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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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년 7월 8일 ~ 1651년/1653년)는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시기의 여성 화가로, 카라바조의 강렬한 명암법에 많은 영향을 받은 여러 화가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10대 때부터 미술에 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여,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에 의해 미술 수업을 받는다. 초기 바로크 시대의 여성들은 미술을 공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23살 때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녀는 여성화가로서 처음으로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을 그렸는데, 당시에 이러한 주제의 그림들은 여성의 능력 밖이라고 여겨졌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4-20) 캔버스에 오일 199 x 162 cm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타시 (Tassi)를 강간상습범으로 고발했는데,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도덕한 여자로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녀의 작품에서도 보이는 강인함과 열정으로 당대의 여러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 와 같은 명작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오늘날에 이르러 여러 비평가와 학자들에게 재발굴되고 있는데,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강인한 여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을 꼽으며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라 부르기도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그녀의 작품을 주문했던 한 고객에게 이러한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이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생애[편집]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이자 화가였던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장녀로, 오라치오는 카라바조 학교의 대표자들 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화실에서 처음으로 회화를 접했으며 그녀의 남동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로잉과 유화, 색을 섞는 법에 관해서 아버지에게 배우게 된다. 그때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카라바조풍의 강렬한 명암법과 색감 스타일, 주제 등은, 아버지인 오라치오에서 아르테미시아에게까지 넘어간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는 이러한 화풍과 당시 전형적인 회화의 주제에 관해 오라치오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 작품은 수산나(1610년작)로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에 완성되었는데, 아버지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1612년,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성들이 전부였던 미술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다. 이 시기에 아버지 오라치오는 아고스티노 타시와 로마의 대저택을 꾸미는 공동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오라치오는 토스카나의 화가였던 그를 고용하여 아르테미시아를 개인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타시는 그녀를 강간하게 된다. 그 이후 타시는 그녀의 명예를 위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나, 훗날 약속을 이행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로 인하여 오라치오는 타시를 고발하게 된다.

재판은 7개월간 지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타시가 그의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의 처제와 간통을 하고 오라치오의 작품을 훔쳐내려는 것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판 도중 아르테미시아는 부인과 진찰대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것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로, 만약 그 사람이 모진 고문 와중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관점 때문이었다. 이 재판 이후 타시는 1년 형을 선고받게 되고, 이 이야기는 훗날 20세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1612-1613년작)는 나폴리에서 전시되었는데, 생생하게 표현된 잔인성이 주는 인상은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한 정신적 복수심을 나타낸다고 해석되었다.

재판이 있는지 한달이 지난 후, 그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오라치오는 피렌체의 한 화가인 피란토니오와 그녀를 결혼시킬 준비를 한다. 그녀가 피렌체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테미시아는 카사 부나로티의 청탁을 받아 왕실화가가 되었으며 메디치 가문 및 찰스 1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이시기에 그녀는 <Madonna col Bambino(The Virgin and Child)>를 그렸다고 여겨지며, 이 작품은 현재 로마의 스파다 겔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피렌체에서 지낼 당시, 아르테미시아와 피란토니오는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딸인 프루덴지아만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1621년 아르테미시아와 함께 로마로 돌아온다. (그 때 당시 아이들의 이른 죽음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나서 프루덴지아의 삶에 대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