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찰루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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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루키아

973년~1189년
수도칼랴니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마하라자
957년 ~ 997년
1076년 ~ 1126년
1184년 ~ 1189년

타일라파 2세(초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소메슈바라 4세(말대)
지리
위치중부 인도
인문
공용어칸나다어
민족칸나다인
종교
종교힌두교

서찰루키아(칸나다어: ಪಶ್ಚಿಮ ಚಾಲುಕ್ಯ)는 동찰루키아와 함께 찰루키아의 분파 중 하나로,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남인도 데칸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 칸나다계 왕조는 오늘날 카르나타카주의 비다르구에 있는 바사바칼리안의 칼랴니에 있던 당당한 수도를 따서 칼랴니 찰루키아(칸나다어: ಕಲ್ಯಾಣ ಚಾಲುಕ್ಯ)라고도 부르며, 6세기 바다미의 찰루키아 왕조와의 이론적 관계를 따서 후찰루키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왕조는 별개의 왕조인 동시대의 벵기의 동찰루키아와 구별하기 위해 서찰루키아라고 불린다. 서찰루키아가 등장하기 전, 만야케타의 라슈트라쿠타 제국은 데칸의 대부분과 중앙인도를 2세기 이상 지배했다. 973년, 말와파라마라 왕조 통치자 타일라파 2세가 수도를 성공적으로 침공한 후 라슈트라쿠타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비자푸르 지역을 다스리던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세력가는 그의 군주를 물리치고 만야케타를 수도로 정했다. 그 왕조는 빠르게 권력을 잡았고 칼랴니로 수도를 옮긴 소메슈바라 1세의 통치하에서 제국으로 성장했다.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남인도의 두 제국인 서찰루키아와 탄자부르의 촐라 제국은 비옥한 벵기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많은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갈등 동안, 서찰루키아의 먼 사촌이지만 촐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던 동찰루키아는 촐라의 편을 들었고 이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11세기 말과 12세기 초에 서찰루키아는 촐라와 경쟁했고 북쪽의 나르마다강과 남쪽의 카베리강 사이의 데칸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1][2][3] 그의 공적은 남쪽에 국한되지 않았는데, 심지어 왕자 시절부터 그는 오늘날의 비하르주와 벵골까지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4][5][6] 이 기간 동안 데칸의 다른 주요 지배 가문인 호이살라, 데바기리의 세우나 왕조, 카카티야 왕조, 칼야니의 남칼라추리 왕조는 서찰루키아의 봉신들이었고, 12세기 후반 동안 찰루키아의 힘이 약해졌을 때 비로소 그들은 독립을 얻었다.

서찰루키아는 초기 찰루키아 왕조의 양식과 후기 호이살라 제국의 양식 사이의 건축적 연결고리인 과도기적 양식으로 알려진 건축 양식을 발달시켰다. 그것의 기념물들의 대부분은 카르나타카주 중부의 퉁가바드라강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들에 있다. 잘 알려진 예들로는 락쿤디의 카시비스베스바라 사원, 쿠루바티의 말리카르주나 사원, 바갈리의 칼레스바라 사원 그리고 이타기의 마하데바 사원이 있다. 이 시기는 서찰루키아 왕들이 그들의 모국어인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작가들을 격려했기 때문에 특히 문학에서 남인도의 예술 발전에 중요한 시기였다.

역사[편집]

서찰루키아 역사에 대한 지식은 왕들이 남긴 수많은 칸나다어 비문(학자 쉘든 폴락과 얀 후벤은 찰루키아 왕실 비문의 90%가 칸나다어라고 주장했다)[7][8]과 란나가 쓴 칸나다어로 된 가다 유다(982)와 빌하나가 산스크리트어로 쓴 비크라만카데바 카리탐(1120) 같은 중요한 현대 문학 문서를 연구한 결과물로 얻게 되었다.[9][10] 가장 초기의 기록은 957년으로, 서찰루키아가 여전히 라슈트라쿠타의 봉신이었던 타일라파 2세와 현재의 카르나타카주 비자푸르구 타르다바디에서 통치하던 타일라파 2세의 통치 기간에 기록되어 있다.[11][12] 이 제국의 왕들의 계보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현대의 문학적 및 비문학적 증거와 서찰루키아 왕들이 초기 찰루키아 왕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칭호와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한 이론은 서찰루키아 왕들이 6세기의 유명한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와 같은 혈통에 속했다고 주장하지만,[13][14] 다른 서찰루키아 비문학적 증거는 그들이 초기 찰루키아와는 무관한 별개의 혈통이었음을 시사한다.[15]

기록에 따르면 바나바시(967년경)의 찰루키아 왕 차티가데바가 지역 카담바 족장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반란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후계자 타일라파 2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16] 몇 년 후, 타일라파 2세는 973년 중앙 인도의 파라마라 왕조가 침입해 라슈트라쿠타의 수도 마니야케타에 혼란을 일으킨 시기를 맞춰 반란을 일으켜 찰루키아 통치를 다시 확립하고 라슈트라쿠타를 격퇴했다.[17][18] 라슈트라쿠타를 제압한 후 타일라파 2세는 수도를 만야케타로 옮기고 파라마라와 다른 공격적인 라이벌들을 정복하고 나르마다강과 퉁가바드라강 사이의 땅을 지배함으로써 서부 데칸의 찰루키아 제국을 공고히 했다.[19] 그러나 일부 비문에 따르면 마이소르 영토의 발라감베는 1042년 소메슈바라 1세가 통치할 때까지 권력의 중심지였을 수도 있다.[20]

서부 데칸 왕국과 타밀라캄 왕국들 사이의 극심한 경쟁은 11세기에 벵기(오늘날의 안드라프라데시주 해안)라고 불리는 크리슈나강과 고다바리강의 도압 지역에 있는 극심하게 경쟁하는 비옥한 강 계곡들을 둘러싸고 전면에 등장했다. 서찰루키아와 촐라 제국은 이 전략적인 자원의 통제권을 놓고 많은 쓰라린 전쟁을 벌였다. 촐라 제국은 유명한 라자라자 1세와 황태자 라젠드라 1세의 시기에 권력을 얻었다. 촐라 황제 라자라자 1세는 강가바디의 서강가 왕조를 복속시킴으로써 오늘날 카르나타카 남부의 찰루키아 영토의 일부를 정복했다. 벵기의 동찰루키아는 서찰루키아의 사촌들이었지만 타밀 왕국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촐라인들의 영향을 점점 더 받게 되었다. 이것이 서찰루키아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즉시 벵기에서 그들 자신들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관련시키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사티야슈라야 왕이 타일라파 2세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비록 벵기에 대한 그의 통제가 흔들렸지만 그는 콘칸과 구자라트에 있는 그의 북쪽 영토뿐만 아니라 촐라의 침략으로부터 그의 왕국을 보호할 수 있었다. 1007년에 촐라 황태자 라젠드라 1세가 서찰루키아를 침략했고 카르나타카의 비자푸르 지역의 도누르에서 서찰루키아 황제 사티야슈라야와 싸웠다. 촐라 인종의 장식품인 다르와드의 사티아스라야의 비문에 따르면, 누르무디 촐라(100개의 왕관을 쓴 촐라)가 90만 명의 군대와 함께 서기 1007년에 서찰루키아 제국을 침략했고 그 지역 전역에 불과 검을 운반했다. 침략한 군대는 많은 찰루키아 수도로 가는 길에 비자푸르구의 도누르까지 진격했다. 사티야슈라야의 후계자인 자야심하 2세는 이 두 강력한 왕국들이 벵기 왕을 선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때 1020년경에 남쪽에서 촐라와 많은 전투를 벌였다.[21][22] 1024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야심하 2세는 인도 중부의 파라마라 왕조와 반항적인 야다바 왕조의 왕 빌라마를 제압했다.[21]

기록에 따르면 역사가 센이 서찰루키아 통치에서 찬란한 시기로 꼽은 자야심하의 아들 소메슈바라 1세가 1042년경 찰루키아 수도를 칼야니로 옮겼다고 한다.[23][24] 양측이 전투에서 이기고 지는 동안 촐라와의 적대 행위는 계속되었지만, 벵기 왕좌에 꼭두각시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중요한 영토를 잃지는 않았다.[25][26] 1066년, 소메슈바라 1세의 아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제국을 침공해 수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까지 침투하여 도시를 위협하다가 촐라에게 격퇴당했다.[24][27][28] 1068년 소메슈바라 1세와 촐라 황제 비라라젠드라 촐라 사이에 벌어진 비자야와다 전투에서 소메슈바라 1세와 그의 아들 비크라마디티아 6세는 패배하여 촐라에게 벵기를 빼앗겼다. 전투 후 소메슈라 1세는 불치병으로 인해 퉁가바드라강(파라마요가)에서 익사했다.[29][30][31] 소메슈바라 1세는 남쪽의 촐라와의 많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통치 기간 동안 콘칸, 구자라트, 말와, 칼링가 등 북부 영토를 장악했다. 그의 후계자인 장남 소메슈바라 2세는 소메슈바라 2세가 왕이었을 때 남부 데칸의 강가바디 총독을 지낸 야심 찬 전사였던 동생 비크라마디티아 6세와 불화를 겪었다. 1068년 이전에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왕자 시절에도 벵골을 침략하여 지배 세력이었던 팔라 제국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침략으로 벵골의 세나 왕조와 바르만 왕조, 비하르의 나야나데바 왕조와 같은 카르나타 왕조가 세워졌다.[4][5][6] 소메슈바라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소메슈바라 2세가 서기 1068년 4월 찰루키아 왕좌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그의 남동생 비크라마디티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며 내전이 일어났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황궁으로 가서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도움을 요청했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황제의 호평을 받았고 비라라젠드라 황제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를 서찰루키아의 왕으로 인정했다고 기록한다. 비라라젠드라는 자신의 딸을 비크라마디티야 6세와 결혼시키고 그와 동맹을 맺어 두 제국 간의 오랜 불화를 종식시켰다. 비크라마디티아 6세는 호이살라, 세우나, 항갈의 카담바 왕조 등 찰루키아 세력의 충성심을 얻었다. 서기 1075년 비크라마디티야는 소메샤와라 2세를 전복하고 서찰루키아 황제가 되었다. 서기 1075-76년 쿨로퉁가 1세의 촐라 통치 기간에 비크라마디티야 군대가 촐라 영토로 침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두 군대는 촐라 지역에서 만났다. 이후 낭길리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진 촐라의 반격이 이어졌다. 이어진 전투에서 찰루키아 군대는 낭길리의 바위길에서 마날루르를 거쳐 퉁가바드라까지 촐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패퇴하고 쫓기게 되었다. 비크라마디티야는 급히 후퇴하여 도망쳤다고 전해진다.[32][33]

후기 찰루키아 통치자 중 가장 성공한 비크라마디티아 6세의 50년 통치는 카르나타카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찰루키아 비크라마 시대"라고 불렀다.[34][35][36] 그는 북쪽(고아의 카담바 자야케시 2세, 실하라 보자, 야다바 왕)과 남쪽(호살라 비슈누바르다나)의 강력한 세력을 성공적으로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1093년 벵기 전투와 1118년 다시 한번 패배한 촐라 제국을 성공적으로 다뤘다. 그는 촐라 제국과의 지속적인 적대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이 영토를 유지했다.[37][1][2][3] 벵기에서의 승리로 동부 데칸에서 촐라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남쪽의 카베리 강에서 북쪽의 나르마다강에 이르는 영토의 황제가 되어 페르마디데바와 트리부바나말라(삼계의 군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당대의 학자들은 그의 군사적 리더십, 예술에 대한 관심, 종교적 관용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38][39] 문학이 번성하고 칸나다어 및 산스크리트어 학자들이 그의 궁정을 장식했다. 멀리 카슈미르에서 이주한 시인 빌하나는 그의 유명한 작품 비크람만카데바 차리타에서 왕을 찬미했다.[40][41]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유능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과 종교 센터에 지원한 수많은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독실한 왕이기도 했다.[42][43]

촐라와의 지속적인 전쟁은 두 제국을 지치게 했고, 그들의 부하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주었다.[43][44] 1126년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죽은 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강력한 봉신들이 자치권과 영토 지휘권을 확장하면서 제국의 규모는 꾸준히 감소했다.[43][45] 1150년과 1200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도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찰루키아와 그들의 봉신들 사이에 많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자가디카말라 2세가 즉위할 무렵, 찰루키아는 벵기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그의 후계자인 타일라파 3세는 1149년 카카티야 왕 프롤라에게 패배했다.[45] 타일라파 3세는 사로잡혔고 이후 서찰루키아의 위신을 무너뜨리며 풀려났다. 퇴폐와 불확실성이 찰루키아의 통치로 스며드는 것을 본 호이살라와 세우나 왕조도 제국을 잠식했다. 호이살라의 나라심하 1세는 타이라파 3세를 패배시키고 죽였지만, 같은 지역의 통제를 위해 경쟁하고 있던 남칼라추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1157년 비할라 2세가 통치하고 있던 남칼라추리 왕조가 칼랴니를 점령한 후 그 후 20년 동안 통제했고, 찰루키아는 그들의 수도를 오늘날의 다르와드구에 있는 아니게리로 옮겼다.[45][46]

칼라추리는 원래 인도 중부에서 데칸 남부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스스로를 칼란자라푸라바라디사바라라고 불렀다.[47] 비할라 2세와 그의 조상들은 망갈라바다 또는 안니게리를 수도로 하여 카르하드 지방과 타르다바디 지방(오늘날 카르나타카와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중복되는 지역)을 다스리는 찰루키아 지휘관(마하만달레쉬와르)으로 통치했다.[48][49] 1157년의 치칼라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찰루키아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마하부자발라 차크라바르티"(어깨와 팔이 튼튼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48] 하지만, 비할라 2세의 후계자들은 칼랴니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그들의 통치는 마지막 찰루키아 왕인 소메슈바라 4세가 칼랴니를 탈환하여 제국을 되찾으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을 때인 1183년에 끝났다.[46][49] 칼라추리 왕 산카마는 이 갈등에서 찰루키아 장군 나라심하에 의해 살해되었다.[50][51] 이 시기 동안, 호이살라의 비라 발랄라 2세는 그들의 제국을 놓고 여러 차례 경쟁자들과 충돌했다. 그는 호이살라 영토 아래에 있던 크리슈나강 계곡의 넓은 지역을 가져온 찰루키아의 소메슈바라 4세와 세우나 왕조의 빌라마 5세를 물리쳤지만, 칼라추리를 상대로는 성공하지 못했다.[52] 빌라마 5세가 통치하던 세우나 왕조 역시 찰루키아가 칼랴니를 되찾았을 때 제국주의적 확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야망은 일시적으로 1183년에 찰루키아 장군 바르마에게 패배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나중에 1189년에 복수를 했다.[53]

찰루키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소메슈바라 4세의 전반적인 노력은 실패했고, 왕조는 소메슈바라 4세를 1189년 바나바시로 망명시킨 세우나 통치자들에 의해 끝났다. 찰루키아가 멸망한 후, 1191년에 세우나 왕조와 호이살라는 크리슈나강 지역을 놓고 계속 전쟁을 벌였고, 서로 다른 시점에서 서로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54] 이 시기에는 서부 데칸의 찰루키아와 타밀라캄의 촐라 두 제국이 멸망했다. 이 두 제국의 폐허 위에 그들의 봉신 왕국들이 세워졌고, 그들의 상호 적대감은 데칸 역사의 연보를 100년 이상 채웠고, 판디아는 촐라 제국의 일부 지역을 지배했다.[55]

각주[편집]

  1. Quote:"Vikramaditya VI led an expedition against the Cholas in c. 1085 and captured Kanchi and held it for some years. Vikramaditya VI succeeded in conquering major parts of Vengi Kingdom in 1088. Kollipakei-7000, a province of Vengi was under his control for long after this. Vengi was under his control from c. 1093 to 1099 and though it was recaptured by the Cholas in 1099, he reconquered it in c. 1118 and held it till 1124" (Kamath 2001, p105). Vikramaditya VI successfully subdued the Hoysalas, the Silharas of Konkan, the Kadambas of Goa, the Pandyas of Uchangi, the Seuna of Devagiri, the Kakatiya of Warangal, the Chaulukyas of Gujarat, the Chedi of Ratnapur and the rulers of the Malwa territories south of the Narmada river (Kamath 2001, p105)
  2. Quote:"About AD 1118 Vikramaditya's diplomatic and military skill enabled the Western Chalukyas to end Chola ascendancy on Vengi and bring that province back within the sphere of influence of Kalyani"(Chopra 2003, p139, part1)
  3. Quote:"From about 1118 to the end of Vikramaditya's reign, and for some years thereafter, the Chola power seized to exist in Vengi" (Sen 1999, p387)
  4. B.P. Sinha in George E. Somers, Dynastic History Of Magadha, p.214, Abhinav Publications, 1977, New Delhi, ISBN 81-7017-059-1
  5. Sen (1999), p282
  6. Majumdar, R. C. (1977), Ancient India,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p320, New Delhi, ISBN 81-208-0436-8
  7. Pollock (2006), pp. 288–289, 332
  8. Houben(1996), p. 215
  9. Kamath (2001), pp10–12, p100
  10. Sastry, Shama; Rao, N. Lakshminarayana. “Kannada inscriptions”.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South Indian inscriptions, Saturday, November 18, 2006》. What Is India Publishers (P) Ltd. 2006년 12월 28일에 확인함. 
  11. The province of Tardavadi, lying in the very heart of the Rashtrakuta empire, was given to Tailapa II as a fief (provincial grant) by Rashtrakuta Krishna III for services rendered in war (Sastri 1955, p162)
  12. Kamath (2001), p101
  13. Kings of the Chalukya line of Vemulavada, who were certainly from the Badami Chalukya family line used the title "Malla" which is often used by the Western Chalukyas. Names such as "Satyashraya" which were used by the Badami Chalukya are also name of a Western Chalukya king, (Gopal B.R. in Kamath 2001, p100)
  14. Unlike the Badami Chalukyas, the Kalyani Chalukyas did not claim to be Harithiputhras of Manavysya gotra in lineage. The use of titles like Tribhuvanamalla marked them of as a distinct line (Fleet, Bhandarkar and Altekar in Kamath 2001, p100)
  15. Moraes (1931), pp88-93
  16. Later legends and tradition hailed Tailapa as an incarnation of the God Krishna who fought 108 battles against the race of Ratta (Rashtrakuta) and captured 88 fortresses from them (Sastri 1955, p162)
  17. According to a 973 inscription, Tailapa II helped by Kadambas of Hangal, destroyed the Rattas (Rashtrakutas), killed the valiant Munja (of the Paramara kingdom), took the head of Panchala (Ganga dynasty) and restored the royal dignity of the Chalukyas (Moraes 1931, pp 93–94)
  18. Sastri (1955), p164
  19. A minor capital of Jayasimha II (Cousens 1926, p10, p105)
  20. Sen (1999), p383
  21. Jayasimha's choice was Vijayaditya VII while the Cholas sought to place Rajaraja Narendra, son-in-law of Rajendra Chola I (Kamath 2001, p102
  22. Quote:"Beautified it so that it surpassed all the other cities of the earth" (Cousens 1926, p10)
  23. Sen (1999), p384
  24. Ganguli in Kamath 2001, p103
  25. Sastri (1955), p166
  26. Someshvara I supported the cause of Shaktivarman II, son of Vijayaditya II while the Cholas preferred Rajendra, son of the previous king Rajaraja Narendra (Kamath 2001, p103)
  27. Sastri (1955), p169
  28. Kamath (2001), p104
  29. Sastri (1955), p170
  30. Cousens (1926), pp10–11
  31. Sastri 1955, p172
  32. Eulogising Vikramaditya VI, Kashmiri poet Bilhana wrote in his Vikramanakadeva Charita that lord Shiva himself advised Chalukya Vikramaditya VI to replace his elder brother from the throne (Thapar 2003, p468)
  33. Vikramaditya VI abolished the saka era and established the Vikrama-varsha (Vikrama era). Most Chalukya inscriptions thereafter are dated to this new era (Cousens 1926, p11)
  34. Vikramaditya's rule is mentioned as an era (samvat) along with Satavahana Vikrama era 58 BCE, Shaka era, of 78 CE, Harshavardhana era of 606 CE (Thapar, 2003, pp 468–469)
  35. Sen (1999), p386
  36. Quote:"From 1118, Ananthapala, Vikramaditya VI's famous general is described as the ruler of Vengi, other Chalukyan commanders are found established in other parts of Telugu country and the Chola power practically disappears for a number of years thereafter. Thus Kulotunga sustained another curtailment of his empire which by the end of his reign was practically confined to Tamil country and a relatively small area of the adjoining Telugu districts".(Sastri 1955, p175)
  37. Vijnyaneshavara, his court scholar in Sanskrit, wrote of him as a king like none other (Kamath 2001, p106)
  38. Cousens (1926), p12
  39. Bilhana called the reign "Rama Rajya" in his writing that consisted of 18 cantos. The last canto of this work is about the life of author himself who writes that the work was composed by him in gratitude for the great honor bestowed upon him by the ruler of Karnata (Sastri 1955, p315)
  40. Bilhana was made Vidyapati (chief pandit) by the king (Cousens 1926, p12)
  41. No other king prior to the Vijayanagara rulers have left behind so many records as Vikramaditya VI (Kamath 2001, p105)
  42. Sen (1999), p387
  43. Their feudatories, Hoysalas of Mysore region, Kakatiyas of Warangal, Seunas of Devagiri and the Pandyas of Madurai wasted no time in seizing the opportunity, (Sastri 1955,p158)
  44. Sastri (1955), p176
  45. Sen (1999), p388
  46. Kamath (2001), p107
  47. Kamath (2001), p108
  48. Cousens (1926), p13
  49. From the Minajagi record of 1184 (Kamath 2001, p109)
  50. A Kalachuri commander called Barmideva or Brahma is known to have given support to the Chalukyas (Sastri 1955, p179–180)
  51. Kamath (2001), p127
  52. Sen (1999), pp388-389
  53. Sastri (1955), p180
  54. Sastri (1955), p192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