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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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출생 1830년 8월 4일
일본 일본 조슈 번 하기 촌
사망 1859년 10월 27일 (29세)
일본 일본 에도 덴마 정
사인 사형
국적 일본
별칭 아호 쇼인
학력 숀가쿠주쿠
직업 사상가, 교육자, 철학자
종교 유교
친척 숙부(양부) 타마키 분노신
요시다 쇼인의 동상

요시다 쇼인(일본어: 吉田松陰 (よしだしょういん) 길전송음[*], 1830년 8월 4일 ~ 1859년 10월 27일)은 일본의 사무라이이자 교육자이다. 쇼인은 그의 아호이고, 본명은 노리가타(矩方 구방[*]). 일본 조슈(長州)(현 야마구치 현) 하기 출생이며, 근현대적 의미의 일본우익 사상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생애[편집]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야마가류 병학사범인 숙부의 양자가 되었다. 숙부 타마키 분노신에 의해 병법을 배우고 1850년 병학연구를 위하여 규슈(九州)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에도(江戶)에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고, M.C.페리의 흑선 외교를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제자인 카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와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다. 숙부 타마키가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하여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의 숙장으로 취임하였다.

학숙의 숙장이면서도 요시다는 교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사상[편집]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하였다.[1] 또한 그는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한론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교육관[편집]

요시다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의 대상에 신분이나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분타(후에 이노우에 가오루로 개명)(井上聞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1858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창하다 막부의 고관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안세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 심문을 받다가 로주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진술한 후 사형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에게서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 타마시(大和魂ㆍ일본혼)'를 외쳤다고 한다.[1] 저서에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사후[편집]

요시다 쇼인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1]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인 '쇼(松)'라는 글자를 따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어 그의 학맥이 계승되리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내에 요시다를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

한편 존왕양이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훗날 커다란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요시다 쇼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1]

유신삼걸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이때 가쓰라 고고로), 과격파 유신지사의 대표격이자 기병대의 수장인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그와 함께 권세를 누린 이노우에 가오루 등 유신의 주요인사들이 쇼인의 죽음으로 분기했다.

저서[편집]

  • 《강맹차기(講孟箚記)》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특파원 칼럼) 요시다 쇼인과 아베 신조 한국일보 2006년 09월 24일자 기사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