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문

철거되기 전의 소의문.

소의문(昭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소문이다. 또한 소의문은 강화군 또는 인천군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에 내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또한 소의문의 속칭은 서소문(西小門)으로, 이는 조선 시대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주 1]

또한 소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당시 소의문이 위치하였던 지번은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58-10이다.

역사[편집]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립되었다.[1] 당시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으로, 이때의 문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인근의 돈의문숭례문이 더 큰 관문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738년(영조 14년)에는 영조가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하였다.[2] 1744년(영조 20년) 8월이 되어 문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3]

1908년 9월에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이 헐렸다.[4]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토목국에서 도로 정비를 위하여 소의문을 철거할 계획을 세웠으며, 같은 해 12월 2일 경매를 진행한 뒤 이후 철거하였다.[5] 현재는 중앙일보사 철탑주차장이 들어섰고 주차장 화단에 표석이 있다.

각주[편집]

내용주
  1. 《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참조주
  1. 《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국사편찬위원회, 위키문헌
  2. 《영조실록》 영조 47권 14년 10월 22일, 소덕문을 세우는 역사가 준공되자 그 편호 수정을 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3. 《영조실록》 영조 60권 20년 8월 4일, 속칭 서소문인 소덕문에 성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이라고 이름을 고치다. 국사편찬위원회
  4. 김도형 (2010). 《순성의 즐거움》. 경기: 효형출판. 225쪽. ISBN 9788958720966. 
  5. “경매훼철에부ᄒᆞᆫ서소문” (PDF). 《매일신보》. 1914년 11월 25일. 2016년 3월 7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1월 2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