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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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왕양, 중국어: 汪洋, 병음: Wāng Yáng, 1955년 -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충칭 시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광둥 성 서기를 지냈으며, 현재에는 중국 국무원 산업부총리 직을 수행하고 있다. 해협양안관계협회 회장을 지낸 왕다오한(汪道涵)이 그의 숙부이다.

경력[편집]

1972년, 고향인 안후이 성 쑤 현(현재의 쑤저우 시)의 식품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문화혁명 말기의 1976년 2월, 오칠간부학교(五七幹校)의 교원이 되었고, 그 후 당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9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의 이론 선전 간부반에 발탁되어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다. 1981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안후이 성의 당위원회 부서기를 시작으로 공청단 성위원회 선전부장을 지냈고 1983년에는 공청단 성위원회 부서기로 승진을 계속했다.

1984년부터는 안후이 성 체육위원회 주임, 퉁링 시장, 성장조리(省長助理)[1], 성 계획위원회 주임 등을 역임했고, 1993년에는 최연소로 부성장에 취임했다. 1995년까지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9월, 주룽지 내각에서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2003년 원자바오 내각에서 국무원 부비서장을 지냈다. 국가기관당조 부서기, 국무원 삼협공정 건설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2003년 3월, 원자바오 내각의 일원으로 국무원 부비서장이 되어 국무원 변공청의 일상업무를 담당했다. 국가기관 당조부서기, 국무원 삼협공정건설위원회 위원등을 겸임했다. 2005년 충칭 시 시위원회 서기, 2007년 12월부터 광둥 성 성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2007년 10월의 제17기 1중 전회에서 두 단계나 승진하여 정치국원에 올랐다. 이른바 공청단의 후진타오에 의해 발탁되었다.

2008년 1월, 중국 중부에 한파가 덮쳐, 송전선이 눈 무게로 넘어지는 등 국가 기반시설이 크게 피해를 입자 이에 대한 복구가 급했다. 을 목전에 둔 광둥 성에서는 지방에서 노동자가 귀성을 위해 역에 몰려 들고 있었다. 시설이 회복될 전망이 없었기 때문에, 왕양은 그 해 귀성을 포기하도록 요구했고, 대다수가 거기에 응했지만, 피해 대책의 책임자였던 원자바오가 “설 전에 귀성할 수 있다”라고 발언했기 때문에 귀성객이 다시 몰려 들자, 이에 대응을 하는 데 쫓겼다.

11월,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영향에 대응하여, 국무원이 발표한 경기 활성화 대책에, 광둥 성이 요구했던 외국자본의 수출기업 대책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광둥 성의 왕양 서기는 쇠퇴 산업을 성 밖으로 퇴출하여 질 높은 성장을 추구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자는 ‘등롱환조’(騰籠換鳥, 새장을 비워 새를 바꾸자)를 주장했다.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이나 실업자 대책을 거의 방치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원자바오와 재차 대립했다. 2009년 7월, GDP 성장률을 8%대로 지킨다는 ‘바오바’(保八)에 대해, “GDP 수치는 별로 중시하고 있지 않다”, “불경기에 성장이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하다”이라고 발언하여, 구조개혁이나 쇠퇴 산업의 퇴출을 강조했다.

2009년 충칭 시에서 대규모 비리추방 캠페인이 전개되어 충칭 시의 공안을 담당하는 부국장과 사법 관계자를 포함한 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후임인 보시라이 당위원회 서기와 대립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제17기 중앙정치국원을 맡고 있다.

주석[편집]

  1. 성장조리(省長助理)는 부성장의 아래 직급이다.

바깥 고리[편집]

전 임
황전둥 (黄鎮東)
충칭 시 당위원회 서기
2005년 ~ 2007년
후 임
보시라이
전 임
장더장
광둥 성 당위원회 서기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18일
후 임
후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