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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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劉基, 1311년 ~ 1375년)는 중국 명나라의 군사(참모), 정치가, 시인이다. 자는 백온(伯溫).시호는 문성(文成). 저장성(浙江省) 온주(溫州) 문성현(文成縣) 남전(南田) 출신이다. 그의 출신지 문성이 후에 청전(青田)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유청전(劉靑田)으로 칭해진다.

주원장의 부하가 되어 명나라를 건국 할 즈음해 큰 공적을 올려 그 후의 명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을 하였다. 또, 송렴(宋濂)과 함께 당대 제일의 문필가로서도 알려져 그 저서로서 욱리자(郁離子) 10권, 복부집(覆瓿集) 24권, 사청집(寫情集) 4권, 이미공집(犁眉公集) 5권을 남겼다(이미공집 5권은 유기 사후, 그의 장남이 아버지의 남긴 초고를 집성 하여, 명명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제갈량과 같이 천재 군사로서 숭배를 받고 있다. 명나라 초기를 무대로 하는 소설, 희곡등에 등장하는 것이 많다. 소설이나 희곡에서는 그의 자인 유백온(劉伯溫)으로 불리므로, 역사상의 인물인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있다.

생애[편집]

원나라 말기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원나라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었지만, 상관과 마찰으로 관직에 물러나고 고향에 은둔 생활한다. 남경을 함락 시켜 오국공이 된 주원장은 그 지방의 지식인들을 스스로 초빙하였다. 유기는 주원장의 초빙에 응하였고, 이후 유기는 주원장의 참모로서 활약한다.

참모로서의 유기는 홍건적의 명목적인 수령인 한림아에 대해서, "목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모시면 어떻게 되었다"라고 말하거나 주원장이 호남의 진우량을 제외하고, 소주의 장사성을 토벌하려고 했을 때에 충고하고, 먼저 진우량을 토벌해야 할 진언하였다.

이러한 진언에 대해서 주원장도 유기를 크게 신뢰하여 "우리의 장자방" 이라고 불렸다.

유기는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 태사령과 어사중승이 되어, 주로 조정의 안정에 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선장, 호유용등의 다른 신하로부터 미움을 사고, 주원장에게 말하여 유기가 중상 모략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기는 공정하게 계속하여 이선장이 죄를 추궁받았을 때에 이선장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그 후도 다른 신하들의 중상 모략은 그치지 않고, 관리 생활을 끝내고 고향에서 은퇴했다. 의심이 많던 주원장도 유기에 대한 중상 모략에는 "저자가 천하를 취해서 대신하는 마음이 있다면, 건국 이전에 그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라고 하여 무시하였지만, 그리고도 중상 모략이 계속 되었다. 이 때문에 유기는 주원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남경에 머물었다. 거기에서 병에 걸리고, 사망하였다.

유기가 사망한 후에, 호유용이 유기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하여, 이 일로 계기로서 호유용의 음모로 불리는 대숙청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