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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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순(禹德淳) 또는 우연준(禹連俊, 1876년 ~ 1950년 9월 26일)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안중근의 의거 동지로 알려졌다. 안중근을 따라 의병 활동을 하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계획, 안중근의 거사 성공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후에는 한국인 동포들의 귀국을 돕다가 귀국,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호는 단운(檀雲). 한성부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초기에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단체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건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출국을 결심하였다.

1905년 겨울 러시아로 건너가 동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며 청년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전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안중근 의거[편집]

1908년 우덕순은 여름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회령 지방 등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왜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노령 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이때 우덕순은 이름을 연준(連俊)으로 고치고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노령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 간의 연락을 취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도중에서 유동하·조도선도 그들과 동행하여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그는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 등과 같이 하얼빈 일대를 각자 영역을 정해서 자신의 담당구역에 나타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담당구역은 하얼빈 역, 우덕순의 담당구역은 채가구(蔡家溝) 역이었으므로 각자 자신들의 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월 26일 아침 이토 히로부미의 일행을 태운 열차가 채가구를 지나 하얼빈 역에 정차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손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된 후 그도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경찰의 검문에 의해 검거되어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되어 러시아 헌병대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군에 인도되었으며 만주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았다. 1910년 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교육계몽, 종교사업[편집]

그 뒤 함흥 감옥 탈옥사건이 탄로나 형이 2년 추가되어 1915년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다시 하얼빈·치치하얼·만저우리 등지에서 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전로한족중앙회, 의열단 계열 판의단 등에서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김명봉(金鳴鳳) 등과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해방 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귀국 수송을 돕는 일에 진력하였다.

말년[편집]

귀국후 1948년에는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였고, 안중근의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자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 26일 전쟁 중 북한 인민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74세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후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관련 작품[편집]

영화[편집]

뮤지컬[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