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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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있다.[1]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는 나치 독일유태인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로, 폴란드오시비엥침(독일어 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곳이며, 좀 더 가까운 크라쿠프에서는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로마인·옛 소련군 포로·정신질환을 가진 정신장애인·동성애자·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수용소의 건물들도 수용소 생성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 이외에는 전부 폴란드군 벽돌 막사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연방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목차

배경 [편집]

아우슈비츠 I 입구

나치가 본격적으로 유대인학살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이다. 하인리히 히믈러SS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를 A, B, C, D의 4개 지대로 편성하여 진격하는 국방군의 뒤를 따라 소련 영내에서 각종 처형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이 처형한 이들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공산청년동맹 소속 공산주의계 청년 등이었다. 처음 이들의 처형 방법은 직접 총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히믈러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것을 지시했다. 여러가지 방법 중에 S트럭이 실험되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S트럭은 불결한 결과(배기가스 중독에 의한 질식으로 인한 구토 및 똥 ,오줌 등의 배설)로 인해 처형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독가스를 이용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이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을 피해 후퇴하면서 나치는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장과 가스실은 파괴되었지만, 분노한 소련군이 파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대부분의 수감자는 서쪽을 향해 진군 명령을 받았을 때 너무 병약해서 움직일 수 조차 없어서 뒤에 남겨졌다. 그들은 이곳에서 요제프 멩겔레 같은 이들이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고 증언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안경, 머리카락, 신발도 발견되었다. 1947년 폴란드 정부는 아우슈비츠의 일부를 국립박물관으로 만들었으며, 1979년 국제연합문화과학기구(UNESCO)이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경과 [편집]

죄수 건물, 지멘스 공장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만행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는데, 제조사인 훽스트사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 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실례로 훽스트사는 1990년대 태아를 낙태시키는 약을 제조했다가 '나치독일시절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더니, 이제는 태아를 살해할 생각이냐'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3]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희생자 수 [편집]

시체 소각로.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4]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

주석 [편집]

  1. 오타는 의도적인 것이다. 당시 유대인 수감자들이 일종의 사보타주로 B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2.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3. 《현대문명진단》/이원복 글, 그림/조선일보사 출판국
  4. 뉴스위크 1995년 1월 18일 자,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특집

좌표: 50°02′09″N 19°10′42″E / 50.03583°N 19.17833°E / 50.03583; 19.17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