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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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는 2002년에 출간된 스티븐 핑커의 책이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이 책은 일반적으로 그 기원이 철학자 존 로크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 '빈 서판'에 대한 핑커의 반박을 담고 있다.

빈 서판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존 로크의 경험주의적 가치관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시엔 아무런 정신적 기제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출생 이후의 경험에 의해서 그 마음의 내용이 얼마든지 바뀌는 존재이다. 이러한 로크의 주장은 중세 유럽에서 세습적인 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사상적 근거를 침식시키는 데 공헌했으며(모든 사람이 백지 상태로 출발한다면 왕과 귀족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타고난 우월함을 지녔다고 할 수 없으므로), 현대에도 인종 차별 주의에 맞서는 이들 등에 의해 지지받고, 지난 세기 동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많은 분야에서 합의된 토대 몫을 해 왔다.

하지만 핑커는 이러한 양육 위주 사고 방식이 가진 위험성과 함께, 인간의 정신은 타고난 본성에 의해서도 많이 좌우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핑커가 저술에서 반박하고자 하는 학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종이와 같은 상태로 시작해, 경험을 토대로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춘다는 존 로크의 학설.
토머스 홉스를 비롯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잔인하며 따라서 이를 교정하기 위한 상시적 경찰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인간은 문명인의 유해한 양식으로부터 먼 곳에 놓이게 될 때 비로소 어떤 혁명도 필요치 않은 온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장 자크 루소의 학설.
심신 이원론의 일종으로서, 결정론에 맞서 인간의 마음은 육체로부터 독립적이며 행동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학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학설이 어째서 현대 지식 세계에서 신성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여러 두려움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
  •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
  •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

핑커는 이러한 두려움이 사실 무근임을 밝히고, 빈 서판 이론은 언뜻 보기에 인종 차별이나 신분 제도와 같은 문제를 온전히 반박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학설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고 경고한다. 쉬운 예로, 성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본성에 기인한 성욕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 탓이라는 그른 믿음에 기초한 대책을 세운다면 강간 피해가 줄어들기는커녕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