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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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파시즘(독일어: Sozialfaschismus, 영어: Social fascism)은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향해 불렀던 멸칭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멸칭으로 부를 때 '사회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옹호하고 청년 징병제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는 그 어떤 극우 세력보다도 독일 공산당을 탄압했기 때문에, 국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극우 세력보다 더 위험한 파시스트로 보았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노사 협조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파시즘의 계급협조랑 유사하다 하여 역시 이론적으로도 파시스트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1919년 일명 '사회개량학파'와 '마르크스주의파'가 결별하면서 인터내셔널은 분열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다수 차지한 코민테른이 성립되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 나치가 정치권에 진입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나치가 1933년에 집권하면서 축출당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해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치려 했으나, 당시 코민테른의 실질적 주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탈을 쓴 파시스트들이며, 국제 노동운동을 배신한 배신자들이다."라고 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 파시스트라고 불리며 적대 관계를 형성해야 했다.

개요[편집]

1910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탄압 이후 1924년 9월 제5차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과 동일시했고, 1928년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사회 파시즘론'이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간의 대립이 최고조에 올랐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강령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경멸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좌익의 대열에 서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은 좌익과 우익의 관계보다 대립 관계가 짙었다. 코민테른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강령이 있고 나서 1933년 나치 정권이 수립되고 1935년 까지 반-나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경멸당하는 존재였다.[1]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독일 공산당 역시 폭압적 탄압을 받았고 여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노동 운동 단체와 분열되어 이론적 단결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935년 제7회 인민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주장한 국제 공산주의자들의 반-나치 빨치산 전술이 채택되었다. 이는 나치 지배하에 잠시 사회민주주의와 연대를 하여 이론적 단결을 해 혁명적 노동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자는 공산주의자들의 방안이었다. 이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파시즘론'을 한 수 접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 사회 파시즘론도 점점 잊히게 된다.[2]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반론[편집]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가 더 파시스트적이라고 비판했다. 1920년대 후반 나치가 급부상하던 시기에 레프 트로츠키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대해 나치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을 독일 공산당과 함께 전개하려 했으나, 독일 공산당이 그것을 거부한 이유를 들어, "나치가 온전하게 집권하게 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었다."라고 비판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 항목은 클라우스 힐데브란트가 1984년에 저작한 《The Third Reich, Routledge》을 참조하라.
  2. 마틴 키친이 저작한《A History Of Modern Germany 1800-2000》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