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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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 緣故空洞化政策)이란 한국프로축구연맹대한민국 당시 김영삼 정권이 K리그 1996년 시즌에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과 맞물려 서울 축구전용구장 건설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시행한 강압적인 정책으로서 당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던 일화 천마 (현 성남 FC), LG 치타스 (현 FC 서울),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 등 3개 프로축구단들의 서울 연고지를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전시키고 서울 연고권을 공동화(空洞化)시킨 정책을 말한다. 1987년과 1988년 당시 프로축구위원회는 2년 동안 서울 연고권을 공동화(空洞化) 시키고 공동관리지역으로 운영했었는데[1] 흔히 서울 공동화 정책이라고도 부를 때는 1996년도 정책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서울 공동화 정책, 수도 공동화 정책, 서울 연고지 공동화 정책, 서울 연고권 공동화 정책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며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지칭한다.[2]

1993년까지의 서울 연고권 상황[편집]

한국 프로축구가 1983년 수퍼리그로 출범 당시 원년 서울 연고 구단 1호는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로 당시 광역지역연고제에 따라 서울+인천+경기를 연고를 공동 연고지로 하였다 그 후 1984년 럭키금성 황소 (현 FC 서울)가 리그에 합류하면서 서울 연고지를 요구하였으나[3] 당시 몇개 안 되는 구단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커버해야 하는 당시 연고지 정책에 따라 서울 연고 복수팀 제안은 거부되고 충청도로 배정이 되었으며 같이 합류했던 현대 호랑이 (현 울산 현대)가 인천+경기 연고권을 배정받으면서 유공은 서울 단독 연고권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프로축구는 명목상 모든 구단들이 연고지가 배정이 되긴 했지만 체육부의 규제로 인해[4] 자신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고 상대 구단의 연고지를 방문해서 원정 경기를 치르는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이 아니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마산, 청주, 강릉 등 전국 여러 도시들을 모든 구단들이 방문하여 한 경기장에서 해당 라운드 경기들을 모두 소화하는 전국 순회 방식이었다.

1987년 체육부의 규제가 풀리고나서야 실제로 홈앤드 어웨이제로 리그 방식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5][6] 이때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유공이 서울 연고 구단에서 다시 인천+경기 연고권이 되면서 1차 서울 연고 공동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일단 1988년에 현대 호랑이 구단을 중심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7] 1989년 프로축구 참가를 목표로 일화 천마 (현 성남 FC)가 호남 지역 연고 구단으로 출범하려다 호남지역에서의 반발로 인해 서울 연고로 급히 방향을 선회하게 되면서[8][9] 최초로 서울을 단독 연고지로 하는 구단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1988년 초부터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해온 두 구단 중[10] 럭키금성이 1990년, 그리고 슈퍼리그 원년 서울 연고 구단이었던 유공이 1991년, 이렇게 당시 기존 구단들이 다시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 3개 구단 시대가 시작 되었다.

  • 1993시즌 리그 참가 구단과 연고지 현황
지역 연고지 구단 비고
수도권
서울
일화 천마 서울 도시 연고로 리그 참가(1989)
LG 치타스 충청 ▶ 서울(1990)
유공 코끼리 인천+경기 ▶ 서울(1991)
영남권
포항
포항 아톰즈 대구+경북 ▶ 포항(1990 / 1988)
부산
대우 로얄즈 부산+경남 ▶ 부산(1990 / 1989)
울산
현대 호랑이 강원 ▶ 울산(1990)

계기[편집]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와 지방자치제도 확대 공약을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가 1993년 2월 취임 후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 유치를 적극 추진하라고 내각에 지시하였으며 아직 공식화 단계는 아니지만 1993년 6월 1일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이 FIFA에 월드컵 유치 의사를 밝힌 서한을 다시 보내는 등 대한축구협회 주도로 대회 유치 활동이 진행중이었다.[11] 1993년 11월 1일 김영삼 대통령은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하기로 FIFA가 내정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기를 희망하는 국민적 움직임에 호응하여, 대선공약대로 민간 주도의 대회 유치 활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였으며[12] 다음날인 11월 2일 문화체육부 장관이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는 국내축구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곧 정부주도로 프로축구단 창단을 비롯한 축구발전계획을 세우겠다고 발표하며 국내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직접 개입할 것을 최초로 천명하였다.[13]

같은 해 1993년 12월 13일 대통령 재가에 따라 정부와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유치 경쟁에 공식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이듬해 1994년 3월 12일 외무부에서 작성한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지원 계획(안)"이란 당시 대외비 문서에 따르면 유치 경쟁에서 일본의 유리한 점은 J리그를 통한 축구붐 조성, 반대로 한국의 약점은 낮은 국내 축구 열기로 인한 축구붐 조성 미흡으로 평가하여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는 월드컵 개최국 선정 시점인 1996년 6월 이전 국내 프로축구 활성화로 대표되는 축구붐 조성이 시급하다는 것을 정부차원에서 다시한번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4]

이 후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축구계 역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는 국내 프로 축구를 활성화시키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프로축구가 출범한지 10년이 지났지만 6개 구단만이 프로축구단으로 존재할뿐 1993년 출범한 일본 J리그에 참가하는 10개 구단에도 못 미치는데다 지역 연고제가 완벽히 뿌리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그에 참여하는 6개 구단 중 절반이 서울에 위치하고 나머지 구단들은 영남지역에 몰려있어 다른 지역에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여 축구 열기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축구협회는 1993년 말부터 대기업인 삼성그룹금호그룹에 각각 대구 /경북광주 /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축구단 창단을 적극 권유하는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15] 1994년 3월 31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정몽준과 프로축구단 단장들 회의에서 국내 프로축구 활성화를 이를 위해 지연연고제 개선을 적극 검토하여 실시하는데 합의하였다.[16][17]

이런 노력의 결과 1995년 전북 다이노스, 전남 드래곤즈의 리그 참가와 1995년 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으로 리그 참가가 가시화되면서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등의 대도시는 여전히 비어있었고 서울에만 세 구단만이 존재하는 상황은 그대로였다.

  • 1995 시즌 당시 K리그 참가 구단과 연고지 현황
지역 연고지 구단
수도권
서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영남권
포항
포항 아톰즈
부산
대우 로얄즈
울산
현대 호랑이
호남권
전북
전북 다이노스
전남
전남 드래곤즈

한편 1990시즌부터 한 구단이 단일 도시만을 연고지로 정하고 밀착하는 도시지역연고제가 공식 도입되었고 1991시즌에는 모든 구단들의 도시지역연고제 전환이 완료되었으며 1995년까지 이 기간동안 각 구단들이 자신의 연고지에서 적극적인 지역연고정착 활동을 시행하였다.[18] 그 결과 1991시즌 관중수가 1990시즌과 비교하여 두배로 성장하는 효과를 누렸으며.[19]지역연고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20]또한 1992년에는 당시 서울을 연고지로 하던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팬확보를 위해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경기를 공동으로 집중홍보하고 3개 구단의 연간회원권을 호환성 있게 사용하는 공동마케팅을 시행하였으며[21]1993년에는 어린이팬 확보를 위해 어린이표를 신설하고 또한 호환성 있게 사용하던 3개 구단의 연간회원권을 연고 의식을 높이기 위해 주최구단의 홈경기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22]또한 다양한 팬서비스와[23]경품 제공 등을 하며 [24]서울에서 연고지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3년 옆나라 일본의 J리그가 프로야구단이 선점하고 있던 도쿄 등의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 연고지를 두고, 수도인 도쿄에는 국립이라 특정 구단의 소유가 될 수 없던 도쿄 국립 경기장을 중립지역으로 두고 돌아가며 중립 경기를 열며, 기업명을 배제하고 기존 기업구단의 한계에서 벗어나 지역과 구단이 밀착하여 움직이는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의 축구문화를 지향하는 구단 시스템을 추구하면서 당시 한국처럼 프로야구가 지배하던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를 위협할 정도로[25]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며 한국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26]

1993년 12월 프로축구 각 구단 단장들 회의에서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해 전 구단 연고지 재편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서울 연고 3구단은 유공의 원래 연고지였던 인천+경기 연고지로 이전하고 LG 치타스일화 천마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분할하며 계속해서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곁가지 의견으로 서울 연고 3구단이 전부 서울을 나가는 공동화 방식이 나왔다. 기사에 명백하게 나와있지만 서울 연고 3구단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가서 공동화 방안을 모색한 것은 절대 아니며 전 구단의 실제 연고지 재편은 정부의 보조가 있어야 할 실정이었다.[27]또한 그 후 1994년 1월달의 프로축구 관련 기사를 보면 이때는 일화, LG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어[28]1993년 12월 구단 단장 회의에서 나온 공동화 의견은 당시 출범 원년인J리그에서 흥행 성공 요소 중 하나인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 시키고 전 구단이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중립경기를 하는 방식을 벤치마킹해서 서울 연고 3구단 관계자가 아닌 타구단 관계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 정도로 볼 수 있으며 1990년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해 호남 연고 구단이 생겨야 한다고 전 구단에서 공감대를 가지고 의견 통일을 이루었지만 신생 구단 창단이 불발할 경우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김우중 회장의 대우로얄즈가 책임지고 호남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라고 했을 정도로[29]당시 연고지 이전에 관한 구단들끼리의 논의는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서울 연고 3구단이 스스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란 연고지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지방 도시로 연고지 이전을 할 확률은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중소도시 연고지 정책과 J리그와의 연관성[편집]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설명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이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중소도시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 이른바 프로야구가 연고지로 삼고있는 대도시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프로야구를 피해 중소도시를 연고지로 재편한 사건인데[30]이런 중소도시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에 배경에는 1993년 J리그의 연고지 정책과 강한 연관성을 지울 수가 없다. 1993년 J리그 출범시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하고 전구단이 공동으로 돌아가면서 중립경기를 펼치는 방식으로 출범하였는데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일본 프로스포츠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축구단 (현 도쿄 베르디)의 당시 구단주였던 와타나베 쓰네오를 비롯한 수뇌부가 일본 프로야구처럼 구단들이 기업명을 사용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같이 요미우리 축구단 역시 일본 최대 시장인 도쿄 연고지를 발판으로 J리그의 전국구 인기 구단으로 만들고자 하면서 반대로 당시 J리그 연맹 회장이었던 가와부치 사부로를 비롯한 수뇌부가 가진 한 두개의 전국구 구단의 과도한 인기에 의존하기보다는 모든 구단들이 지역 밀착에 의거해 평등 구조로 리그를 운영하려던 이념 사이에 생긴 갈등과[31][32] 또한 요미우리 축구단 (현 도쿄 베르디) 이외에도 미쓰비시 중공업 축구단 (현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을 비롯 여러 구단들이 도쿄 연고지를 원했기 때문이다.[33]한편 요미우리 축구단 (당시 명칭 베르디 가와사키)은 1993년과 1994년 리그 제패 이후 당시 인기를 뒤에 엎고 가와사키에서 도쿄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였지만 도쿄 연고지 구단에 인기가 집중될 것을 우려한 J리그 연맹의 반대로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34]

이런 배경들과 더불어 J리그 사무국에서는 도쿄 국립 경기장을 J리그 사무국에서 특정 구단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도쿄 국립 경기장을 불허하면서 당시 도쿄 국립 경기장 이외에는 J리그 규정을 만족하는 경기장이 없던 당시 사정에 따라 사실상 도쿄 연고지가 공동화(空洞化)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J리그 출범 초창기 당시는 어찌되었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35]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에도 1995년부터 전후기리그제와 챔피언결정전 방식으로 변경, 기존 서울 연고 구단들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의 연고지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서울을 공동 관리 지역을 두고 지방 구단 포함 2-3차레 중립 경기를 갖는 지역 연고제 도입.[36] 1998년 한국프로축구의 공식명칭 K리그로 변경, 무승부시 연장전 및 골든골제 그리고 승부차기 제도 등 J리그의 리그 운영 방식이 그대로 도입되었으며 특히 연고지 정책과 관련해서는 프로야구가 연고지로 삼고있는 대도시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프로야구를 피해 중소도시를 연고지로 삼는 이른바 연고지 틈새시장 전략이라고 포장하였다.[37]

또한 당시 김영삼 정부는 집권 당시 공약인 지방자치제도 확대를 실현키 위해 스포츠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 경쟁국이기도 했던 이웃한 일본은 김영삼 정부가 벤치마킹하기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와는 별 관련이 없는 내무부 (현 안전행정부)에서도 일본의 자치단체가 축구 J리그, 월드컵 등 스포츠 이벤트 행사를 통해 얻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면밀히 분석하여 스포츠를 통한 지역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만든 등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과 관련하여 정부 차원에서 일본의 사례 특히 J리그를 벤치마킹했다고 보여지는 정황을 찾을 수 있다.[38]

특히 J리그 원년인 1993년과 이듬해 1994년의 인기 원인이 도쿄 연고지는 공동화 시키고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전 구단이 중립경기를 펼치고 지방 도시 위주로 연고지 재편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국 축구행정가들은 판단하였는데 당시 J리그는 일명 신장개업 효과와[39] 거물 외국인 선수들의 등장으로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 방식을 했든 아니면 도쿄 연고지 구단을 만들어서 리그를 운영했든 어떤 방식으로 했어도 인기가 있었을 거품인기 시절로 1995년 중반이후 거품인기가 걷히며 그 인기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던 실정이었다.[40]쉽게 말해 본질을 못 보고 당시 현상만 보고 판단하여 일본 J리그처럼 서울 연고 구단들이 아예 없어지고 지방 연고지 구단으로 재편되어야 국내 축구가 활성화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한국 축구계에 팽배하였는데 이는 현재도 일본 J리그에서 지역밀착 방식이 관중증대 요인이라고 자랑하자 일본에까지 직접 J리그 지역밀착 사례를 벤치마킹하러 단체로 견학가는 한국 축구행정가들처럼 당시에도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고 하면 왜 인기가 있는지 본질을 파악 못 하고 눈에 보이는 제도나 방식만을 그대로 답습하고 한국 프로축구 고유의 실정에 맞게 변형해서 도입할 능력이 없었던 당시 한국 축구계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였다.[41]

결국 이렇게 J리그의 리그 운영 방식과 똑같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K리그 명칭 등에 관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J리그를 모방해서 도입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과거 PC 통신 축구 커뮤니티 시절부터 현재까지 축구팬을 비롯 한국 축구계에 폭넓게 존재한다.[42][43]

시행[편집]

1994년 초 대한축구협회에서 (1994년 7월 30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출범 전에는 대한축구협회에서 프로축구 관장) 서울 동대문 운동장을 공동 연고지로 하는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의 서울 연고권 분산을 새롭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44]한편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1994년 7월 13일 문화체육부가 직접 프로축구의 지역연고제 개선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45] 이에 발맞추어 대한축구협회는 서울 연고지 재조정을 직접적으로 발표하며 기존 추진중이던 공동화 방안과 서울 연고 3구단들을 서울 지역내에서 강남과 강북으로 분할하는 두 가지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며 서울 연고지 재조정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한다[46]그 후 서울 연고지 공동화 방안으로 골자가 잡히고 1994년 12월 20일 연맹 이사회에서 서울 연고 3구단이 타지방으로 이전에 합의를 안 할 경우 강제로 연고도시를 배정하고 구단의 의사와 관계없이 1995 시즌을 강행할 계획을 천명하였다.[47]

하지만 서울 연고 3구단은 서울 잔류 의지를 표명하며 동대문운동장을 세 구단이 같이 사용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 지역내에서 강북 지역 동대문운동장, 강남 지역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강서 지역 목동운동장이렇게 세 지역으로 분산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상정하여 이사회에서 공동화 결의를 저지한다.[48][49] 그러나 프로축구연맹은 1994년 12월 20일 이사회 이후 서울 연고 구단들을 계속 이전시켜 공동화 시킬 계획을 추진하여 다음 이사회 때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 사이 특히 LG 치타스의 반대로[50]서울 연고 3구단의 공동화 결의에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여러 차례 결렬되어 시즌 개막 한달 전인 1995년 2월 13일 이사회까지 연기되었다.

2002 FIFA 월드컵 개최국 발표해인 1996 시즌에는 시행되어 당시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국내 축구 열기를 돋우기 위해 더 이상 연기할 여유가 없어진 연맹 이사회는 서울 연고 3구단과 공동화 결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투표를 통한 다수결로 눌러버려서라도 받아내기로 결정한다.[51]

결국 1995년 2월 13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는 당시 일본과 본격적인 경쟁 상황으로 접어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를 위한 전국적인 축구 열기 확산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서울 연고 3구단의 구단 의사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공동화 결의에 성공하여 1996년 1월 1일부로 기존 서울 연고 구단인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연고지를 지방으로 옮겨 서울을 비워두고[52] 모든 구단들이 돌아가면서 2-3차례 중립 경기를 갖는 형태로 변경하면서 기존 지역연고제도를 보완시킨[53] 완전 지역 연고지 제도를 시행하기로 확정하였다.

또한 축구전용구장 건립을 약속하면 서울 연고 복귀시 우선권을 준다는 단서 조항을 만들어 당시 축구계의 숙원이었던 서울의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려는 기존 구단들의 반대로 계속되는 마찰을 겪었으며날 특히 1995년 10월 이사회에서 유공 코끼리 이계원 단장이 서울 연고지에서내보낼 경우 구단 해체까지 불사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등[54] 축구계 내부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1995년 연말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을 경우 1996시즌 부터 리그 참여를 금지시키는 내부 방침을 정하고 1995년 11월초 각 구단에 서울 이전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강력하게 압박하는 한편[55] 당시 김영삼 정부가 행정 개혁 목표로 삼았던 지방분권화에 부합하고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서울보다는 지방 연고 프로축구단들로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높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청와대에서 다시 한번 프로축구연맹을 통해 이들 3개 구단에 연고지 이전 지침을 내렸다.[56][57] [58] 그리하여 연말까지 서울 연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연맹의 정책에 반대하고[59]팬들의 반대 시위도 있었지만[60]결국 서울 연고 3개 구단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96년 1월 유공 코끼리는 부천,[61] 1996년 3월 일화 천마는 천안,[62]1996년 4월 마지막까지 서울 연고지 고수를 위해 강력하게 저항했던 LG 치타스가 안양으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면서[63][64]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강제 시행 완료되었으며[65][66] 결국 프로축구연맹의 성급한 의사결정과 정부시책의 산물로[67] 대한민국의 심장부이자 프로스포츠 최대 시장인 서울에서 프로축구가 6년동안 쌓아온 기득권을 스스로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 되었다.

연고지 시장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1996년 당시 서울 인구가 1,041만여명이고 그에 반해 연고지 이전을 한 안양 59만여명, 부천 79만여명, 천안 35만여명으로 1,041만여명의 수도 서울이라는 대한민국 최대 시장을 포기하고 고작 세 도시 인구를 다 합쳐도 173만명밖에 안 되는 협소한 시장을 찾아 연고지 이전을 한 것이다. 전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연고지 이전의 이유가 대부분 연고지의 인구가 적거나 등등의 이유로 더 큰 시장을 찾아 연고지를 이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상식을 벗어났으며 덧붙여 대한민국이 일본처럼 야구가 국기(國技)인 나라가 아니고 단지 프로야구가 프로축구보다 인기가 조금 더 있었을 뿐으로 일본처럼 대도시를 피해 중소도시 중심 지역연고제로 우회 전략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최대 시장인 서울 연고지를 성급하게 포기하는 의사결정이었다.

또한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축구전용구장 건설시 서울 연고지 복귀를 허용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다시 한번 연고지 이전의 불씨를 남겨둔 불완전한 정책이었으며 이로 인해 추후 서울 입성을 염두에 두고 LG 치타스와 유공 코끼리는 서울의 위성 도시안양부천으로 연고지를 정하였고 일화 천마는 천안으로 연고지를 정했는데 이는 당시 지방 축구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대의 명분에 어긋나는 연고지 선택이었다. 그리고 1996년 수원을 연고지로 하여 K리그에 참가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함께 결과적으로 다시 수도권에만 3개 구단이 집중되게 되어 서울에 3개 구단이 집중되었던 것이 고스란히 다시 수도권에만 3개 구단이 집중되는 것으로 변경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공동화 정책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일본은 도쿄도쿄국립경기장 이외에 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는 인프라 문제가 있었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강북 지역 동대문운동장, 강남 지역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강서 지역 목동주경기장 이와 같이 프로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3개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서울내 지역별로 홈구장을 배분하는 정책을 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1993년 12월에는 LG 치타스, 일화 천마의 두 구단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연고지 설정하는 방안이 이미 각 구단 단장들 사이에 나오기도 하였으며[68]또한 1994년 프로축구연맹 출범 전 대한축구협회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동화 방안 대신 서울 연고 3구단을 강남과 강북 이렇게 서울 내에서 분할하는 방안과 다각적으로 검토를 하기도 하였으며[69]결정적으로 서울 연고 3구단의 서울 공동화 결의를 타결시킬 예정이었던 1994년 12월 이사회에는 실제로 강남, 강북, 강서 이렇게 세 지역으로 분할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상정되며 공동화 결의가 무산되기도 하였다.[70]이렇게 서울 연고지가 공동화가 안 될 기회도 충분히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엄청난 장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공동화가 단행되었으며 현재 다시 서울 내에 4~5개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71]

또한 안양종합경기장은 1년간 경기장 개보수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여 안양 LG 치타스는 1996 시즌 대부분의 홈경기를 계속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하였으며 부천은 아예 프로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어서 부천 SK는 1996년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목동주경기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안 역시 야간 경기가 가능한 조명탑이 없는 종합경기장이어서 천안 일화 천마의 홈경기에서 일몰 상황 발생한 뒤에 제비뽑기로 승부를 가리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했다. 이처럼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도시들에 연고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졸속적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강행된 부분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주요 사건 일지[편집]

일시 사건
1994년 4월 대한축구협회 서울 연고권 공동화 추진 중[72]
1994년 7월 4일 문화체육부 프로축구 지역연고제 개선 계획 발표[73]
1994년 7월 대한축구협회 서울 연고지 재조정 목표 발표
서울 연고 3구단 공동화 방안과 기존 구단들을 서울 지역내에서 분할하는 두 가지 방안 다각적 검토[74]
1994년 12월 16일 연맹이사회 공동화 결의 강압적으로 해결 천명
연맹이사회 4일전 서울 연고팀들이 이전에 합의를 안 할 경우
강제로 연고도시를 배정하고 구단의 의사와 관계없이
1995 시즌을 강행할 계획 발표[75]
1994년 12월 20일 공동화 결의를 서울 지역 내 분할 방식을 대안으로 상정하여 저지
강북 지역 동대문운동장, 강남 지역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강서 지역 목동주경기장
이렇게 서울 지역을 3구단이 분할하여 연고지로 삼은 방안 상정[76]
1995년 1월 1월 현재 공동화 결의 타결 불투명 (LG 치타스 반대가 심함)[77]
1995년 2월 13일 연맹이사회 공동화 결의 산고 끝 타결[78]
연맹이사회 전 김기복 사무총창은 투표를 통해서라도 통과시키겠다고 공지
1995년 9월 10일 연맹이사회에서 유공 단장 서울 잔류 실패시
구단해체 불사 거론하며 공동화 극렬 반대[79]
1995년 11월 초 청와대 강제 이전지침 발동으로 강력 압박 [80][81]
1995년 11월 초 연맹 리그참허 불허 공지로 강력 압박[82]
1995년 12월 연고지 이전 준비도 하지만 여전히 잔류 모색[83]
1996년 1월 4일 유공 코끼리 부천으로 연고지 이전 확정[84]
1996년 3월 29일 일화 천마 천안으로 연고지 이전 확정[85]
1996년 4월 27일 LG 치타스 안양으로 연고지 이전 확정[86]

철폐[편집]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K리그가 중소도시 연고지 위주로 재편되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 서울에 다시 연고 구단을 만들고 대구, 광주 이런 지역색이 강한 대도시 위주로 프로축구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87][88][89]또한 1998년 11월에 있었던 한국프로축구연맹 주최의 프로축구 발전을 위한 공청회에서도 최대 빅마켓인 서울에서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한 대책수립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연맹 사무총장은 1999년부터 서울 연고지에서 중립경기를 늘이겠다는 답변으로 무마하였다.[90]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999년 10월 앞으로 서울 연고지 공동화 정책을 철회하고 다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세부적으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2개 구단으로 하되 신생팀 창단을 우선으로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기존 구단을 상대로 신청을 받아서 2개 구단을 연고지 이전 시키고 2001년까지 2개의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확정한다.[91] 이듬해 2000년 5월 12일 연맹 이사회에서 서울 연고 구단은 신생 구단 창단을 우선하고 불가시 연고지 이전을 허용한다는 원칙을 상정하여 승인받고[92]받고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만들기 위한 다각적으로 실사작업에 착수한다.

이런 연맹의 공동화 정책 철폐 움직임과 함께 정책으로 인해 서울에서 지방으로 강제 이전했던 구단들이 다시 서울 연고지 복귀에 관심을 나타내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특히 안양 LG 치타스의 움직임이 적극적이었다. 성남 일화 천마의 성남시의 연고지 계약 불허 파문과 관련된 KBS 추적 60분 프로그램의 2001년 3월 25일 방송분의 성남시 축구협회장의 인터뷰를 보면 자신한테 1999년 9월에 당시 부천 SK 강성길 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안양 LG가 앞으로 상암구장 사용을 신청하니 우리 부천 SK도 서울 상암구장 사용 신청을 안 할수가 없다는 발언을 하였으며[93][94] 2000년 4월 당시 안양 LG 치타스 사무국장이 서울 연고지 가치평사 설명회에 참석하였으며 [95] 2000년 6월 당시 안양 LG 치타스 단장이었던 최종준 단장은 연맹에서 기존 구단의 서울 입성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입장은 아니니 서울 연고지 복귀를 가능성을 두고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96]

한편 2001년 서울 연고 신생팀을 추진했던 옥타곤 컨소시엄의 창단이 끝내 무산되면서 서울 연고팀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 후 2002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전국민적인 축구열기에 고무된 한화그룹, 금호그륩, KT, 우리은행, 신한은행등 대기업들이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 창단을 추진했지만 모두 창단을 포기한다. 그 후 계속해서 서울 연고 신생팀 창단을 위해 축구계를 비롯해서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생팀 창단을 원하는 기업을 찾지 못했으며 마지막으로 서울시가 직접 2004년 1월 15일에서 28일 신생팀 창단 희망 기업을 공개 모집 했지만[97]실패로 끝나게 되고 다시 기존 구단의 연고지 이전으로 서울 연고 구단을 만들기로 발표하고 공모에 나선다.[98] 이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04년 2월 6일 이사회를 열고 연고지 이전으로 서울연고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기존 구단의 연고지 이전을 허용한다.[92] 그리하여 이미 연고지 이전 의사를 밝힌 안양 LG 치타스와 부산 아이콘스가 경합하였고 부산 아이콘스가 도중 기권을 하여 안양 LG 치타스가 2004년 3월 11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 승인으로[99]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으로 결정되면서 8년 만에 서울 연고 공동화(空洞化)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덧붙여 1996년 서울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연고지 이전하였던 천안 일화 천마는 2000년 성남 부천 SK는 2006년 제주로 이렇게 새로운 연고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연고지 이전을 하였다.

영향[편집]

이러한 한국 프로축구 K리그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후 한국 프로농구 KBL 역시 1997년 서울 연고지를 공동화 시키고[100]출범하였지만 역시 한계를 인정하고 2001년 6월 청주 SK 나이츠수원 삼성 썬더스를 서울로 연고지 이전 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또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구단의 연고지 선택에 대한 자율성을 무시하고 지방 축구를 활성화 시킨다는 명분으로 시행한 강압적인 연고지 이전이라는 전례가 나중에 다시 독으로 돌아온 것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부천으로 연고지 이전 했던 부천 SK가 다시 제주로 연고지 이전하면서 발표했던 명분은 당시 5개팀이 서울 및 수도권에 지역에 밀집되었던 불균형을 해소하고 프로축구 시장 확대 발전을 위한다는 것인데 서울 연고 시절 부천으로 강제 연고지 이전 시킬 때 서울에만 3개팀이 밀집되어 불균형으로 인해 지역연고제 정착이 어렵다는 당시 프로축구연맹이 사용했던 명분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프로축구연맹 역시 연고지 이전을 막지 못하고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K리그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전 똑같이 수도 연고 구단을 두지 않았던 J리그 역시 2000년 FC 도쿄J리그 1부 리그인 J리그 디비전 1 승격과 J리그 출범 전 일본 실업 축구 리그인 JSL에서 도쿄를 연고지로 했다가 J리그가 출범하면서 가와사키로 연고지를 삼았던 베르디 가와사키가 다시 2001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개장과 함께 도쿄로 복귀하며 도쿄 베르디 1969로 출범하면서 도쿄 공동화(空洞化) 시대도 막을 내렸다.

과제[편집]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실제로 1994년 12월 이사회에서 공동화 정책의 대안으로 고려되었던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이 3구단을 각각 강북 동대문 운동장, 강남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강서 목동운동장으로 서울 내 지역별로 홈 구장을 배분하고 각각 서울 일화 천마, 서울 LG 치타스, 서울 유공 코끼리로 구단명만 바꾸었다면[101]아니면 1993년 각 구단 단장들 회의에서 나왔던 방안처럼 LG 치타스와 LG 치타스일화 천마 두 구단으로 서울 강남북 더비를 구현하였다면[102]1994년 7월 대한축구협회에서 서울 연고 공동화 방안과 서울 연고 3구단을 서울 내 강남과 강북으로 재조정하는 방안 이렇게 2가지 방안 중 서울 연고 구단들을 그대로 두고 서울 내에서 지역적으로 재조정하였다면[103]FC 서울과 신생 프로축구단 서울 이랜드와의 서울 강남북 더비처럼 서울 지역 연고 구단들의 서울 더비를 1990년대 후반에는 충분히 볼 수 있었을 것으며 K리그의 역사는 현재와 사뭇 달랐을 것이다.

2011년 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정몽규 총재 취임 공약으로 서울 제2 연고 구단 창설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향후 야구 인기를 따라잡기 위한 핵심 방책 중 하나로 서울에 4-5개의 서울 연고 구단 창설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104] 2015년 목표로 서울 이랜드 축구단이 2015시즌부터 K리그 챌린지를 목표로 창단을 발표하였다.

한편 2012년까지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이 되려면 신생 구단의 경우 리그가입비 10억 원, 축구발전기금 30억 원, 서울 연고 입성 권리금 75억 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적용됨) 총 115억 원 [105][106] 이라는 거액을 지불해야 했지만 2013년부터 축구발전기금은 없어지고 리그가입비만 5억원 내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서울 연고 입성 권리금은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용 구단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축구계에서 포기를 한 것인지 아직 명확하게 발표된 것은 없다.

  • 2014년 현재 서울 연고 프로스포츠 구단 현황
종목 구단 이전 연고지 서울 입성시기 서울 입성금 비고
프로축구 FC 서울 충청 (1984-1989)
서울 (1990-1995)
안양 (1996-2003)
1990년
0
2004년
미상
0
75억
서울 이랜드 축구단 서울 연고 신생팀 2015년 무상
프로야구 LG 트윈스 서울 연고 신생팀
(1982년 MBC 청룡으로 출범)
1982년 미상
두산 베어스 충청 (1982-1984)[1] 1985년 미상
넥센 히어로즈 서울 연고 신생팀[2] 2008년 54억[107]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 수원 (1996-2001) 2001년 50억[108]
서울 SK 나이츠 청주 (1996-2001) 2001년 50억
프로배구 우리카드 한새 (남자) 서울 연고 신생팀[3] 2013년 20억[109] 서울 장충체육관 리모델링으로
2013-14 시즌 아산
임시 연고지로 하여 출범
GS칼텍스 서울 KIXX (여자) 인천 (2005-2009) 2009년 10억[110] 서울 장충체육관 리모델링으로
2012-13 시즌 구미, 2013-14 시즌 평택
임시 연고지로 사용

[1]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에 따르면 서울연고 1순위는 MBC이고 2순위는 두산그룹이었고 두 기업 모두 프로야구에 찬성하였으나 충청도지방에는 할 기업이 나타나지않아 두산의 한시적 충청도 연고보장후 프로야구 출범
[2] 넥센 히어로즈는 공식적으로는 2008년 창단한 신생 구단으로 과거 인천+경기+강원을 연고지로 출범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현대 유니콘스까지 전신구단과는 별개의 구단으로 역사와 기록을 승계하지 않는다.
[3] 우리카드 한새는 공식적으로는 2013년 창단한 신생 구단으로 과거 서울 연고지로 출범했던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부터 서울 러시앤캐시 드림식스까지 전신구단과는 별개의 구단으로 역사와 기록을 승계하지 않는다.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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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국프로축구 30년사-307페이지", 《한국프로축구연맹》, 2013년 6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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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프로축구 활로가 안 보인다", 《경향신문》, 1986년 3월 13일 작성.
  5. "홈앤드 어웨이 확정", 《동아일보》, 1987년 1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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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프로축구 "서울도 연고지로 개방해야"", 《동아일보》, 1988년 8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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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993년 출범한 J리그처럼 구단명칭을 기업명칭 대신 지역연고지명을 변경하는 문제점 그 외에 서울에만 3개 구단이 밀집하여 동대문운동장 하나만을 사용하는 문제점 등에 지역연고제 개선을 위한 여러 현안에 대해 구체적 정해진 개선 방안 없이 앞으로 검토해서 개선해 나간다는 것에 대해 거시적으로 합의했다는 의미 정도로 볼 수 있다.
  18. "팬없는 경기는 싫다. 6개구단 홍보전쟁 선언", 《동아일보》, 1991년 3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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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프로축구 서울3구단 팬확보 공동홍보 합의", 《동아일보》, 1992년 3월 10일 작성.
  22. "프로축구소식-서울팀, 어린이표 신설", 《연합뉴스》, 1992년 12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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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프로축구 지역연고 먼길인가", 《한겨레신문》, 1995년 11월 9일 작성.
  56. "일화 유공 LG, 내년에 서울연고 없어", 《월간축구 (현 베스트일레븐)》, 1995년 12월호-67페이지 작성.
  57. "'서울 한지붕 세가족' 일화, LG, 유공 내년엔 모두 서울 떠난다", 《스포츠서울》, 1995년 11월 6일 작성.
  58.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강압적인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1995년 11월의 청와대 강제 이전 지침을 자세히 되짚어 본다면 정부에서는 원래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것처럼 국내 축구 열기만 살아나면 되는 것으로 서울 연고지 공동화 방안이 아닌 서울 3구단의 의견대로 서울 지역 내 3분할을 통한 지역연고제 개선으로 축구 열기를 살릴 수도 있고 이렇게 구체적인 방안은 프로축구연맹과 해당 구단들의 협의를 통한 축구계 자율에 맡겨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서울 연고권 검토 단계 이후 실제 서울 연고 구단들의 의사는 무시한 채 무조건 서울 연고 구단을 아예 없애고 지방으로 전부 이전시켜 공동화 방안만을 일방적으로 강행할려고 했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행동은 2002 FIFA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축구계에서 당시 김영삼 정부의 행정 목포였던 지방자치 확대 정책에 도움을 주면서 빚을 갚고 정부 역시 당시 자신들의 정책을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서울 연고 공동화 방식이 더욱더 필요했기 때문에 예상외로 구단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청와대까지 직접 개입하여 프로축구 3개 구단에 관련 강제이전 지침을 내리면서 프로축구연맹에 힘을 실어 준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59. "일화, LG, 유공 서울 포기 못해", 《한겨레신문》, 1995년 12월 13일 작성.
  60. "K리그 서울 연고의 어제와 오늘",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9일 작성.
  61. "유공 연고지 부천으로", 1996년 1월 5일 작성.
  62. "일화 홈구장 천안 확정", 1996년 3월 30일 작성.
  63. "프로축구 LG 안양에 "새둥지"", 《동아일보》, 1996년 4월 27일 작성.
  64. "서울 연고 이랜드프로축구단 출범…FC서울과 '투톱'", 《한국경제》, 2014년 5월 1일 작성.
  65. 위원석. "위원석의 하프타임-K리그서 '서울 더비'를 보고 싶다.", 《스포츠서울》, 2009년 9월 8일 작성.
  66. 윤성익. "한국 프로축구 탄생 25주년 특별기획-K리그 25개의 이야기-제21편 : 서포터즈 이야기", 《플라마》, 2007년 11월 26일 작성.
  67. "프로축구, 지역연고제 정착의 해로", 《오마이뉴스》, 2003년 1월 18일 작성.
  68. "프로축구단 지역연고 설정 절실", 《연합뉴스》, 1993년 12월 1일 작성.
  69. "문체부, 협회 활성화 대책 국민열망 업고 정책지원 잰걸음", 《한겨레》, 1994년 7월 15일 작성.
  70. "'95 프로축구 코리안리그, 5월 6일 개막", 《연합뉴스》, 1994년 12월 20일 작성.
  71. "축구가 야구 인기 분명히 깬다"", 《조선일보》, 2012년 5월 11일 작성.
  72. "스포츠에 지자제 바람", 《경향신문》, 1994년 4월 15일 작성.
  73. "李文體, "프로축구팀 10개팀으로 늘리겠다"", 《연합뉴스》, 1994년 7월 4일 작성.
  74. "문체부, 협회 활성화 대책 국민열망 업고 정책지원 잰걸음", 《한겨레》, 1994년 7월 15일 작성.
  75. "프로축구 내년부터 지역연고제 시민 곁으로 전북->전주, 포철->포항, 현대->울산, 대우->부산, 전남->광양, 여수, 순천 확정", 《경향신문》, 1994년 12월 16일 작성.
  76. "'95 프로축구 코리안리그, 5월 6일 개막", 《연합뉴스》, 1994년 12월 20일 작성.
  77. "김기복 사무총장 인터뷰", 《월간축구 2월호 22~23P》, 1995년 2월 1일 작성.
  78. "지역연고지 매듭짓겠다", 《스포츠서울》, 1995년 2월 13일 작성.
  79. "줏대없는 프로연맹이사회", 《스포츠서울》, 1995-09- 작성.
  80. "일화 유공 LG, 내년에 서울연고 없어", 《월간축구 (현 베스트일레븐)》, 1995년 12월호-67페이지 작성.
  81. "'서울 한지붕 세가족' 일화, LG, 유공 내년엔 모두 서울 떠난다", 《스포츠서울》, 1995년 11월 6일 작성.
  82. "프로축구 지역연고 먼길인가", 《한겨레신문》, 1995년 11월 9일 작성.
  83. "일화, LG, 유공 서울 포기 못해", 《한겨레신문》, 1995년 12월 13일 작성.
  84. "유공 연고지 부천으로", 1996년 1월 5일 작성.
  85. "일화 홈구장 천안 확정", 1996년 3월 30일 작성.
  86. "프로축구 LG 안양에 "새둥지"", 《동아일보》, 1996년 4월 27일 작성.
  87. "프로축구 저변 확대 위해 연고지 대도시 중심돼야", 《동아일보》, 1997년 10월 31일 작성.
  88. "대도시 연고 프로팀 구성 축구활성화 위한 지름길", 《동아일보》, 1998년 5월 22일 작성.
  89. "왜 한국축구는 상대문전만 가면 비실비실합니까? 와글와글에 모여든 목소리들", 《동아일보》, 1999년 6월 22일 작성.
  90. "프로축구 발전을 위한 공청회", 《베스트일레븐》, 1998년 12월호 64P~66P 작성.
  91. "서울 연고 프로팀 조만간 결정", 《베스트일레븐》, 1999년 12월호 64P 작성.
  92. "프로축구연맹 "서울 연고지 이전 가능"", 《스포츠한국》, 2004년 2월 6일 작성.
  93. "날개 잃은 천마 - 일화는 성남을 떠나야 하는가?", 《추적 60분》, 2001년 3월 25일 작성.
  94. "성남시 축구협회장 인터뷰 중 안양 LG, 부천 SK 서울 연고지 복귀 언급 부분", 《추적 60분》, 2001년 3월 25일 작성.
  95. "안양 LG 치타스 이재하 사무국장 '서울 연고지 가치평가 설명회' 참관", 《베스트일레븐》, 2000년 5월호 111P 작성.
  96. "안양 LG 치타스 '최종준' 단장 인터뷰", 《베스트일레븐》, 2000년 6월호 92P 작성.
  97. "“서울축구단 공모합니다”…시,1월말까지 시한…100억 지원", 《국민일보》, 2004년 1월 14일 작성.
  98. "서울시 연고지 이전 프로축구단 공모", 《한겨레신문》, 2004년 1월 29일 작성.
  99. "프로축구연맹, LG 서울 입성 승인", 《연합뉴스》, 2004년 3월 11일 작성.
  100. "남자프로농구 연고지 확정", 《동아일보》, 1996년 11월 27일 작성.
  101. "'95 프로축구 코리안리그, 5월 6일 개막", 《연합뉴스》, 1994년 12월 20일 작성.
  102. "프로축구단 지역연고 설정 절실", 《연합뉴스》, 1993년 12월 1일 작성.
  103. "문체부, 협회 활성화 대책 국민열망 업고 정책지원 잰걸음", 《한겨레》, 1994년 7월 15일 작성.
  104. "축구가 야구 인기 분명히 깬다"", 《조선일보》, 2012년 5월 11일 작성.
  105. "서울에도 더비 만들자", 《스포츠서울》, 2008년 5월 1일 작성.
  106.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용 않으면 75억 안 내도 된다?", 《스포츠동아》, 2014년 4월 15일 작성.
  107. "히어로즈만 혜택주는 KBO", 《한국일보》, 2008년 6월 25일 작성.
  108. "프로농구 삼성 SK 서울 입성", 《경남도민일보》, 2001년 6월 2일 작성.
  109. "우리금융지주, 50억원 풀어 드림식스 인수 확정", 《연합뉴스》, 2013년 3월 7일 작성.
  110. "KOVO, GS 칼텍스 서울연고지 이전 승인", 《엑스포츠뉴스》, 2009년 6월 1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