집] 의료급여제도
복지부 재정에 대한 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부작용 때문에 의료급여제도 개편을 실시했다. "1년에 2287 차례 병원을 찾아 3560만원의 복지부 예산을 사용한 의료수급자가 발견되었다. 그의 일과는 병원과 약국을 돌아다니며 약을 타는 것이 전부였고 그의 형 역시 3280만원의 복지부 예산을 사용중이었다. 2003년 기준으로 의료급여 총지급액은 3조 2371억원이었고 이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의료수급권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근본 원인은 무료로 주어지는 혜택이라고 진단하고 의료급여 수급권자에게 본인 부담금을 부과했다. [28]
[편집] 국민연금법
국민연금법 개정 이전에는 현재 소득의 9%를 내고 60%를 받는 방식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물가상승율를 감안해도 낸 돈의 2배 이상을 받아가는 연금체계였다. 이 때문에 2036년에 연금 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2047년에 기금이 고갈되버린다는 예측이 나왔다. 연금체계의 붕괴에 대한 우려로 내는 것은 현재 소득의 9%를 그대로 내되 40%를 받는 형식으로 개정을 추진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연금 기금 고갈은 2060년으로 예측되었다. 이 시기 국민들과 정치권의 반발은 극심했으며 이를 돌파하기 위해 2007년 5월 21일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퇴했다. 이후 국민연금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29]
[편집] 대통합민주신당 시절
2007년 8월 18일 많은 열린우리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통합되었다. 유시민은 합당에 찬성하면서 "우리당의 꿈을 접어 가슴 속에 담고 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석수가 143개나 될 거대한 민주신당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커다란 종이와 같다. 우리가 뜻을 모아 우리당 꿈을 함께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30]
[편집] 2007년 대선
2007년 11월 25일 유시민 의원은 문국현, 정동영 단일화 문제와 관련해 "문 후보가 '정동영 후보의 사퇴에 관해 토론하자'고 했는데 정 후보는 공당의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라며 "후보 사퇴 주장은 경쟁자 사이에 예의도 아니고 공당 후보에게 할 말도 아니다. 정말 공당 경쟁에서 있을 수 없는 오만한 반응"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문 후보는 여당 후보인지 야당 후보인지 대선에서 자기의 위치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문 후보는 깨끗하고 훌륭한 기업인이나 정치적으로 검증이 안된 분"이라고 했다. 그는 "문 후보의 참여정부 실정 비판은 정치적 진실에서 이탈했다. 정당한 평가를 해야지 정치적 선동이 되면 안된다"며 이같이 비판했다. 그는 "참여정부 평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참여정부 지지자들이 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 될 수 있다"며 비판했다. 그간 정동영 후보에게 반감을 가진 일부 친노세력이 문국현 후보의 지지층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관측이 줄곧 제기된걸 의식했다는 의견도 있다.[31]
[편집]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2008년 1월 16일 이해찬 의원과 함께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다.[32] 이에 따라 이번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과 대구에서 대결하여 낙선했다. [33]
그는 이명박 정부가 법률을 통해서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34] 2009년 4월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전쟁포로라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35]4월 30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에 앞서,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졸렬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옛날에는 군인들이 정치를 했는데, 요즘은 검사들이 정치하는 것 같다"며 "피의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피의자로서 잘 대처를 하고 와야 한다"며 "이런 정치보복을 노 전 대통령이 잘 이겨내고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36] 전대통령 노무현 조문정국 당시,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을 방문해 유족과 측근들을 만난 뒤 병원을 빠져나가는 유시민의 표정은 영웅본색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37] 10월 19일 국민참여정당 창당 움직임과 관련해서 그는 "신당을 추진하는 분들이 요청하고 있는데 입당할 생각"이라고 입당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중심의 야권 통합 가능성에 대해 "민주당과 같은 당을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38]
[편집] 국민참여당 시절
2009년 11월 10일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에 입당했다. 2010년 5월 13일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하여 단일 후보가 된 후, 민주노동당 후보와 2차 단일화에 합의하며, 단일 후보가 되어 이변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39]
2010년 6월 2일, 제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야권 후보들과 단일화에 성공했으나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서 떨어졌다.[40] [41]
2010년 9월 15일, 유시민은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이 되었다. [42] 2011년 3월 19일, 제2대 국민참여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1년 4월 12일, 경남 김해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국민참여당 이봉수가 야권 단일화 후보가 되었다. 후보 선정 과정에서 민주당과 마찰이 있었는데, 민주당은 다른 지역에서는 주장하지 않던 '현장투표'를 추가하기를 원했고, 유시민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맞추면서, 동원능력이 원초적으로 떨어지는 작은 정당에게 불리한, 현장투표 대신에 '100% 여론조사 방식'을 주장했다. 노무현재단이사장인 문재인의 중재로 '100% 여론조사 방식'이 채택되었고 이봉수가 야권 단일화 후보가 되었다. 이후 유시민은 김해에서 이봉수 후보 지원 유세를 펼칠 뿐아니라, 다른 지역 야권 단일화 후보를 위해서도 지원 유세를 펼쳤다.[43] 그러나 2011년 4월 27일, 국민참여당은 경남 김해을 재보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 후보 이봉수를 내세워 첫 원내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번 선거는 국민참여당이 2012년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이루는데 교두보가 되는 선거였기에 유시민의 좌절감은 컸고 1위를 고수하던 야권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서도 민주당 손학규에 밀렸다. 하지만 이후 국민참여당 당원과 펀드 가입이 급증하면서 유시민은 당의 진로 모색에 다소 탄력을 받았다.[44]
[편집] 통합진보당 시절
유시민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국민참여당을 이끌고, 민주노동당과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하였다다. 창당과 함께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에 취임하였다. 2012년 1월 말 유시민은 통합진보당 내 특정 계파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한동안 당무를 거부했다.[45]
[편집] 약력
- 1983년 5월: 육군 전역(병장)
- 1984년: 도서출판 학민사 편집부장
-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회원
- 1991년 8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학사)
- 1994년 ~ 1996년: 한겨레 신문 독일통신원
- 1997년: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 경제학과 졸업(석사)
- 1998년 ~ 1999년: 한국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
- 1999년 ~ 2000년: <동아일보> 등에 시사칼럼 연재
- 1999년 ~ 2001년: 성공회 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국제민주연대 기관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위원장
- 2000년 ~ 2001년: MBC 100분토론 진행
- 2002년: <경향신문> <프레시안> 등에 시사칼럼 연재
- 2002년 11월: 개혁국민정당 대표집행위원
- 2003년 1월: 개혁국민정당 고양시 덕양구갑 지구당위원장
- 2003월 4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갑 국회의원
- 2006년 2월 ~ 2007년 5월: 보건복지부장관
- 2010년 9월: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 2011년 3월 ~ 2011년 12월: 국민참여당 대표
-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편집] 비판 및 논란
- 정치 행보에 대한 비판
중요한 순간에 줄타기 정치로 자주 입장 바꾼다는 비판이 있다.[46] 시민단체 참여민주주의의와 생활정치연대(참정연)은 유시민의 '말바꾸기' 사례들어 풍자하면서 "싸가지가 없어 싫은게 아니라 뻔뻔함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47]
- 민노당에 대한 입장변화
유시민은 2005년 5월 3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민노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민주노동당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서 차라리 한나라당과 합의하는 게 낫다는 지적이 많다"고 발언, 민주노동당을 발끈케 했다. 이같은 유 의원 발언에 대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유 의원은 정치적 비용을 잘못 계산했다"며 "한나라당과의 타협의 비용을 개혁 후퇴에 따른 손실로 계산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맞받아 비판했다.[48] 하지만 2011년 12월 유시민이 대표로 있는 국민참여당은 민주노동당과 합당했다.
- 한나라당에 대한 입장변화
2003년 4월 4일 민주당과 재보선 연합공천을 번복, 수용하면서 유시민은 "한나라당, 조선일보가 반대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있는 일이다"라고 발언했으나, 2005년 9월 1일 노 대통령의 한나라당과 대연정 주장을 옹호하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과 대연정은 선진화 정치를 위한, 87년 정치 청산의 ‘필요조건’이며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고 번복했다.[49]
- 이라크 파병에 대한 입장변화
2003년 3월 18일 유시민은 개혁당원들과 함께 파병반대운동을 펼치면서 "우리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으로 하여금 우리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에 파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도록 확실한 명분을 쥐어주어야 합니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입니다. 우리 국민들 가운데 인간방패를 자임하며 이라크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미군이 영변 핵 시설과 평양을 폭격한다면, 저도 인간방패가 되어 북으로 갈 작정입니다. 여기 고양시에 앉아서 죽으나 영변에서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 아니겠습니까. 저마다 가슴속에 작은 소망의 촛불을 켭시다. 그 불빛을 모아 반전평화의 길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을 만듭시다" 고 파병반대했다.
그러나 2004년 6월 22일 "사람 하나(김선일씨) 죽었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6월 23일 "우리가 파병철회하는 건 페스트고, 비난을 감수하고 파병을 강행하는 건 콜레라다. 일단 무조건 페스트는 피하고, 콜레라는 ‘가볍게’ 앓는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 해야 한다."며 참여정부의 이라크 파병을 옹호했다.[50]
- 개혁당에 대한 입장 변화
2002년 9월 17일 개혁당 창당 당시 "어느 당처럼 새천년이라 해놓고 2년도 안갈 정당 안 만든다. 적어도 100년 갈 정당(개혁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나, 개혁당 창당 1년도 채 안돼 유시민은‘개혁당 해산’ 후 우리당 개별입당 단행했다[51]
- 사표론 논란
유시민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 지역구 후보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 즉 죽은표가 된다"라는 글을 올렸다. 민노당 당원은 유시민의 사표론에 반발했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은 "유시민 의원의 발언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실제 그런 논리가 있더라도 대선때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로 반박했다.[52]
- 조개론 논란
2002년 대선당시 유시민이 집행위원으로 있던 개혁당 당원들이 MT를 간 자리에서 50대 남성당원이 2~30대 여성당원 3명에게 성폭행을 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개혁당 내에서는 성폭행특위가 구성돼 사건 경위서와 처벌제안서가 작성되었으며 개혁적인 정당에 맞는 공개적인 사건해결을 바라는 여성당원들의 요구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청문회를 앞두고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유시민은 2002년 대선 당시 발생한 개혁당 내 성폭행 사건 해결 요구에 대해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발언으로 이를 묵살했다”며 "당시 유 내정자 발언에 분노한 당원들이 탈당했지만 유시민은 아직까지 선정적으로 여성을 표현한 발언에 대해 아무런 사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당시 2003년 6월 10일 여성주의 사이버저널 ‘일다’는 유시민의 성평등적 관점이 부족한 인물들을 선정하는 ‘블랙리스트’ 명단으로 게재했다.[53]
- FTA 입장 변화에 대한 비판
한나라당은 2011년 7월 6일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한미 FTA와 관련, 180도로 말을 바꿨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2007년 3월 방미 당시 유시민은 "한미FTA는 체결했으면 한다. 정부 각료로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뿐 아니라 경제학자로서 내 소신이다"이라고 한미FTA에 대한 적극적인 찬성 의사를 밝혔으나 2011년 7월 5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방문하면서 "제가 대통령이었다면 한미FTA 하자는 말은 안했을 것이며, 정책적 선택에 대해 미안하고 죄송하다"라고 입장을 바꿨다.[54]
- 청년실업 관련 발언
D여대생 고모양이 “청년실업 문제에 대 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유시민은은 "취업에 관한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겁니다."라고 발언했다.[55] 각 포탈사이트에는 유 의원의 발언을 비판하는 댓글이 쇄도했다. 한나라당도 18일 <유시민 의원 실업자 폄하 발언 사과하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 그 파장을 더욱 크게 했다.[56]
- 서울대 프락치 사건 관련 비판
1984년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간부이자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의장이었던 유시민 등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은 민간인 4명을 ‘프락치’로 의심하여 체포하고 감금ㆍ폭행했다. 유시민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 당시 고문 피해자인 전기동 등은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청문회가 진행될 즈음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폭행과 고문으로 정신이상에 빠지는 등 고통을 겪고 있다”며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유 내정자는 장관으로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전기동은“당시 사건은 프락치 사건이 아닌 명백한 감금고문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제가 조사받을 때 유시민 내정자가 있었다”고 증언했다.[57]
한편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1부의 심리로 6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유시민이 '서울대 민간인 오인 감금.폭행 사건'과 관련, "피고인이 선거홍보물에 '다른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을 한 사건'이라고 기재한 부분에 대해 피고인은 '착오였다'고 주장하지만, 피고인이 당시 사건에 대한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사실을 관련 당사자나 민주화운동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확인하지 않고 기재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58]; 국회 기자회견 사건 ==== 2006년 2월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자, 고문 피해자의 한사람인 전기동은 다시 언론에 고문 사실을 폭로하며 항의했다. 프락치 사건 당시 고문 피해자인 전기동(51) 등은 2006년 2월 7일 국회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폭행과 고문으로 정신이상에 빠지는 등,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유 내정자는 장관으로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59]
전기동은 공개 회견에서 당시 사건은 프락치사건이 아닌 명백한 감금고문사건이었다면서, 자신이 조사받을 때 유시민 내정자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기동은 이와함께 당시 사건 재판 당시 유 내정자가 자신을 풀어주는데 관여했다는 진술은 거짓말이었다며 그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59] 프락치 사건 당시 폭행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정용범(47)의 어머니 정영재(76)도 함께 기자회견에 참여하였다. 정영재는 아들이 정신이상에 빠졌는데도 유시민 내정자는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며, 유시민 내정자의 장관 임명에 강력반발했다.[59] 1984년 당시 고문을 당한 이들이 실제로 정부기관의 프락치였다는 확실한 물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로 국무위원 국회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중 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피해자들이 ‘장관임명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피해사실을 호소했다.[60] 프락치 사건 당시 고문 피해자인 전기동 등은 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폭행과 고문으로 정신이상에 빠지는 등 고통을 겪고 있다”며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유 내정자는 장관으로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과 함께 몇몇 우익 단체 사람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함께 시위에 동조했다.
전기동은 "당시 사건은 프락치 사건이 아닌 명백한 감금고문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제가 조사받을 때 유시민 내정자가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에서 전기동은 자신이 실신했을 때 유시민이 구급차를 불러주었다는 말 조차 거짓이라고 강하게 반박하였다.[60] 당시 사건 재판 당시 유 내정자가 자신을 풀어주는데 관여했다는 진술은 거짓말이었다”며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기동은 이어 “구급차를 유 내정자가 불렀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덧붙였다.[60] 기자 회견 직후 이들은 유시민을 규탄하였으나,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인준은 무리없이 통과되었다.
- 명예 훼손 논란
2005년 4월 그에게 프락치로 몰려 고문당한 고문 피해자 전기동 등이 그를 고소했다. 그는 지난 84년 당시 방송통신대 학생이던 전기동씨(50)를 비롯한 4명의 시민을 정보기관의 프락치로 오인해 교내에서 폭행한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85년 2심에서 징역 1년이 확정돼 복역한 바 있다. 검찰의 기소는 4.15총선 직전인 지난해 4월12일 전기동씨가 유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 고소한 데 따른 것이다.[61] 이전에도 전기동을 비롯한 고문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그가 무고로 고문했다는 이유로 수시로 의혹을 제기한 바 있었다. 2005년 3월의 판결에서 무죄, 조작 의혹이 당시 경찰관의 한사람인 김영복으로부터 제기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은 다시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전씨는 “이 사건에 연루된 유 의원이 무고한 시민을 폭행해 처벌을 받고도 민주화투사로 홍보해 사건 피해자인 나의 명예가 훼손당했고 선거법에도 위반돼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라며 “민형사 소송에서 승소해 내가 프락치가 아닌 것이 입증됐는데도 유 의원이 저서와 홈페이지를 통해 이 사건을 포악한 권력에 저항한 행위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61]
- 16대, 17대 선거법 위반혐의 논란
16대 총선 때 사전선거기간 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홍보를 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었다. 2006년 그는 곽치영 민주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해 열린 4.24 재선거에서 개혁국민정당 후보로 출마하며, 공식 선거운동기간(4월8일~23일) 전인 3월 29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덕양 갑 전황보고'라는 제목으로 "지금 (한나라당) 이국헌 후보가 10% 넘게 앞서고 있다"며 "선거지역에 살고 있는 친지들을 찾아내 전화를 걸고 직접 방문, 저를 도와달라"는 등 지지를 호소했다.[62]
16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법원 1부(윤재식 대법관)는 25일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은 선거운동 기간 전에 지지율을 공개하며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했는데, 이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 개진 및 의사표시,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관한 단순지지 또는 반대의견 개진 범위를 명백히 벗어난 것으로 당선을 위한 적극적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밝혔다.[62] 대법원은 또한 "지난 3월 개정된 선거법은 선거운동기간에 관계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개정법 전 행위에 대해서는 벌칙에 대해 개정 전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62]
또, 17대 총선거 이후에도 선거법 위반으로 다시 피소되었다. 2007년 4월 17대 총선 당시 소형책자 홍보물에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대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됐다"는 허위사실을 기재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61] 검찰은 그보다 전인 2006년 10월 그를 기소하면서 기소 사유로 "유 의원을 포함해 당시 사건 가담자 모두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적이 없어 기소했다[61]"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였던 그의 대학 후배인 이모씨가 변호를 섰는데 이때 이 변호사는 "유시민 선배는 직접 폭행에 가담하지 않고 주 가담자들이 도피해 있는 동안 사후처리에 주력했던 것으로 안다"며 "유 선배는 당시 피해자인 전모씨를 병원으로 후송하고, 책임을 가려야 한다는 등 수습책을 마련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61] 또 "당시 유 선배가 같이 기소된 것을 보고 의아해 했었다"며 "학생회 주요 간부들이 도망가 있는 상황에서 유 선배를 희생양으로 엮으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었다.[61]"며 "당시 전씨에 대한 폭행.감금.고문은 모두 사실로 당시 1년6개월간 복역하며 뼈아픈 반성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특히 "당시 전씨가 방송통신대학 법학과 4학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 법조인의 꿈이 무참히 좌절되고, 가해자는 변호사, 대학교수, 국회의원이 되는 등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이 자신과 대비되는 모습을 봤을 때 전씨의 원한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유 선배도 과중한 책임을 졌고,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전씨도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61]"고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법 위반혐위에 대해 항소했다.[63] 16대 총선거 선거법 위반혐의는 대법원에서 인정되었다.[62] 그러나 17대 총선거 당시 선거법 위반혐의는 무죄판결되었다. 서울고법 형사10부(이동흡 부장판사)는 21일 17대 총선 당시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선거법 위반)로 1심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64] 당시 서울고법 재판부는 “피고인이 인쇄물에 게재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됐다’는 내용은 허위사실에 해당하지만 피고인이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고법 재판부는 유 의원이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에 ‘전두환 정권이 조작으로 엮어 넣었다’고 적시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 표명에 불과하거나 전체적인 내용이 허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대로 무죄로 판단했다.[64]
[편집]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제16대 국회의원 재선거 | 국회의원(고양시 덕양구 갑) | 16대 | 개혁국민정당 | 14,833표 | 1위 | ||
| 제17대 총선 | 국회의원(고양시 덕양구 갑) | 17대 | 열린우리당 | 40,288표 | 1위 | ||
| 제18대 총선 |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을) | 18대 | 무소속 | 23,005표 | 2위 | 낙선 | |
| 제5회 지방 선거 | 경기도지사 | 33대(민선 5기) | 국민참여당 | 2,079,892표 | 2위 | 낙선 |
[편집] 저서
[편집] 저서와 작품
|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
- 《아침으로 가는 길》, 유시민, 학민사, 1986.
- 《광주민중항쟁》, 유시민 외 공저 , 돌베개, 1990. ISBN 897199009003910401
- 《97 대선 게임의 법칙》, 유시민, 돌베개, 1997. ISBN 8971990988
- 《유시민과 함께 읽는 문화이야기 시리즈》 유시민, 푸른나무, 1998~2002 ISBN 8974145014 (편역)
- 《Why Not?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 읽기) 》, 유시민, 개마고원, 2000. ISBN 9788985548526
-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돌베개, 2002. ISBN 8971991364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개마고원, 2002. ISBN 8985548859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2004(개정판). ISBN 9788974140472 .
- 《Memories of May 1980》, 유시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2004(개정판). ISBN 8974140365
-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유시민, 푸른나무, 2005(개정판). ISBN 9788974140465
-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돌베개, 2007. ISBN 9788971992784
-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돌베개, 2009. ISBN 9788971993309
- 《청춘의 독서》,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 ISBN 9788901101569
-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돌베게, 2011. ISBN 8971994274
[편집] 텔레비전 드라마
-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 MBC, 1988년 3월 7일 ~ 1988년 4월 11일, 필명 '유지수'
- 《MBC 베스트셀러극장》〈신용비어천가〉, 1989년 3월 26일[65]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가 나 유시민, 부친 친일 의혹만은 끝내 은폐
- ↑ 가 나 다 유시민의원 “부친 일제때 만주 소학교 근무” 서울신문 2004년 09월 09일자
- ↑ [1]
- ↑ [2].신동아.2000년9월1일.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9&aid=0000005951
- ↑ 조종현. “유시민 멜로드라마 작가 이력 ‘화제’…문성근‧조용원 출연”, 《NEWSFACE》, 2012년 1월 27일 작성.
- ↑ 유시민은 ‘포스트 DJ’가 될 수 있을까
- ↑ 류정민 기자. “‘흥행보증’ 유시민 등장, 한나라당 비상”, 《미디어오늘》, 2010년 5월 13일 작성. 2010년 5월 14일 확인.
- ↑ 정권심판 기본구도 속 ‘차세대 희망찾기’도 강해내일신문
- ↑ 박상희 기자. “김문수-유시민, 야권 단일화 후 지지율 불과 8%차이”, 《민중의소리》, 2010년 5월 13일 작성. 2010년 5월 15일 확인.
- ↑ "이것이 진짜 개혁신당" 2002.09.12 한겨레21
- ↑ 허무느냐, 후퇴하느냐… 2003.05.15 한겨레21
- ↑ 곽치영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인한 재선거
- ↑ 열린우리당- 죽느냐, 차별화하느냐 2004.01.29 한겨레21
- ↑ 유시민 "내 파병안 반대투표, 비겁했다" 오마이뉴스 2005.11.15
- ↑ 유시민 "대통령과 같이 욕먹고 비맞는다"-반대투표할 땐 언제고 파병연장엔 동의(?) 브레이크뉴스
- ↑ <유시민 `민노당 死票론" 논란>(종합) 연합뉴스 2004.04.13
- ↑ 여야 의원 ‘입심’ 먹이사슬 2005-03-05 서울신문
- ↑ 노무현은 유시민의 운명이다 2006.01.17 한겨레21
- ↑ 연정? 노회찬 "결혼이다" - 유시민 "데이트다" 오마이뉴스 2005.08.04
- ↑ 유시민, “창조적 분열뒤 5당체제로 가자”한겨레 2005.09.22
- ↑ 유시민 장관 "한나라당 집권가능성 99%" 연합뉴스 2007.02.20
- ↑ 유시민 “한나라 차기 집권 가능성 99%”…與 발칵
- ↑ 노대통령, 검찰 과잉수사 질책 한겨레, 2007.03.14
- ↑ 할일은 하되,저술활동 계속하겠다. 《오마이뉴스》2007.5.22
- ↑ (보도자료) 유시민 의원, 대선예비후보 등록, 《유시민 공식홈페이지》, 2007년 8월 21일 작성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0138286 유시민의 습관성 연체… 미납… 해명…
- ↑ 유시민 장관 '공개 반성문' 썼다 "허술한 의료급여, 복지부가 잘못했습니다."
- ↑ 개정 1년만에 왜 또 '국민연금' 고치나
- ↑ 우리당 사수파 반발 속 민주신당과 합당 결의
- ↑ 유시민 "盧지지자가 文지지하면 자기부정"
- ↑ 유시민 "유연한 진보노선의 '좋은정당' 필요" 오마이뉴스 2008.01.16
- ↑ 유시민, '고담대구'의 '배트맨' 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2008.04.12
- ↑ 유시민 “어떻게 보면 4·19와 비슷한 상황”
- ↑ 유시민 “적장에 이렇게까지 모욕줘선 안된다“
- ↑ 유시민 "졸렬한 정치보복, MB는 어리석은 대통령"
- ↑ 유시민'영웅본색'
- ↑ 유시민 "친노신당 입당할 것"
- ↑ “유시민 단일화, "민주당이 어뢰 맞았다"”, 《조선일보》, 2010년 5월 13일 작성. 2010년 5월 14일 확인.
- ↑ ‘노무현 부활’
- ↑ 김태영 기자. “유시민 단일화 파장 주목”, 《mbn》, 2010년 5월 14일 작성. 2010년 5월 15일 확인.
- ↑ 박상희 기자. “여의도로 복귀한 유시민 "진보적 자유주의론으로 정책 주도”, 《민중의소리》, 2010년 9월 15일 작성. 2010년 9월 24일 확인.
- ↑ 조은정."유시민 또 웃었다"…민주당 위기감 고조.노컷뉴스.2011년4월12일.
- ↑ 석진환.‘희망’ 확인한 유시민…재보선뒤 당원·펀드가입 급증.한겨레.2011년5월2일.
-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2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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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시민 의원-민노당, '사표론' 공방SBS 2004년 4월 13일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9&aid=0000005906 유시민 치명적 도덕적 약점에 '나어떡해'
- ↑ 與 "유시민, FTA 말바꾸기가 盧 계승인가"아시아경제 2011년 7월 6일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107233 <현장에서>또…유시민 `부주의한 입`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0122375
- ↑ 서울대 프락치 사건 피해자 유시민 장관 임명에 강력반발데일리안 2006년 2월 7일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7555 유시민 의원, 17대 선거법 위반 벌금 50만원
- ↑ 가 나 다 프락치 사건 피해자 유시민 내정자 임명 반발 기자회견 노컷뉴스 2006년 02월 07일자
- ↑ 가 나 다 <4보 유시민 인사청문회>서울대 프락치 사건 피해자 유시민 장관 임명에 강력반발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유시민, 17대 선거법 위반 재판 속개, 3월말 선고 전망 프레시안 2005년 02월 28일자
- ↑ 가 나 다 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41125144041§ion=01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4&aid=0000207408
- ↑ 가 나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6/h2005062118514422000.htm
- ↑ 이종원. “유시민장관 드라마 썼었다”, 《경향신문》, 2006년 8월 24일 작성.
[편집] 바깥 고리
- 류시민 - 대한민국헌정회
- (한국어) 유시민 블로그, '헌법 제1조'
- (한국어) '유시민의 생활과 경제'
- (한국어) 시민광장-유시민을 믿고 지지하는 참여시민 네트워크, 공식팬클럽/정치웹진
- (한국어) 국회의원 재직당시 홈페이지, '인터넷진지'
- 인터넷 방송 유시민·노회찬의 저공비행
| 전임 이재정 |
제2대 국민참여당 대표 2011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4일 |
후임 (통합진보당에 합당) |
| 전임 (초대) |
제1대 통합진보당 공동상임대표 2011년 12월 5일 ~ 현재 |
후임 현직 |
| 전 임 김근태 |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2월 10일 - 2007년 5월 22일 |
후 임 변재진 |
| 전 임 (덕양구)이국헌 |
제16대 국회의원(고양시 덕양구 갑)(재선거) 2003년 4월 25일 - 2004년 5월 29일 개혁국민정당→열린우리당 (덕양구 을)이근진 |
후 임 (덕양구 갑)유시민 (덕양구 을)최성 |
| 전 임 (덕양구 갑)유시민 (덕양구 을)이근진 |
제17대 국회의원(고양시 덕양구 갑)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무소속 (덕양구 을)최성 |
후 임 (덕양구 갑)손범규 (덕양구 을)김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