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 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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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 마씨
永平麻氏
나라한국
관향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시조마난(麻煖)
인구(2000년)425명

영평 마씨(永平麻氏)는 경기도 포천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된 마난(麻煖)이다.

시조[편집]

영평 마씨(永平 麻氏)의 시조는 고려 태조(高麗 太祖) 때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된 마난(麻煖)이다. 918년(태조 원년) 8월 태조 왕건을 도와 궁예(弓裔)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로가 큰 마난(麻煖), 견권(堅權),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락(金樂), 연주(連珠) 등을 개국공신 2등에 녹훈하여 , 은, 그릇과 비단 등을 내렸다.[1]

마난(麻煖)과 함께 고려 개국공신에 녹훈된 인물 중 김락(金樂)은 당악 김씨(唐岳 金氏)의 시조, 견권(堅權)은 천녕 견씨(川寧 堅氏)의 시조, 연주(連珠)는 전주 연씨의 시조로 삼는다.

본관[편집]

영평(永平)은 경기도 포천시 일대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으로,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광개토대왕 이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동음(洞陰)으로 고쳐 견성군(堅城郡: 지금의 포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 동주(東州: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에 예속시켰으며, 예종 때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원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의 고향이라 하여 영흥현(永興縣)으로 승격시켰고, 공양왕 때 관할을 교주도(交州道)에서 양광도(楊廣道)로 옮겼다.

1394년(고려 태조 3) 영평현(永平縣)으로 바꾸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이곳에 경기감영을 새로 만들면서 포천과 합쳐 대도호부가 되었다. 인조 때 다시 영평과 포천으로 나누었고, 헌종 때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포천군과 합쳤다. 양골의 뜻은 ‘산골’, 즉 ‘산속의 고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지역은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유역의 산간분지에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포천과 평강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으며, 한탄강을 따라서 마전(麻田)ㆍ적성(積城)ㆍ파주를 거쳐 바다와 연결되었다.

인구[편집]

마(麻)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9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상곡, 열산, 영평 3본이 있다. 이 중 영평 마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에 오른 마난(麻煖)이고,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시조는 1597년 정유재란명(明)나라 제독으로 원병을 이끌고 왔던 마귀(痲貴) 장군의 증손자인 마순상(痲舜裳)이다. 마(麻)씨 중에서 영평 마씨(永平 麻氏)는 1985년에는 72가구, 320명, 2000년에는 127가구, 42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