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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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군
Coat of arms of the Soviet Union.svg
창립일 1918년 2월 23일 (붉은 군대)
1946년 2월 25일 (소비에트군)
1991년 12월 31일 해체
국적 소련 소련
편제 소련 육군
소련 해군
소련 공군
소련 전략 로켓군
충원방식 징병제 (1939년 이후)
상비군 500만 명 (1982년)
예비군 2400만 명
지휘체계
통수권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군사비
예산 2000억 달러 (1982년)
GDP 대비 12.72%
방위산업
함께 읽기
1983년 혁명 축하 군사 퍼레이드

소비에트군소련군대이다. 1946년 2월 25일 이전 명칭은 붉은 군대였다. 1982년 소련군의 총원(總員)은 5백만 명이었다.

역사[편집]

기원[편집]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미국 정부의 포스터. 친근한 소련 병사를 그리고 있다.
1938년에 발행된 우표

소련군의 전신은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적위대(赤衛隊)이다.

혁명에 가담한 노동자와 병사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이었던 적위대를 군대로 재탄생시킨 사람은 레온 트로츠키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이 적위대를 개편하여 백군에 대항하는 적군을 만들었다. 적군은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볼셰비키소련을 탄생시켰다.

특기할 만한 제도로는 정치지도원 제도가 있다. 나폴레옹처럼 군대 내의 혁명에 반대하는 군인이 혁명 정부에 반기를 들 것을 두려워한 트로츠키는 군에 정치지도원을 배치하여 장군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사실 소련군의 지휘관들 중 상당수가 사상성이 의심스러운 러시아 제국 장교 출신이었다.

정치지도원의 임무중에는 대한민국 국군정훈 장교와 비슷하게 장병들에게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심을 지도하는 역할도 있었다. 정치위원은 야전군부터 소대까지의 모든 단위 부대에 지휘관과 동시에 배치되었으며, 부대의 명령은 사령관, 참모장, 정치위원 세명의 승인이 있어야만 집행되었다.

이 제도는 지휘권의 단일화이라는 점에서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나, 군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우위를 통하여 쿠데타을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파시즘이 유럽에 확산되자 소련은 1939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함께 폐지된 군 계급이 부활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소련의 산업화 덕분에 소련군은 장갑차, 전차, 항공기를 많이 보유한 현대적이고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소련군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효과적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1930년대 말 소련의 대숙청(예조프치나)으로 많은 지휘관이 숙청당하였고 숙청당하지 않은 지휘관도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소련군은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닥쳐온 전쟁에서 초기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큰 피해를 입었고 전쟁 패배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다행히 소련군의 패배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지휘관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사라졌고 결국 뛰어난 지휘관들을 앞세운 소련군은 독일군을 쳐부수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냉전[편집]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1988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로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원자 폭탄(原爆)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소련군도 해체되었다. 해체되기 직전의 소비에트군은 다른 시기와 다름없이 강력한 상태였으며 정규군은 5백만 명이 넘었고 예비군은 천만 명이 넘었으며 주력 전차, 중거리 로켓포, 대공 전차는 합쳐서 5만 대가 넘었다. 러시아 연방군이 대부분의 무기와 인력을 흡수하였고,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다른 공화국들도 일부를 자국군으로 흡수하였다.

조직[편집]

통제기구[편집]

군사행정단위[편집]

해군[편집]

해군은 해군인민위원부(海軍人民委員部)에 소속.

역대 지도자[편집]

초기(러시아 내전)[편집]

발전기 (독소전쟁)[편집]

주요 무기[편집]

주요 전쟁, 전투[편집]

비판[편집]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한반도 북한의 군정 기간에 드러낸 행태를 기록한 문건이 발견되었다. 문건에는 “우리 군인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소련군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연해주 군관구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한 약탈과 관련해 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군내 질서를 잡고 25군단 내 정치적 도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며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뒤 이 사실을 널리 전군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소련군 역시 미군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진주했고 진주 후에도 현지 사정에 무관심했다”며 “이는 북한 진주 초기 소련군의 비행과 풍기문란이 심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1]

주석[편집]

  1. 1945년 北 진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 아닌 약탈군이었다 2010년 3월 10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