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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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西)씨는 중국 및 한국의 성씨이다.

천천히 서 徐[편집]

서(徐)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93,954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3위이다.

기원[편집]

서씨(徐氏)의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백제왕족의 후손설이 있다.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편집]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서국(徐國)는 단군 조선의 제후국이며 동이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부른다.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서언왕이 동이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가 두려워 서언왕을 동이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기자의 후손설[편집]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7]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6][8]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백제 왕족 후손설[편집]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손녀인 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餘氏)로 기록하였다.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부여 서씨[편집]

부여 서씨(扶餘 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徐隆)이다. 그는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마지막으로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이 본래의 성씨인‘부여(扶餘)’를 ‘서(徐)’씨로 바꾸고 웅진도독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1] 부여 서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486가구, 14,31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천 서씨[편집]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 서씨는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 5명,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3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서목,서필,서희,서봉,서눌,서유걸,원목황후,서정,서존,서균,서석,서공,서순,서안정,서능,서린,서온,서준,서균한,서신계,서원경,서찬,서균형,서견,서보,서수,서희준,서광준,서중보,서운,서구방,서유,서선,서호,서거정,서강,서경덕,서림,서기,서지,서익,서필원,서양갑,서성,서경충,서경춘,서국장,서경우,서문중,서종태,정성왕후,서명응,서봉령,서명선,서명균,서련,서호수,서지수,서유구,서매수,서당보,영수합서씨,서유신,서영보,서기순,서용보,서인주,서병학,서광범,서재필,서상돈,서일,서상일,서상렬,서병희,서병오,서민호,서정주,서경보,서석준,서석재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이천 서씨는 53,407가구, 172,07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달성 서씨[편집]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시조 서진(徐晉)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달성 서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32,270가구, 429,35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구 서씨[편집]

대구 서씨의 시조 서한(徐閈)은 고려조에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다. 대구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3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대구 서씨는 7,645가구, 22,75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양 서씨 / 당성 서씨[편집]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시조 서간(徐趕)은 당나라 8학사(八學士)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경기도 당성(唐城: 남양)에 정착하였다. 남양 서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23가구 2,246명으로 집계되었다.

당성 서씨(唐城 徐氏)는 남양 서씨에서 분적한 계통으로 서간(徐趕)의 12세손으로 교리(校理)를 지낸 서원길의 둘째 아들인 서득부(徐得富)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당성(唐城)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절강 서씨[편집]

절강 서씨(浙江 徐氏)의 시조(始祖)는 중국 절강성 출신 서해룡(徐海龍)이다. 그의 증손 서학(徐鶴)이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와 여러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고 경북 성주군 대동방(慶北星州大同坊)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서해룡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86가구, 62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국[편집]

중국의 서(徐, 병음 : Xu)씨는 중국에서 성씨 순위 10위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가 있었다.

서녘 서 西[편집]

중국[편집]

서(西, 병음 : Xi)씨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중국의 4대 미녀 서시(西施)는 서(西)쪽에 사는 시(西)씨라는 명칭으로 서(西)씨는 아니다. 청나라 서태후는 서쪽 채에 기거하는 태후라는 명칭으로 서(西)씨가 아니다. 서문(西門)씨는 복성으로 서(西)씨가 아니다.

한국[편집]

한국 서(西)씨의 본관은 진주, 충주가 있으나 시조와 연원은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서(西)씨는 1,29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석[편집]

  1. 양종국, 2004,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백제문화, 제33권, p159-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