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로프의 이탈리아와 스위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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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고타르 고개를 넘는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코츠제브(Alexander Kotzebue)그림.

이탈리아와 스위스 원정1799년1800년에 벌어진 러시아의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가 프랑스 군을 상대로 피에몬테(Piedmont)와 스위스(Switzerland)에서 벌인 작전을 통칭해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의 일부로 여겨지며, 혹자들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War of the Second Coalition)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이탈리아 전역[편집]

러시아의 장군 수보로프는 1799년 당시 거의 70살의 고령의 나이였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그의 기나긴 무장으로서의 경력에서 63회 이상의 적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이었다. 수보로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재임 기간 중 야전 원수(field marshal)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나 예카테리나 여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차르 파벨 1세(Tsar Paul) 시기에는 황제의 보병 작전 표(Infantry Code)를 대담하게 비판하다가 해임되었다. 수보로프는 이후 오스트리아의 요청으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지휘권을 맡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비 전투, 알렉산드르 코츠제브(Alexander Kotzebue) 그림.

4월 19일 지휘권을 인계받은 수보로프는 아다 강(Adda River) 인근을 공략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수보로프의 군사들은 단 18일 만에 300마일을 주파하는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수보로프는 4월 27일, 카사노 전투(Battle of Cassano)에서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oreau)를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수보로프는 러시아 외교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다 강은 루비콘 강과 다름없네. 우리는 적의 시체를 넘어 이 강을 건넜네."[1] 4월 29일 수보로프는 밀라노에 입성하였다. 2주 후 수보로프는 투린(Turin)으로 이동하여 마렝고 전투(Marengo)에서 모로를 다시금 격파하였다. 사르데냐 왕은 수보로프를 영웅으로 대접하며, 다른 영예로운 칭호들과 함께 "사보이아 왕가의 공작"(Prince of the House of Savoy)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6월 나폴리에서 마크도날(MacDonald) 장군은 모로를 지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두 군세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수보로프는 전군을 집결하여 마크도날과 전투를 벌인다는 대담한 작전을 세웠고, 결국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곳트레비아 강(Trebbia River) 근교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남쪽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이 불굴의 장군은 북쪽으로 진군을 개시했고, 리비에라(Riviera)로 물러난 프랑스의 이탈리아 군(Army of Italy)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였다. 수보로프는 이 추격전을 개시하는 와중인 7월 28일 만토바(Mantua)의 강력한 요새를 함락시켰다.

수보로프에게 완패한 모로는 지휘권을 반납하였고, 주베르(Joubert)가 모로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맡았다. 보체타 고개(Bochetta Pass)를 통해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압박하려던 주베르는 제노바의 북쪽에 있는 노비(Novi)에서 수보로프와 교전하였으나 대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몇 년 후 노비 전투에 참여했던 모로에게 누군가가 수보로프가 어떤 인물이었냐고 물었을 때 모로는 "당신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불굴의 지휘관이자, 자신을 포함한 휘하의 부대 전원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퇴각하지 않게 만드는 장군을 뭐라고 부를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2]

스위스 전역[편집]

파니세스 고개를 넘는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코츠제브(Alexander Kotzebue) 그림.

일반적으로 위대한 장군들은 전투에서는 지지 않더라도 정치꾼들의 음모는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법이다. 오스트리아영국은 이탈리아에서 러시아의 성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을 품었고, 결국 수보로프의 프랑스 본토 진격 계획을 좌절시켰다. 대신 저지대 지방전역에 집중하게 하였다. 수보로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황제 파벨 1세는 수보로프에게 스위스로 병력을 이동시켜 무능한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Alexander Korsakov)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코르사코프는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에게 제2차 취리히 전투(Second Battle of Zurich)에서 대패를 당했다. 이 승세를 몰아 마세나는 휘하에 있는 8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보로프 휘하의 러시아군 잔여병인 18,000명의 정규병과 5,000명의 코사크(Cossacks) 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수보로프는 퇴각하거나 장렬하게 전멸하거나 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10월 6일 마세나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수보로프는 파니세르 고개(Panixer Pass)를 통해 퇴각을 시작하여 눈이 깊이 깔린 분드네르 오베르란드(Bündner Oberland)의 9천 피트 정도 되는 산들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세나는 수보로프의 함정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퇴각하였다. 장비와 보급품이 부족한 절망적인 상태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보로프는 진군을 계속하여 주력부대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라인 강 근교의 쿠어(Chur)에 도달하였다. 수보로프는 지치고 엉망이 된 병사들이 진영으로 진군하는 모습을 보고 "러시아의 독수리는 로마의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난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말은 한니발이 한 것처럼 눈으로 가득 쌓인 알프스를 건넌 수보로프의 업적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3]


결과[편집]

비록 수보로프는 휘하의 병력을 보존하고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지지 않았지만, 수보로프가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보여준 놀라운 움직임은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수보로프는 이 업적으로 러시아 역사상 4번째의 대원수(Generalissimo)로 승진하였지만 수보로프의 활약에 질투심을 느낀 차르 파벨 1세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로 소환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수보로프는 "산지에서의 군사행동 요강(Rules for the Conduct of Military Actions in the Mountains)"이라는 책자를 저술할 수 있었다. 수보로프는 1800년 5월에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나폴레옹과 전장에서 만나고 싶다는 야망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전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1852년~53년 사이에 출판된 드미트리 밀리우틴(Dmitry Milyutin)가 제작한 5권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석[편집]

  1. Latimer, 65
  2. Latimer, 68
  3. Latimer, 69

참조[편집]

  • (독일) Clausewitz, Carl von (1834). 《Hinterlassene Werke des Generals Carl von Clausewitz über Krieg und Kriegführung, zweiter teil : Die Feldzüge von 1799 in Italien und der Schweiz》. Berlin: F.Dümmler
  • Dmitry Milyutin. The History of the War of Russia with France during the Reign of Emperor Paul I, vol. 1-9. St. Petersburg, 1852-1853.
  • Latimer, Jon (December 1999). War of the Second Coalition. 《Military History》: 62–69.
  • Longworth, Philip (1965). 《The Art of Victory: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Generalissimo Suvorov (1729-1800)》. New York: Holt, Rhinehart & Win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