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상하이 전투
(중일 전쟁의 일부)
Shanghai1937KMT machine gun nest.jpg
날짜 1937년 8월 13일 ~ 1937년 11월 26일
장소 중화민국 상하이
결과 일본 제국 일본제국의 승리,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전략적 승리
교전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일본 제국 일본제국
지휘관
중화민국 장제스

중화민국 천청

일본 제국 하세가와 기요시

일본 제국 야나가와 헤이스케
일본 제국 마쓰이 이와네

병력
75개의 사단과 9개 여단
60만 명
항공기 200대
탱크 16대
8개의 사단과 6개 여단
30만 명
항공기 500대
탱크 300대
해군 상륙함 130대
피해 규모
약 10만 ~ 20만 명 추산 약 7만 명 추산

상하이 전투 또는 제2차 상하이사변중일 전쟁 발발했을 당시 1937년 8월, 일본 제국상하이에 상륙하여 전투했던 전쟁을 말한다.

개요[편집]

1937년, 일본 제국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전면전을 선포함으로써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갔다. 7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베이징톈진을 손쉽게 장악했고, 곧이어 8월에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개전 초기때만 해도 일본군 수뇌부는 중국대륙을 3개월 이내에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중국군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다. 상하이의 국민당 군대는 기존의 군벌들 주축으로 이루어진 부패한 '당나라군대'가 아닌 장제스의 최정예 직속부대들이 주축이었다.

상당한 저항에 놀란 일본군은 상하이 공략에 상당한 고전을 겪게 되는데,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피해가 컸다. 이는 1930년대에 중국에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젝트 장군이 중화민국 국민당군 육성을 위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해놓는데 추진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으로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1930년대 중화민국으로 파견한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과 어렵게 설치한 벙커 밭을 뚫기 위해 무작정 돌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 직속의 정예 제88사단이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놓는 등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렇게 3개월동안 격렬한 전투속에 11월,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장악하여 점령하게되고, 당시 일본군들은 중국군에 대해 상당한 굴욕감과 분노감을 맛보게 되면서 일본군은 크나큰 적개심에 받쳐 있었고,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