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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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 緣故空洞化政策)이란 한국프로축구연맹대한민국 당시 김영삼 정권이 K리그 1996년 시즌에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과 맞물려 서울 축구전용구장 건설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시행한 강압적인 정책으로서 당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던 일화 천마 (현 성남 FC), LG 치타스 (현 FC 서울),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 등 3개 프로축구단들의 서울 연고지를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서울 연고권을 공동화(空洞化)시킨 정책을 말한다. 1987년과 1988년 당시 프로축구위원회는 2년 동안 서울 연고권을 공동화(空洞化) 시키고 공동관리지역으로 운영했었는데[1] 흔히 서울 공동화 정책이라고도 부를 때는 1996년도 정책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서울 공동화 정책 혹은 서울 연고지 공동화 정책, 서울 연고권 공동화 정책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며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지칭한다.[2]

1993년 이전의 서울 연고권 상황[편집]

한국 프로축구가 1983년 수퍼리그로 출범 당시 원년 서울 연고 구단 1호는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로 당시 광역지역연고제에 따라 서울+인천+경기를 연고를 공동 연고지로 하였다 그 후 1984년 럭키금성 황소 (현 FC 서울)가 리그에 합류하면서 서울 연고지를 요구하였으나[3] 당시 몇개 안 되는 구단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커버해야 하는 당시 연고지 정책에 따라 서울 연고 복수팀 제안은 거부되고 충청도로 배정이 되었으며 같이 합류했던 현대 호랑이 (현 울산 현대)가 인천+경기 연고권을 배정받으면서 유공은 서울 단독 연고권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프로축구는 명목상 모든 구단들이 연고지가 배정이 되긴 했지만 체육부의 규제로 인해[4] 자신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고 상대 클럽의 연고지를 방문해서 원정 경기를 치르는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이 아니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마산, 청주, 강릉 등 전국 여러 도시들을 모든 클럽들이 방문하여 한 경기장에서 해당 라운드 경기들을 모두 소화하는 전국 순회 방식이었다.

1987년 체육부의 규제가 풀리고나서야 실제로 홈앤드 어웨이제로 리그 방식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5][6] 이때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유공이 서울 연고 구단에서 다시 인천+경기 연고권이 되면서 1차 서울 연고 공동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일단 1988년에 현대 호랑이 구단을 중심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7] 1989년 프로축구 참가를 목표로 일화 천마 (현 성남 FC)가 호남 지역 연고 구단으로 출범하려다 호남지역에서의 반발로 인해 서울 연고로 급히 방향을 선회하게 되면서[8][9] 최초로 서울을 단독 연고지로 하는 구단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1988년 초부터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해온 두 구단 중[10] 럭키금성이 1990년, 그리고 슈퍼리그 원년 서울 연고 구단이었던 유공이 1991년, 이렇게 당시 기존 구단들이 다시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 3개 구단 시대가 시작 되었다.

  • 1991시즌 리그 참가 클럽과 연고지 현황
클럽 연고지 비고
일화 천마
서울
서울 도시 연고로 리그 참가(1989)
포항제철 아톰즈
포항
대구+경북 ▶ 포항(1990 / 1988)
대우 로얄즈
부산
부산+경남 ▶ 부산(1990 / 1989)
현대 호랑이
울산
강원 ▶ 울산(1990)
럭키금성 황소
충청
충청 ▶ 서울(1990)
유공 코끼리
서울
인천+경기▶ 서울(1991)

계기[편집]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을 계기로 2002년 월드컵 유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국내 프로 축구를 활성화시키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프로 축구가 출범한지 10년이 지났지만 6개팀만이 프로 축구단으로 존재할뿐 1993년 출범한 일본 J리그에 참가하는 10개팀에도 못 미치는데다 지역 연고제가 완벽히 뿌리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그에 참여하는 6개팀 중 절반이 서울에 위치하고 나머지 팀들은 영남지역에 몰려있어 다른 지역에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여 축구 열기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대한축구협회와 1994년 7월 30일 별도 조직으로 출범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993년 말부터 대기업인 삼성과 금호에 대구 경북과 광주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축구단 창단을 적극 권유하는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11]

이러한 움직임은 1995년 전북 다이노스, 전남 드래곤즈의 리그 참가와 1995년 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으로 리그 참가가 가시화되면서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인천대전, 대구광주 등의 대도시는 여전히 비어있었고 서울에만 세 팀이 존재하는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 1995 시즌 당시 K리그 참가 구단과 연고지 현황
지역 연고지 구단
수도권
서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영남권
포항
포항 아톰즈
부산
대우 로얄즈
울산
현대 호랑이
호남권
전북
전북 다이노스
전남
전남 드래곤즈

그 와중에 옆나라 일본의 J리그가 프로야구단이 선점하고 있던 도쿄 등의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 연고지를 두고, 수도인 도쿄에는 국립이라 특정 구단의 소유가 될 수 없던 도쿄 국립 경기장을 중립지역으로 두고 돌아가며 중립 경기를 열며, 기업명을 배제하고 기존 기업구단의 한계에서 벗어나 지역과 구단이 밀착하여 움직이는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의 축구문화를 지향하는 클럽 시스템을 추구하면서 당시 한국처럼 프로야구가 지배하던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를 위협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한국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12]

이에 자극받은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기존 서울 연고 클럽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의 연고지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서울은 공동화 구역으로 모든 클럽들이 중립 경기를 개최하며 기업명+연고지역명으로 클럽 명칭을 변경하여 기존의 지역연고제를 보완하여 완전하게 정착시킨다는 복안으로 구단 완전 지역연고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13]

중소도시 연고지 정책과 J리그와의 연관성[편집]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설명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이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중소도시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 이른바 프로야구가 연고지로 삼고있는 대도시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프로야구를 피해 중소도시를 연고지로 재편한 사건인데[14]이런 중소도시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에 배경에는 1993년 J리그의 연고지 정책과 강한 연관성을 지울 수가 없다. 1993년 J리그 출범시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하고 전구단이 공동으로 돌아가면서 중립경기를 펼치는 방식으로 출범하였는데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일본 프로스포츠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축구단 (현 도쿄 베르디)의 당시 구단주였던 와타나베 쓰네오를 비롯한 수뇌부가 일본 프로야구처럼 구단들이 기업명을 사용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같이 요미우리 축구단 역시 일본 최대 시장인 도쿄 연고지를 발판으로 J리그의 전국구 인기 구단으로 만들고자 하면서 반대로 당시 J리그 연맹 회장이었던 가와부치 사부로를 비롯한 수뇌부가 가진 한 두개의 전국구 구단의 과도한 인기에 의존하기보다는 모든 구단들이 지역 밀착에 의거해 평등 구조로 리그를 운영하려던 이념 사이에 생긴 갈등과[15][16] 또한 요미우리 축구단 (현 도쿄 베르디) 이외에도 미쓰비시 중공업 축구단 (현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을 비롯 여러 구단들이 도쿄 연고지를 원했기 때문이다.[17]한편 요미우리 축구단 (당시 명칭 베르디 가와사키)은 1993년과 1994년 리그 제패 이후 당시 인기를 뒤에 엎고 가와사키에서 도쿄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였지만 도쿄 연고지 구단에 인기가 집중될 것을 우려한 J리그 연맹의 반대로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18]

이런 배경들과 더불어 J리그 사무국에서는 도쿄 국립 경기장을 J리그 사무국에서 특정 구단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도쿄 국립 경기장을 불허하면서 당시 도쿄 국립 경기장 이외에는 J리그 규정을 만족하는 경기장이 없던 당시 사정에 따라 사실상 도쿄 연고지가 공동화(空洞化)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J리그 출범 초창기 당시는 어찌되었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에도 1995년부터 전후기리그제와 챔피언결정전 방식으로 변경, 기존 서울 연고 구단들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의 연고지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서울을 공동 관리 지역을 두고 지방 구단 포함 2-3차레 중립 경기를 갖는 지역 연고제 도입.[19] 1998년 한국프로축구의 공식명칭 K리그로 변경, 무승부시 연장전 및 골든골제 그리고 승부차기 제도 등 J리그의 리그 운영 방식이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특히 연고지 정책과 관련해서는 프로야구가 연고지로 삼고있는 대도시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프로야구를 피해 중소도시를 연고지로 삼는 이른바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이라고 포장하였다.[20]

한편 J리그의 리그 운영 방식과 똑같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K리그 명칭 등에 관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J리그를 모방해서 도입했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과거 PC통신 축구 커뮤니티 시절부터 축구팬을 비롯 한국 축구계에 폭넓게 존재한다.[21][22]

시행[편집]

1994년 4월 대한축구협회에서 서울 동대문 운동장을 공동 연고지로 하는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의 서울 연고권의 분산을 추진중이었지만[23] 계속해서 서울 연고 구단들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난항이 계속 진행되다 1995년 2월 13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는 당시 일본과 본격적인 경쟁 상황으로 접어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를 위한 전국적인 축구 열기 확산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프로 축구의 리그 시스템을 1995년부터 전후기리그제와 챔피언결정전 방식으로 변경하고, 1996년 1월 1일부로 기존 서울 연고 클럽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연고지를 지방으로 옮겨 서울을 비워두고 모든 클럽들이 돌아가면서 2-3차례 중립 경기를 갖는 형태로 변경하여 기존 지역연고제도를 보완하고자[24] 완전 지역 연고지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축구전용구장 건립을 약속하면 서울 연고 복귀시 우선권을 준다는 단서 조항을 만들어 당시 축구계의 숙원이었던 서울의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25]

하지만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려는 기존 구단들의 반대로 계속되는 마찰을 겪으며 축구계 내부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자 1995년 연말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을 경우 1996시즌 부터 리그 참여를 금지시키는 내부 방침을 정하고 1995년 11월초 각 구단에 서울 이전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강력하게 압박하는 한편 [26]당시 김영삼 정부가 행정 개혁 목표로 삼았던 지방분권화에 부합하고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서울보다는 지방 연고 프로축구단들로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높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청와대에서 다시 한번 프로축구연맹을 통해 이들 3개 구단에 연고지 이전 지침을 내렸다.[27][28] 그리하여 연말까지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연맹의 정책에 반대하고[29]팬들의 반대 시위도 있었지만[30]결국 서울 연고 3개 구단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96년 1월 유공 코끼리는 부천,[31] 1996년 3월 일화 천마는 천안,[32]1996년 4월 마지막까지 강력히 서울 연고지 고수를 위해 강력하게 저항했던 LG 치타스가 안양으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고[33]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시행 완료되었으며[34] 결국 프로축구연맹의 성급한 의사결정과 정부시책의 산물로[35] 대한민국의 심장부이자 프로스포츠 최대 시장인 서울에서 프로축구가 6년동안 쌓아온 기득권을 스스로 완전히 포기하고 고스란히 경쟁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가 무혈선점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연고지 시장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1996년 당시 서울 인구가 1,041만여명이고 그에 반해 연고지 이전을 한 안양 59만여명, 부천 79만여명, 천안 35만여명으로 1,041만여명의 수도 서울이라는 대한민국 최대 시장을 포기하고 고작 세 도시 인구를 다 합쳐도 173만명밖에 안 되는 협소한 시장을 찾아 연고지 이전을 한 것이다. 전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연고지 이전의 이유가 대부분 연고지의 인구가 적거나 등등의 이유로 더 큰 시장을 찾아 연고지를 이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상식을 벗어났으며 덧붙여 대한민국이 일본처럼 야구가 국기(國技)인 나라가 아니고 단지 프로야구가 프로축구보다 인기가 조금 더 있었을 뿐으로 일본처럼 대도시를 피해 중소도시 중심 지역연고제로 우회 전략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최대 시장인 서울 연고지를 성급하게 포기하는 의사결정이었다.

또한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축구전용구장 건설시 서울 연고지 복귀를 허용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다시 한번 연고지 이전의 불씨를 남겨둔 불완전한 정책이었으며[36] 이로 인해 추후 서울 입성을 염두에 두고 LG 치타스와 유공 코끼리는 서울의 위성 도시안양부천으로 연고지를 정하였고 일화 천마는 천안으로 연고지를 정했는데 이는 당시 지방 축구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대의 명분에 어긋나는 연고지 선택이었다. 그리고 1996년 수원을 연고지로 하여 K리그에 참가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함께 결과적으로 다시 수도권에만 3개 구단이 집중되게 되어 서울에 3개 구단이 집중되었던 것이 고스란히 다시 수도권에만 3개 구단이 집중되는 것으로 변경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공동화 정책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일본은 도쿄도쿄국립경기장 이외에 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는 인프라 문제가 있었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강북 지역 동대문 운동장, 강남 지역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강서 지역 목동 주경기장 이렇게 프로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3개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서울내 지역별로 홈구장을 배분하는 정책을 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장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였다.

또한 안양종합경기장은 1년간 경기장 개보수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여 안양 LG 치타스는 1996 시즌 대부분의 홈경기를 계속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하였으며 부천은 아예 프로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어서 부천 SK는 1996년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목동 주경기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안 역시 야간 경기가 가능한 조명탑이 없는 종합경기장이어서 천안 일화 천마의 홈경기에서 일몰 상황 발생한 뒤에 제비뽑기로 승부를 가리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했다. 이렇게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도시들에 연고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졸속적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강행된 부분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철폐[편집]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999년 공동화 정책을 철회하고 K리그에 다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세부적으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2개 구단으로 하되 신생팀 창단을 우선으로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전구단을 상대로 신청을 받아서 2개 구단을 연고지 이전 시키고 2001년까지 2개의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정한다.[37] 그리고 이듬해 2000년 5월 12일 신생팀 창단을 우선하고 불가시 연고지 이전을 허용한다는 원칙을 이사회에 상정하여 승인[38]을 받고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기 위한 다각적으로 실사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2001년 서울 연고 신생팀을 추진했던 옥타곤 컨소시엄의 창단이 무산되면서 서울 연고팀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 후 2002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전국민적인 축구열기에 고무된 한화그룹, 금호그륩, KT, 우리은행, 신한은행등 대기업들이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 창단을 추진했지만 모두 창단을 포기한다. 그 후 계속해서 서울 연고 신생팀 창단을 위해 축구계를 비롯해서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생팀 창단을 원하는 기업을 찾지 못했으며 마지막으로 서울시가 직접 2004년 1월 15일에서 28일 신생팀 창단 희망 기업을 공개 모집 했지만[39] 실패로 끝나게 되고 다시 연고지 이전으로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로 발표하고 공모에 나선다.[40] 이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04년 2월 6일 이사회를 열고 연고지 이전으로 서울연고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기존팀의 연고지 이전을 허용한다.[38]

그리하여 이미 연고지 이전 의사를 밝힌 안양 LG 치타스와 부산 아이콘스가 경합하였고 부산 아이콘스가 도중 기권을 하여 안양 LG 치타스가 2004년 3월 11일에 열린 이사회의 승인으로[41]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으로 결정되면서 8년 만에 서울 연고 공동화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1996년 서울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연고지 이전하였던 천안 일화 천마는 2000년 성남 부천 SK는 2006년 제주로 이렇게 새로운 연고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연고지 이전을 하였다.

영향[편집]

이러한 한국 프로축구 K리그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후 한국 프로농구 KBL 역시 1997년 서울 연고지를 공동화 시키고[42]출범하였지만 역시 한계를 인정하고 2001년 6월 청주 SK 나이츠와 수원 삼성 썬더스를 서울로 연고지 이전 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또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구단의 연고지 선택에 대한 자율성을 무시하고 지방 축구를 활성화 시킨다는 명분으로 시행한 강압적인 연고지 이전이라는 전례가 나중에 다시 독으로 돌아온 것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부천으로 연고지 이전 했던 부천 SK가 다시 제주로 연고지 이전하면서 발표했던 명분은 당시 5개팀이 서울 및 수도권에 지역에 밀집되었던 불균형을 해소하고 프로축구 시장 확대 발전을 위한다는 것인데 서울 연고 시절 부천으로 강제 연고지 이전 시킬 때 서울에만 3개팀이 밀집되어 불균형으로 인해 지역연고제 정착이 어렵다는 당시 프로축구연맹이 사용했던 명분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프로축구연맹 역시 연고지 이전을 막지 못하고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K리그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전 똑같이 수도 연고 구단을 두지 않았던 J리그 역시 2000년 FC 도쿄J리그 1부 리그인 J1 승격과 J리그 출범 전 일본 실업 축구 리그인 JSL에서 도쿄를 연고지로 했다가 가와사키로 연고지를 삼았던 베르디 가와사키가 다시 2001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개장과 함께 경기장 문제가 해결되면서 도쿄로 복귀하면서 도쿄 베르디 1969로 출범을 하면서 도쿄 공동화 시대도 막을 내렸다.

과제[편집]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당시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이 3구단을 각각 강북 동대문 운동장, 강남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강서 목동운동장으로 서울 내 지역별로 홈 구장을 배분하고 각각 서울 일화 천마, 서울 LG 치타스, 서울 유공 코끼리로 구단명을 바꾸었다면 지금 서울특별시는 기존의 FC 서울 이외에 또다른 신생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2011년 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정몽규 총재 취임 공약으로 서울 제2 연고 구단 창설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향후 야구 인기를 깨기 위한 방책 중 하나로 서울에 4-5개의 서울 연고 구단 창설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43] 2015년 목표로 서울 이랜드 축구단이 2015시즌부터 K리그 챌린지를 목표로 창단을 발표하였다.

한편 2012년까지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이 되려면 신생 구단의 경우 리그가입비 10억 원, 축구발전기금 30억 원, 서울 연고 입성 권리금 75억 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적용됨) 총 115억 원 [44][45] 이라는 거액을 지불해야 했지만 2013년부터 축구발전기금은 없어지고 리그가입비만 5억원 내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서울 연고 입성 권리금은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용 구단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축구계에서 포기를 한 것인지 아직 명확하게 발표된 것은 없다.

  • 2014년 현재 서울 연고 프로스포츠 구단 현황
종목 클럽 이전 연고지 서울 입성시기 서울 입성금
프로축구 FC 서울 충청 (1984-1989)
서울 (1990-1995)
안양 (1996-2003)
1990년
0
2004년
미상
0
75억
서울 이랜드 축구단 서울 연고 신생팀 2015년 무상
프로야구 LG 트윈스 서울 연고 신생팀(MBC 청룡) 1982년 미상
두산 베어스 충청 (1982-1984)[1] 1985년 미상
넥센 히어로즈 인천+경기+강원 (1982-2007) 2008년 54억[46]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 수원 (1996-2001) 2001년 50억[47]
서울 SK 나이츠 청주 (1996-2001) 2001년 50억
프로배구 우리카드 배구단 (남자) 서울 연고 신생팀 2013년 20억[48]
서울 GS칼텍스 (여자) 인천 (2005-2009) 2009년 10억[49]

[1] 프로야구창립계획서에 따르면 서울연고 1순위는 MBC이고 2순위는 두산그룹이었고 두 기업 모두 프로야구에 찬성하였으나 충청도지방에는 할 기업이 나타나지않아 두산의 한시적 충청도 연고보장후 프로야구 출범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1. "프로축구 서울도 연고지로 개방해야", 《동아일보》, 1988년 8월 17일 작성.
  2. "한국프로축구 30년사-307페이지", 《한국프로축구연맹》, 2013년 6월 14일 작성.
  3. "럭키금성 프로축구팀 고경환 단장 인터뷰", 《매일경제신문》, 1983년 8월 19일 작성.
  4. "프로축구 활로가 안 보인다", 《경향신문》, 1986년 3월 13일 작성.
  5. "홈앤드 어웨이 확정", 《동아일보》, 1987년 1월 9일 작성.
  6. "프로축구도 홈앤드 어웨이 실시", 《매일경제》, 1987년 1월 16일 작성.
  7. "프로축구 "서울도 연고지로 개방해야"", 《동아일보》, 1988년 8월 17일 작성.
  8. ""공격축구로 바람 일으키겠다" 1일 창단 일화 프로축구팀 박종환 감독", 《동아일보》, 1988년 10월 29일 작성.
  9. "프로축구 6년, 호남팀 왜 없나", 《한겨례신문》, 1989년 5월 25일 작성.
  10. "88대표 프로무대서 비실비실", 《경향신문》, 1988년 4월 14일 작성.
  11. "호남, 경북에 프로축구팀 창단", 《경향신문》, 1993년 11월 4일 작성.
  12. "일본 프로축구 인기 폭발", 《동아일보》, 1994년 1월 20일 작성.
  13. "K리그 공식 역사 1996시즌", 《한국프로축구연맹 공식홈페이지》.
  14. "국내 프로축구 마케팅 현황 및 발전방향", 《베스트일레븐)》, 1998년 12월호 52P 작성.
  15. (1994년) J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목표로 해라! 베르디의 야망. 《J리그의 폭로 이야기》: 2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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