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요시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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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요시나가(일본어: 浅野幸長, あさの よしなが, 1576년~1613년)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산 센고쿠 무장이자 다이묘로 유명한 무장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이다. 또 기이노쿠니 기슈 번의 초대당주이기도 하다.

생애[편집]

덴쇼4년(1576년), 오미노쿠니 아자이 군 오다니(시가 현 고호쿠 정(湖北町))에서 아사노 나가마사적장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고다이인)의 의동생으로, 도요토미정권에서는 고부교(五奉行)의 한 사람이다.

덴쇼18년(1590년)에 고호조 씨 정벌(오다와라 전투)에 참가했다. 임진왜란에도 아버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으며, 게이쵸2년(1597년)에는 울산성 전투(현재의 울산광역시 내)에서 농성을 하며 분전했다.

분로쿠2년(1593년)에 아버지와 함께 가이노쿠니후츄(府中)(야마나시 현 고후 시)를 받았다. 하지만, 분로쿠4년(1595년), 간바쿠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실각에 연좌되어 노토(이시카와 현 동부)로 귀양갔지만 마에다 도시이에의 중재도 있어 금세 복귀하였다.

게이초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은 후, 조선에서 함께 함께 싸웠던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등 무단파에 가세해 고부교인 문치파・이시다 미쓰나리등과 대립했다. 게이쵸4년(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은 후에는 후쿠시마・가토 등과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속해、난구산 부근에 포진하고 모리 히데모토, 나쓰카 마사이에등의 서군 세력을 견제했다.

전후에는 기이노쿠니 와카야마에 37만 6천 석을 받았다. 게이쵸16년(1611년) 니조 성에서 열린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회담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경비도 맡았다. 게이쵸18년(1613년) 8월 25일에 와카야마에서 사망했다. 향년 38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뒤를 이었다.

묘소 : 와카야마 현 이토 군(伊都郡) 고야 정(高野町)의 고야산 싯치인(悉地院). 와카야마시 후키아게(吹上)의 소겐산(曹源山) 다이센지 절(大泉寺).

요시나가 사후 가독을 둘러싸고 동생 나가아키라와 나가시게가 다퉈 그 결과 나가아키라가 뒤를 잇게 되었다. 요시나가가 죽은 다음해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어, 게이쵸20년(1615년)에 도요토미씨는 이에야스에게 멸망당한다.

그 후 나가아키라 대인 겐나5년(1619년), 후쿠시마가의 가이에키(改易)와 함께 아사노가는 아키노쿠니 히로시마 번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인물[편집]

무용이 출중한 역전의 용장으로 그 무용에는 여러 다이묘들도 시선을 고정했다고 한다. 요시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인정하면서도 평생에 걸쳐 도요토미씨에 대한 충성을 굳게 지켜나갔다. 그 때문에 기요마사처럼 이에야스일파에 의해 암살당한것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를 싫어하는 무단파의 중진이었다.

요시나가의 사인은 신허(화류병(성병))인데 이것은 기요마사와 같은 사인이다. 게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였으며, 요시나가가 죽은 다음해에 오사카 겨울의 진을 개전한 것을 보아 최근에는 암살설도 유력하다. 다만 매독이라면 병에 걸리고 사망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린다. 이걸로 감염시기를 역산하면 임진왜란때 진중에서 유녀와 접촉해 감염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같은 시기 한반도나고야 성에 주둔했던 무장들이 비슷한 시기에 감염되었다면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또한 학문에도 열심이었으며, 후지와라 세이카호리 세이이등을 사사했다.

관련항목[편집]

전 임
아사노 나가마사
제2대 아사노가 당주(고후 번)
1593년 - 1600년
후 임
도쿠가와 요시나오
전 임
아사노 나가마사
제2대 아사노가 당주(기슈 번)
1600년 - 1613년
후 임
아사노 나가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