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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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정필

웅정필(熊廷弼, 1569년1625년)은 명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자는 비백(飛百), 호는 지강(芝岡), 시호는 양민공(襄愍公)이다. 무창부 강하현(江夏縣)[1] 출신이다.

요동 방어선에서 후금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나, 후에 간신 위충현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생애[편집]

1597년 향시에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1598년 만력 26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직례 보정 추관으로 제수를 받았으며, 1608년 만력 36년에 요동의 감찰어사가 되었다. 명사에서는 병법에 밝고, 좌우로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해진다.[2]

1619년 명 신종 47년 3월, 명나라가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후 명나라 조정은 양호를 파면하고, 웅정필을 하남도 감찰어사 및 대리사승으로 임명하여 요동을 지키게 했다. 그는 사르후 전투에서 도망친 유우절 등 3명을 처형하고 기강을 바로 세웠다.[3]

명나라 조정이 동림당(東林黨)과 엄당(閹黨)으로 나뉘고 웅정필은 면직되었다. 1621년 1월 광녕을 공격해 오자 명나라는 웅정필을 다시 임명하여 싸움에 임하게 하였다. 왕화정을 독려하여 전쟁에 나서게 하였지만, 부하 장수 손득공(孫得功)의 배신으로 광녕을 잃고 말았다. 웅정필은 광녕을 잃은 책임을 지고 벌을 받게 되었으며, 1625년에 사형을 당하였다.[4]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현재의 후베이성 무창 시 장샤 구
  2. 《明史》(卷259):“熊廷弼,字飛百,江夏人。萬曆二十五年舉鄉試第一。明年成進士,授保定推官,擢禦史。三十六年,巡按遼東。巡撫趙楫與總兵官李成梁棄寬奠新疆八百里,徙編民六萬家於內地。已,論功受賞,給事中宋一韓論之。下廷弼覆勘,具得棄地驅民狀,劾兩人罪,及先任按臣何爾健、康丕揚黨庇。疏竟不下。時有詔興屯,廷弼言遼多曠土,歲於額軍八萬中以三分屯種,可得粟百三十萬石。帝優詔褒美,命推行于諸邊。邊將好搗巢,輒生釁端。廷弼言防邊以守為上,繕垣建堡,有十五利,奏行之。歲大旱,廷弼行部金州,禱城隍神,約七日雨,不雨毀其廟。及至廣寧,逾三日,大書白牌,封劍,使使往斬之。未至,風雷大作,雨如注,遼人以為神。在遼數年,杜饋遺,核軍實,按劾將吏,不事姑息,風紀大振。”
  3. 명사》(259권):“四十七年,楊鎬既喪師,廷議以廷弼熟邊事,起大理寺丞兼河南道禦史,宣慰遼東。旋擢兵部右侍郎兼右僉都禦史,代鎬經略。未出京,開原失,廷弼上言:「遼左,京師肩背;河東,遼鎮腹心;開原又河東根本。欲保遼東則開原必不可棄。敵未破開原時,北關、朝鮮猶足為腹背患。今已破開原,北關不敢不服,遣一介使,朝鮮不敢不從。既無腹背憂,必合東西之勢以交攻,然則遼、沈何可守也?乞速遣將士,備芻糧,修器械,毋窘臣用,毋緩臣期,毋中格以沮臣氣,毋旁撓以掣臣肘,毋獨遺臣以艱危,以致誤臣、誤遼,兼誤國也。」疏入,悉報允,且賜尚方劍重其權。甫出關,鐵嶺複失,瀋陽及諸城堡軍民一時盡竄,遼陽洶洶。廷弼兼程進,遇逃者,諭令歸。斬逃將劉遇節、王捷、王文鼎,以祭死節士。誅貪將陳倫,劾罷總兵官李如楨,以李懷信代。督軍士造戰車,治火器,浚濠繕城,為守禦計。令嚴法行,數月守備大固。乃上方略,請集兵十八萬,分佈靉陽、清河、撫順、柴河、三岔兒、鎮江諸要口,首尾相應,小警自為堵禦,大敵互為應援。更挑精悍者為遊徼,乘間掠零騎,擾耕牧,更番迭出,使敵疲於奔命,然後相機進剿。疏入,帝從之。廷弼之初抵遼也,令僉事韓原善往撫瀋陽,憚不肯行。繼命僉事閻鳴泰,至虎皮驛慟哭而返。廷弼乃躬自巡曆,自虎皮驛抵瀋陽,複乘雪夜赴撫順。總兵賀世賢以近敵沮之,廷弼曰:「冰雪滿地,敵不料我來。」鼓吹入。時兵燹後,數百里無人跡,廷弼祭諸死事者而哭之。遂耀兵奉集,相度形勢而還,所至招流移,繕守具,分置士馬,由是人心複固。”
  4. 『광해군일기』 14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