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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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

베지밀뽀끄스.jpg

기본 정보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장르 댄스 팝
활동 시기 1997년 ~ 2006년
소속사 DR뮤직
구성원
김이지 이희진 간미연 심은진 윤은혜
이전 구성원
정현전 정시운 차유미 이가이
대표곡(활동곡)
남자에게 (민주주의) 1997년
머리하는 날 1997년
야야야 1998년
Change 1998년
Get up 1999년
Killer 1999년
Missing You 1999년
Why 2000년
배신 2000년
Game Over 2001년
인형 2001년
우연 2002년
나 어떡해 2003년
바램 2003년
Xcstasy 2004년
Play 2004년

베이비복스(Baby V.O.X)는 1997년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여성 5인조 댄스그룹이다. 베이비복스는 한국의 스파이스 걸스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회반항적인 노래와 페미니스트적인 이미지로 1집 앨범을 발표한다. 하지만 1집은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하며 부진을 겪었고 초창기 멤버 3명이 탈퇴해버리는 실패를 경험한다. 1년 뒤 1998년 2집 앨범의 싱글 '야야야' 와 'Change'를 발표하며 이 시기부터 메인스트림 차트에 진입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하는데 1999년에는 서브보컬로 윤은혜를 영입한뒤 정규 3집 앨범 'Come Come Come Baby'를 발표한다. 당시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섹시하고 파워풀한 이미지를 어필하기 시작하며 'Get Up' 'Killer'등을 흥행시켰고 당대 최고 아이돌 스타 자리에 오르게된다. 이 후 'Why' '배신' '인형' '우연' '나 어떡해' '바램'등을 히트시키며 최고 인기 걸그룹 자리에 올랐다. 2000년도부터는 중국일본을 시작으로 해외시장에도 진출했는데,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으며 중국 계림시 홍보사절로 위축받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음악전문채널 [V] 타일랜드가 2003년 한해동안 집계한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V] 어워즈'에서 '파퓰러 아시안 아티스트' 부문 1위에 올랐고, 2002년 한국가수로는 처음으로 태국에 진출해서 현지에서 음반 세장을 발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3년 5월에는 중국 중앙 인민라디오 방송국의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에서 6집 수록곡 '아임 스틸 러빙 유'로 1위를 차지해 '한류열풍'의 주역임을 확인하기도 했다.[1] 그리고 아시아 등지에서 22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였다.[2] 대한민국에서는 지구촌 나눔운동 홍보대사로 임명받기도했다. [11] 2004년 심은진의 탈퇴를 시작으로, 2006년 멤버 전원이 탈퇴하여 해체되었다.


1996~1997 데뷔 과정과 초기경력[편집]

1집 EqualizeHer (1997)[편집]

1996년, DR뮤직의 대표 윤등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스파이스 걸스를 오마쥬하는 테마로 5명으로 이루어진 걸그룹을 기획하는데, 부산에서 랩퍼로 활동하던 정시운과 정현전 그리고 캘리포니아 출신이자 양파의 히트곡 <애송이의 사랑>을 작곡한 차현성의 친척인 차유미, 그리고 당시 고교생이던 이희진과 김이지를 영입시킨다. 이희진은 서울 동대문에서 류시원의 라디오 공개방송을 구경하다가 벤 한대가 자신의 앞에 서더니 당시 방송인 윤정수와 가수 양파의 매니저가 타고있었다고한다. 그들은 여자 다섯명을 구하는데 할 생각이 없냐고 제의했고 결국 DR뮤직을 소개받아 합류하게된다.[3] 이 다섯으로 구성된 그룹은 하루 10시간씩 안무 연습과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고 고 마침내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음반 녹음을하게 된다. 베이비복스의 이름 뜻은 <Baby- Voice Of Expression>인데 "신선하고 맑은 목소리를 표현하다"라는 뜻을 담고있다. 녹음을 진행할당시, 김이지는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정식적인 녹음과 연습 활동을 미뤄왔는데 이와중에 다른 멤버들은 먼저 모든 녹음을 끝마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김이지는 보너스 트랙 <비밀> 녹음에만 참여한다. 드디어 1997년 7월 3일, 베이비복스는 경향신문을 통해 메이저 데뷔를 한다. 처음으로 선보인 싱글은 <남자에게 (민주주의)>였지만 당시 열약했던 소속사 환경과 더불어 당시에는 여성 가수들이 무리지어 나오는 그룹형태의 활동이 많이 없던 시기라 방송 스케쥴을 잡는게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데뷔 초 <남자에게>를 홍보할 당시 입었던 컨셉의 의상 중 그려져있던 마크가 한 종교 단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항의를 받고 활동을 시작한지 초창기부터 적신호가 켜졌다. 또 뮤직비디오에선 베이비복스가 죄수로, 그리고 남자들이 감옥을 지키는 사람이고 베이비복스가 남자들을 공격하는 컨셉이었는데 꽤 많은 제작비가 들었던 뮤직비디오지만 많은 방송사에서 방송하기를 거부하는 상황까지 가게된다. 그렇게 1달간의 미미하고 험난한 홍보 기간을 거치고 난뒤 KBS의 <토요일 전원출발>에 출연이 결정되며 처음으로 공중파 채널에서 무대를 가졌는데 방송 끝나고 시청자들한테 큰 항의와 비난을 받는다. 당시 무대에서 선보인 파격적인 안무와 랩은 남자만 한다는 인식때문에 여자멤버가 랩을 하는 모습이 대중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DR뮤직은 고심끝에 활동곡을 <남자에게>에서 대중적인 디스코 넘버 <머리하는 날>로 교체한다. <머리하는 날>의 활동을 위해 멤버들은 머리에 물들였던 현란한 염색 스타일과 과격한 안무, 보이쉬한 의상들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전보다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어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방송 스케쥴이 전보다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비공식적이지만 팬클럽까지 결성되며 어느정도 호조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비복스가 TV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당대 최고 인기스타 H.O.T.와 비교가 되는데, 같은 멤버수와 비슷한 테마의 노래들로 인해 언론에서는 베이비복스를 일명 <여성 H.O.T.>라고 소개하곤 했다. 이 때문에 일부 H.O.T. 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했다. <머리하는 날>로 활동하던 10월, 팀에게는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미국에서 합류된 메인보컬 차유미가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버린것이다. 이에 활동에 큰 치명타를 입은 베이비복스는 겨우겨우 얻7은 방송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고 9월 경 <머리하는 날>의 뮤직비디오 현장에서 눈에 띄어 연락처를 받았던 고교생 간미연을 캐스팅하고 대타 멤버로 영입한다. 간미연을 영입시킨 뒤 1달 반동안의 연습에 거쳐 11월부터 멤버교체 소식을 알리고 다시 활동에 들어갔는데 간미연이 합류되고 연습 기간동안 애초 앨범의 기획과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틴팝 스타일의 스키복을 입고 등장한다. 그리고 안무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주었는데 멤버 이희진간미연은 커플 댄스를, 그리고 따로 큰 파트가 없었던 김이지는 메인보컬 차유미의 파트를 맡게되면서 전보다는 외적인 부분으로 어필했다. 간미연이 합류된 베이비복스는 전보다 더 많은 반응을 얻었는데 결국 데뷔 5개월만에 SBS의 음악 방송에서 47위로 데뷔하는 성과를 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앨범이 발표되고 약 6개월 간 잦은 사건과 멤버 사고등으로 인해 홍보에 큰 부재를 겪었고 이는 저조한 판매량으로 돌아오면서 12월에 공식적으로 1집 활동을 마무리한다. 이 후 멤버 정현전과 정시운은 1집의 실패로 인해 자진 탈퇴를 선언한다.

1998~1999 상업적 성공[편집]

2집 BABYVOX Ⅱ(1998)[편집]

1997년 12월 1집 활동을 종료하면서 멤버 정현전정시운이 개인사정으로 탈퇴하는데 그 빈자리를 심은진이가이가 메꾸었다. 심은진은 춤 추는것을 워낙 좋아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오빠의 권유로 다른 사무실에서 준비하는 5인조 여성 걸그룹에 합류하지만 그룹은 준비 과정인 1년 반만에 해체됐다. 그렇게 가수에 꿈을 접을뻔했던 시기에 같이 그룹을 준비하던 기획사 프로듀서에게 전화가 왔고 베이비복스 멤버를 추가로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멤버로 투입되었다. 당시 심은진은 춤 연습을 하던중 다리를 다쳤는데 아무렇지않게 압박붕대를 다리에 감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격렬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보고 모두 놀랐다고 한다.[4] 그리고 심은진과 같이 캐스팅된 멤버 이가이는 윤등룡PD가 베이비복스가 후속 앨범을 밴드 컨셉으로 준비할 예정인데 키보드와 보컬을 맡을 멤버가 필요하다며 이가이를 캐스팅했다. 하지만 이가이는 당시 나이가 1968년생으로 30살이었고 다른 멤버들은 모두 10대였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이를 10살이나 낮추고 베이비복스로 데뷔하는것으로 결정되었다. 심은진과 이가이가 합류한 뒤 베이비복스는 멤버 별로 키보드와 기타 등 악기를 하나씩 다루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2집의 프로듀서로 작업하게된 김형석주영훈의 곡을 받아 녹음작업을 1998년3월에 모두 끝마쳤다. 하지만 당시 틴팝 그룹들인 S.E.S.핑클등이 데뷔하던 시기였고 대체적인 흐름이 귀여운 댄스와 아기자기한 노랫말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쉽다는 판단으로 모든 앨범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멤버들은 하루 8시간에 버금가는 시간동안 격렬한 안무 연습을 했고 전통 무예인 택견을 3개월 동안 배우며 정신수양까지 하는 등 1집의 흥행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8년 9월 <KMTV 결정 인기가요 43!>과 SBS 인기가요를 통해 타이틀 싱글 <야야야>를 선보이고 2집 앨범 BABY VOX II를 발표한다. 타이틀 곡 <야야야>는 방송한 지 2주일도 지나지 않아 MBC 음악캠프 10위권 진입, KBS 뮤직뱅크 13위, SBS 인기가요 11위, KBS 제2FM '엄정화의 가요광장' 7위, KMTV '인기가요 43' 7위 등을 차지하는 등 놀라운 속도로 상승세를 보이며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야야야>는 10대 학생들이 좋아할만한 가사말과 유승준 등을 지도한 이영환이 직접 만든 일명 '안녕 춤'이 팬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2집 음반은 10월이 되서야 발매가 되었는데, 한터 기준으로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다. <야야야>는 1998년 11월 첫째주 SBS 인기가요에서 3위까지 랭크되었다. 주영훈이 작곡한 후속곡 <Change> 또한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베이비복스의 공식 팬클럽인 <베이비 엔젤스>가 창설되었다.

2집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1999년 1월, 멤버 이가이의 실제 나이가 PC 통신등을 중심으로 들통나게 되면서 결국 DR뮤직은 천리안 PC통신에 장문의 사과문을 올리며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이가이는 그렇게 2집 활동을 끝으로 베이비복스에서 탈퇴한다.


3집 Come Come Come Baby (1999)[편집]

1999년 봄, 멤버 이가이의 빈자리를 메꿀 공개 오디션을 개최했는데 여기서 윤은혜가 캐스팅되었고 불안정했던 멤버 라인업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2집을 발표하고 약 7개월간의 공백끝에 3집 <Come Come Come Baby>의 리드싱글 <Get Up>을 발표한다. <Get Up>은 박진영이 작사를, 김형석이 작곡을 맡아 화제가 되었고 첫무대는 KMTV의 쇼뮤직탱크에서 선보였는데 멤버 김이지의 가슴이 노출된 선정적인 의상과 다리를 쓸어내리는 안무등이 논란이 되어 PC통신상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다. 중독성있는 가사에 쉽게 귀에익는 멜로디등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998월 3일, KBS 뮤직뱅크에서 데뷔 2년만에 처음으로 MVP를 수상하였다.

데뷔 2년만에 첫 1위를 수상한 베이비복스의 모습.

<Get Up> 활동 중 작사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모 방송국에선 작사가를 '서윤정'으로, 베이비복스의 인터뷰에서는 박진영으로 소개가 되었고 이 문제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진실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베이비복스 측은 박진영이 자신의 부인인 '서윤정'의 이름으로 기재를 했고 실질적인 작사는 박진영이 했다고 밝혔다. <Get Up>이 히트를 하고 후속곡을 준비하던 시기에 멤버 간미연H.O.T.의 멤버 문희준이 스캔들에 휩싸였고 간미연에게 익명의 안티팬이 `죽여버리겠다'고 쓴 피묻은 편지와 면도날 8개와 함께 우송했다. 그리고 지난 2월 서울 모 쇼핑센터에서 열린 펜사인회를 마치고 나오다 4∼5명의 여학생들로부터 오물세례를 받았으며 최근 모 레코드숍에서 열린 팬사인회땐 한 여학생이 휘두른 면도날에 손을 다치기도 했고 베이비복스의 소속사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12] 이 사건은 9시 뉴스에도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범인'은 H.O.T의 여고생 팬으로 밝혀졌다. [13]

<Get Up>의 활동을 종료하고 9월 초, 후속곡 <Killer>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발표 2주만에 SBS 인기가요 7위에 랭크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유행을끌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베이비복스가 워낙 인기가 높아 스케줄 확보가 힘들었을 정도였다. [14] 활동 1달만에 SBS 인기가요에서 1위, KBS 뮤직뱅크 4주 연속 TOP3를 기록했다. 연말에는 발라드곡 <Missing You>로 활동했는데 예상외의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3집 활동을 마쳤다. 이 시기에 아이스크림 와, 하디스 등등 총 4편의 광고를 계약했으며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의 홍보대사가 되기도했다.

스캔들과 안티 생성의 시작[편집]

3집 활동중에 퍼진 근거없는 스캔들로 모 남성그룹의 팬들은 베이비 복스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수많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고, 침묵시위를 펼치고, 무대 위의 베이비 복스가 보는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기도 했다. 1999년 8월 20일 대구 동성로에 있는 한 대형 레코드 매장에서 팬 사인회를 연 베이비 복스는 '문희준 극성 팬이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일일이 청소년 팬의 가방 검사를 한 뒤 사인대에 줄 서게 했다. 그럼에도 한 여학생 팬이 간미연의 사인대 앞에서 문희준의 브로마이드를 꺼내놓고 사인하라고 윽박질러 매니저들이 긴급히 끌어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간미연은 1999년 8월 13일 서울 면목동의 한 레코드점에서 팀 동료들과 팬 사인회에 참석했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 한 여중생이 사인을 받아가며 악수를 청하더니 슬며시 면도칼로 간미연의 오른손 검지를 베려고 시도했던 것. 천만다행으로 1㎝ 정도 상처가 나긴 했지만 깊지 않아 응급조치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소속사 측은 "간미연과 문희준은 서로 마주 대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데 왜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 때문에 아예 간미연의 곁에는 2명의 매니저를 전담 보디가드로 기용하는 등 신변 보호 비상대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H.O.T.의 일부 극성팬들은 베이비 복스에게 '황산을 뿌리겠다'는 등의 테러위협을 했으며, 베이비 복스의 소속사 DR 뮤직에는 간미연을 향한 경고 및 협박성 항의전화가 쇄도하였고, '널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희준오빠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해줄게. 몸조심하길.'이라는 내용이 적힌 피 묻은 협박편지와 함께 간미연의 눈 부위를 도려낸 사진과 8개의 면도날을 동봉해 보내 간미연의 위해를 기도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여 큰 불안감과 충격을 받은 간미연은 며칠 간 방송 스케쥴을 소화할 수 없었으며, DR 뮤직이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요청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베이비 복스 소속사 대표 윤등룡의 딸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였고, 베이비 복스가 간미연의 모교인 성덕여자상업고등학교의 축제 행사에 참석했을 때 간미연은 후배들과 동료들로부터 수많은 욕설과 언어폭력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H.O.T. 극성 팬들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살해 협박사건을 수사 중이었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1999년 9월 15일 강남구 논현동의 베이비 복스 사무실에 또 다시 면도칼과 협박편지가 우송됐다는 베이비 복스 측의 신고를 받았다. 경찰서 측은 이를 수거하여 서울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지문 감식을 의뢰했다. 경찰은 또 다시 이런 협박편지가 온 것은 이번 수사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H.O.T. 팬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H.O.T. 팬클럽에 대한 정식조사도 검토하였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협박전화가 끊기긴 했지만 일부 PC통신엔 여전히 간미연의 대한 비난과 은근한 협박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H.O.T.의 팬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DR 뮤직이 H.O.T.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인기를 얻으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거나 '간미연에게 간 협박편지에 묻은 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혈액조사를 했는데 매니저의 혈액이었다', '마감뉴스에 자작극이라고 나왔다'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소속사와 간미연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며 터무니없는 루머를 재생산하기까지 한다.

물론 H.O.T. 팬들의 간미연 살해 위협 사건으로 인해 베이비 복스라는 그룹을 남녀 노소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려지게 하여 의도치 않은 유명세로 그룹의 홍보 효과를 얻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H.O.T. 팬들이 주장하던 '자작극설'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당시 베이비 복스의 소속사 대표 윤등룡은 소속사 홈페이지를 통해 H.O.T.의 팬들에게 입장 표명의 글을 직접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H.O.T. 측도 "교제설은 전혀 근거없다"며 이 소문을 일축했다.

1999년 10월 9일 서울 여의도 MBC 공개홀의 생방송 '음악캠프'와 10월 10일 등촌동 SBS 공개홀에서 열렸던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박지윤과 베이비 복스가 무대에 올라 각각 <아무것도 몰라요>와 <킬러>를 부르며 춤을 추자 구름처럼 몰려든 H.O.T.의 팬들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길을 보내며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들은 흰색 풍선을 들고 입장해 H.O.T.가 나올 때는 열광적으로 이를 흔들고 다른 가수들에게도 마음에 들면 열심히 풍선을 흔들곤 했으나 H.O.T.의 문희준과 베이비 복스의 간미연, 강타와 박지윤과의 열애설 때문에 박지윤과 베이비 복스는 팬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거없는 소문에 애꿎게 여가수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변에서는 한마디씩하기도 했다.

2000~2001 해외진출과 국내에서의 부진[편집]

4집 Why (2000)[편집]

2000년 4월 중국 계림에서의 베이비복스

3집의 성공적인 활동 이후 중국에서도 진출을 꾀한 베이비복스는 아시아권으로 진출하기위해 앨범작업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된다. 우선 작곡가 김형석을 메인 프로듀서로, 안무는 일본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안무가인 '사쿠마 히로유키'를 섭외했고 의상은 디자이너 이상봉이 맡게된다. 뮤직비디오 역시 중국 계림에서 촬영했다. 한복 디자인에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가미한 고전미 넘치는 의상과 대중성과 음악성을 한번에 잡은 타이틀곡 'Why'로 약 4개월만에 국내 무대에 컴백한다. 200052일, 중국 구이린에서 펼쳐진 '한중 우호의밤'의 공연에서 먼저 선보였고[15] 같은 달 13일 MBC 음악캠프를 통해 첫 무대를 가졌다. 'Why'로 팬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당시 선보인 안무가 큰 화제가되어 활동을 시작한지 보름만에 판매량이 15만장에 다가섰다. [16] 활동 초반 베이비복스는 525일 한양대 안산 캠퍼스에서 예정된 경인방송의 <뮤직엔진>에 출연하기 위해 소속사 차안에서 대기하던 중 신원을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쏜 물총에 윤은혜가 맞았다. 이 남자는 열렬한 베이비복스 팬을 자처한 다음 피카추 인형을 선물하는척 하면서 갑자기 물총을 꺼내 윤은혜의 눈에 정통으로 쏜 뒤 쏜살같이 달아났다. 물총을 맞은 윤은혜는 통증을 호소하며 한참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이때문에 베이비복스는 공연을 취소하고 곧바로 서울 한남동 순천향 병원으로 이동, 윤은혜가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귀가했다. 병원에선 윤은혜가 각막 손상을 입어 4~5일 정도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밝혀 베이비복스는 당분간 방송 활동을 하지 못할 위기에 놓였었다. 멤버들은물총에서 나온 물에선 간장과 식초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17] 활동 당시 이희진의 헤어 스타일이 금발이었는데 KBS ‘공영방송’임을 내세워 다른 방송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제를 해왔기 때문에 방송 활동에 조금의 타격을 입었다.[18] 'Why'는 초반 기세와는 달리 안티들의 공격과 활동 부진으로 1위 후보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Why'의 활동을 종료하고 8월엔 강한 힙합풍의 댄스 음악인 '배신'으로 활동을 재개했는데 당시 무대에서 강렬한 의상과 퍼포먼스가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안티들의 공격이 지나치게 많아졌고 2000822MBC 음악캠프에서 노래를 하던 베이비복스를 향해 남성그룹 팬들이 단체로 욕설과 난동을 부렸다. 또, 경북 울산의 모 고교에 재학 중이던 C모양은 베이비복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자 ‘간미연 사건은 자작극’이란 소문을 퍼뜨리며 조직적으로 활동을 방해했다. 베이비복스의 3집 활동 때부터 수차례의 테러위협이 있어도 철없는 학생의 소행이거니 하며 그냥 넘겼던 DR뮤직은, C모양이 자신의 소재까지 밝히며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 2000년 7월에 경찰에게 베이비복스의 협박범으로 잡힌 C모양은 에이치오티의 여고생 팬이었다. 그러나 베이비복스가 처벌을 원치 않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2000년 7월 16일 일요신문에서는 안티에 대해서 어어떻게 생각하냐는 주제로 간미연을 취재할정도로 안티들이 극에 달했었다. [19] 안티들의 소행에도 베이비복스는 중국 청도에서 펼쳐지는 ‘세계 맥주 대축제’행사에 참가하여 비지스, 우타다 히카루, 코코리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합동 공연을 펼쳤고[20] 활동 중 한 특집 방송으로 인해 스킨 스쿠버 촬영을하러 사이판으로 간 베이비복스는 태풍 주의보가 내려진지도 모른 채 바다속으로 들어갔다가 멤버가 물속에서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멤버가 또 교체될 뻔한 큰 상황에 닥쳤으나 다행히 멤버들이 모두 구조되었다. 그리고 SBS <뷰티풀 라이프>에 출연했는데 2달간의 연습끝에 결국 수영선수 조오련과 함께 대한해협 횡단에도 성공했다. [21] 베이비복스는 10월에 4집 활동을 마무리했고 중국 계림시의 홍보대사로 위축되기도 했다.

4집 활동 종료 후 베이비복스의 모습

이 시점부터 베이비복스는 해외활동이 잦아졌는데, 중국에 클론이정현과 함께 콘서트를 하러 출국하여 무대에 올라갔지만 공연사기를 당하여 호텔비를 내지 못해서 호텔에 체류가 되어 비행기 티켓조차 구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이 점은 한류를 알리기 위해 무부분별하게 진출하여 나타난 사건이었다며 비판당했다. 2000년 10월 22일에는 콘서트 준비로 일본에 출국한 베이비복스는, 팬사인회 현장에서 230명에 육박하는 팬들이 모이는 바람에 제대로 사인회를 진행하지 못하며 현지에서의 인기를 입증시켰다. 다음 날 개최된 미니 콘서트에서 700백석이 매진되고도 모자라 많은 관객들이 그냥 돌아가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그 해 일본 메이저 음반기획사 소니뮤직 등에서 러브콜이 왔으나 중국활동으로 인해 제대로된 일본활동을 펼치지는 못했다.

이 시점부터 베이비복스의 중심적인 보컬을 맡고 있던 이희진의 분량이 다소 적어지고 서브보컬을 맡고있던 간미연의 분량이 늘어났다.


5집 Boyish Story (2001)[편집]

2001년 5집 활동중 베이비복스의 모습

4집 활동이 끝난 뒤, 활발한 해외활동을 마친 베이비복스는, 2001년 본인들이 작사, 작곡에 참여한 5th 앨범 <Boyish story> 발표한다. 원래는 1월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5월로 컴백이 늦춰졌다. 늦춰진 이유에서는 멤버 전원이 앨범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어 작곡공부등의 이유로 컴백이 늦춰진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부터 베이비복스는 국내보다는 해외에 활동 비중을 두었고 5집 앨범을 당시에는 최초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일본,대만 등에 동시발표했다. 타이틀곡으로 선정됐던 <게임 오버>로 베이비복스의 기존 컨셉인 '섹시함을 탈피하고 보이쉬함을 추구한다'며 컴백했지만 멤버 심은진을 제외한 멤버들은 모두 섹시하고 여성스러움을 부각시키는 옷을 입고 무대에서자 항의를 받은적도 있다. 활동 후반 7월 2일, <Game Over>는 V채널에서 1위를 수상했다.

그리고 여자 가수로는 처음으로 비무장지대에서 단독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게임 오버 활동이 끝난 뒤, 소속사인 DR뮤직은 후속곡을 <가까이>로 정하고 8월 말까지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언론에 공개했으나, '가까이'의 가사말은 진한 사랑 행위를 연상시켰고 팬클럽 사이트 등에서 ‘성을 상품화 시키는 것 같다.수위가 너무 심하다’라며 질타를 받았고, 베이비 복스의 공식 팬클럽 "베이비 엔젤스"는 소속사 DR뮤직에 공개 질의서까지 보내게된다.[5] 이미 <가까이>로 지상파 방송사의 사전심의를 통과한 후였지만 부랴부랴 소속사는 후속곡을 <인형>으로 교체한다. <Game Over>가 전작보단 다소 부진한 반응을 얻었지만 <인형>으로 커리어 회복에 성공하며 특히 여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2001년 7월에는 멤버 간미연이 중국 연예 잡지의 '한국 여성 연예인 가운데 최고 인기 연예인' 랭킹에서 김희선을 2위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리더 김이지는 한·중합작 20부작 드라마 '적혈매괴'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전례가 없던 회당 350만원의 파격적인 출연료를 받기로 해 중국 내 베이비 복스의 인기를 반증하기도 하였다.[6] 또 이희진에게는 중국에서 드라마 출연 섭외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멤버들 가운데 특히 이희진에게 드라마 출연 섭외가 잇따르던 것은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는데, 자그마한 얼굴에 웃는 모습이 중국의 한족과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에 소속사에 들어 온 대본만 7~8개 정도였다.

2001년 7월 7일 심양을 시작으로 한 달간 7개 도시를 도는 중국 투어를 하였다. 그 전까지 홍보 차원에서 거의 무료로 공연해 왔던 베이비 복스는 당시의 투어 공연에서 상당한 수준의 개런티를 받았다. 50여개에 이르던 중국 내 자생 팬클럽의 성원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었다. 중국 공연을 마친 베이비 복스는 도쿄 등 4개 도시를 도는 일본 투어도 추진했다. 이미 일본 공연 기획사가 공연 제의를 해왔고 조건 등 마무리 작업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베이비복스는 중국에 위치한 산간벽이 어린이들을 위해 전산 학교를 세워 컴퓨터 80여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해외활동 중 베이비복스는 지난 해에 이어서 두 번째로 중국에서 공연사기를 당했다. 베이비복스는 심양 지역에서 두 번의 공연이 있었지만 개런티는 커녕 호텔비도 내지 못해서 체류되야만 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중국에 '베이비 복스 전산학교', '베이비 복스 쇼룸'이 생기다[편집]

중국 베이징에는 베이비 복스의 이름을 딴 학교가 생기기도 하였다. 중국 정부에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산간벽지에 학교를 세워주는 '희망 공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1년 9월 27일에 베이비 복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중국 언론과의 회견이 대대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베이비 복스는 '현대모니터' 중국 법인(현대 톈진(천진) 다매체 유한공사ㆍ법인장 김호연)과 함께 베이징 근교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와 옌창현 칭룽전 초등학교 등 2개 학교에 42대의 컴퓨터와 현대모니터를 기증했다. 학생 정원 1,200명이었던 북경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에서는 아예 컴퓨터 교육 교실과 학교 간판을 베이비 복스로 갈아 달며 뜨거운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베이비 복스는 이후로도 컴퓨터를 기증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실시하여 중국 내 각 성에 베이비 복스의 이름을 단 학교들이 생기게 되었다.

전 해였던 2000년 10월에 계림시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바 있던 베이비 복스는 2001년 '여위쥐'(중국 내에서 여행ㆍ유람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으로 관광청에 해당하는 기관)가 새로 설립한 리조텔에 출자하여 리조텔 내부에 '베이비 복스 쇼룸'이 오픈됐다.

이 쇼룸에서는 베이비 복스의 CD 및 공연 사진과 브로마이드 등을 비치해 판매했으며 리조텔에서 발생한 수익금으로 계림시 초등학교에 도서를 기증하였다. 계림시는 베이비 복스가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이후 계림시의 한국인 관광객이 26% 증가된 점(계림시 방문 외국 관광객 증가율 1위)에 고무되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류, 관광 비용 일체를 계림시에서 부담하여 베이비 복스 멤버들의 부모님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2001년 11월 5일 계림시의 계산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는 '베이비 복스 흉내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이에 앞서 베이비 복스는 2001년 11월 3일 이 호텔에서 열린 국제 관광제 개막행사에 참가하였고, 4일에는 카퍼레이드, 5일에는 팬 미니콘서트에도 참여했다.

베이비 복스 측은 "지난 3년 간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됐지만 일부에서는 외국인들에 대해 견제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버는 만큼 투자하고 베푼다는 차원에서 중국 내에서의 공익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베이비 복스는 2001년 9월 한ㆍ중수교 9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심양(선양), 베이징 공연에서 기획사인 희래예술단(대표 유정자)으로부터 공연 개런티는 물론 체류경비까지 받지 못하는 등 사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공연을 강행하여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데 대해 중국 팬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02~2003 제2의 전성기[편집]

Special Album (2002)[편집]

2002년 8월 15일 개최된 단독콘서트에서의 베이비복스

다음 해, 2002년. 이전 앨범들의 프로듀서 였던 김형석과 결별하고, 김창환과 작업한 < 스페셜 베스트 앨범 '우연' >을 발표한다. 원래는 3월 발표예정이었으나, 딜레이 되어 5월에 발표된다. 타이틀곡 <우연>은 3집이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되고 2주연속으로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1위 수상을 함과 동시에 월드컵 응원가로 채택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5.5집 활동과 동시에 베트남태국에 진출을 하고 CF와 음반사와 계약을 맺으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활동 중반 멤버 이희진이 모 방송에서 예능 오락프로를 녹화하던 중 말뚝박기 게임을 하다 척추를 부상당해 전치4주 진단을 받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고 동반 출연한 심은진은 찰과상을 입었다.

가요계의 불황기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복스 활동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1달 반 가량의 짧았지만 성공적인 활동 후, 그녀들은 활동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베이비복스 가요제"가 개최되었고 1차전에 약 4000명이 몰리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그곳에서 발탁된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장리인에게 2007년, DR뮤직의 윤등룡대표는 서울 중앙지법에 장리인과 그의 현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소장을 제출했다. 장리인이 소송에 휘말리게 된 것은 이미 지난 2003년 DR뮤직과 한차례 전속계약을 체결한 데서 비롯됐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각종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상당한 비용을 썼고 음반 준비도 서두르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어쩐 일인지 2003년 8월 장리인의 친모가 ‘공부를 계속 시키고 싶고 공부가 끝난 후 재계약을 체결하겠다’고 요청해와 국제적인 신의를 생각해 계약을 일시적으로 풀어줬다”고 설명했다. DR뮤직은 저간의 사정을 바탕으로 지난 1년여간 SM엔터테인먼트와 장리인을 잇달아 접촉했으나 협상이 원할치 못해 결국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계약서에 따르면 장리인은 계약파기시 손실액과 위약금 등 총 500만위안(약 6억4000만원)을 물어줘야한다”면서 “하지만 한국 음반기획사 간의 관계를 고려해 기존 장리인에게 투자됐던 비용에 해당하는 2억원만 돌려받자는 취지에서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7]

7월, 김이지는 중국 드라마 '적혈매괴'의 촬영을 위해 홀로 중국으로 떠나 약 두 달 간 현지에서 생활하였다. 이희진은 KBS FM '가요광장'의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였으며, 심은진은 2002년 8월부터 KBS '이색극장'에 출연하여 단막 오락극에서 코믹 연기를 펼쳤다. 윤은혜는 MTV의 VJ로 활동하였다.

첫 단독 콘서트[편집]

2002년 8월 15일에는 리더 김이지가 재학했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데뷔 5년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8] 총 2회의 공연을 개최했으며, 콘서트는 전석 매진되었다. 또한 국내 첫 단독콘서트를 축하하기 위해 J-WALK, 강성훈,코요태, 클론, 홍경민 등이 게스트로 참석했다.[9]

베이비 복스는 그 동안 중국 무대에 주력하다보니 국내 팬들에 소홀하다는 질책도 많이 받았는데, 그 때문에 대중문화 수출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국내 팬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8월 15일의 국내 첫 단독 콘서트의 성공은 의미가 컸다. 베이비 복스는, "중국 팬들의 사랑도 좋지만 한국 팬들의 지지를 얻을 때 더 큰 힘이 난다"며 데뷔 이후 발표했던 모든 히트곡을 라이브로 열창하며 화려한 무대를 꾸몄다.

공연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쑈쑈쑈'. 기존 콘서트의 틀을 깨는 '난장 파티'를 연출하며 확실한 볼 거리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연 실황의 모습은 Mnet에서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방송에 송출되었고 추후에 VCD화 되어 발매 되었으나, 물량이 적어 지방에 사는 팬들은 구입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2002년부터 국내 활동에 주력하기로 했던 베이비 복스는, 콘서트를 끝으로 그 해 10월까지 멤버 각자의 특기를 살린 활동을 벌인 후 재집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성그룹 디바와의 마찰[편집]

5.5집 활동을 마치고 KMTV에서 개최된 연말 시상식에서 3인조 걸그룹 디바와의 충돌로 인해 디바의 지니는 공연을 하기 싫다며 호텔로 잠적했고 두 그룹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져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서고 있던 중 디바멤버들은 모두 스테이지를 내려왔고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마찰들이 생겼으며 일이 너무 커지자 언론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큰 이슈였다. 이 일이 있고 10년 뒤 SBS의 예능 프로그램 강심장에 출연한 베이비복스와 디바는 이 사건에 대해 10년만에 입을 열였으며 디바의 멤버 비키는 리허설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베이비복스가 멤버 간미연 씨가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성의 없이 했다더라”고 당시 사건을 회상했다. 이어 비키는 “내가 선배고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화가 났다. 선배가 지나가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나 싶어 ‘인사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가, 똑바로 하던가’라고 말했다”고 전했으나 디바는 이미 1995년 룰라로 데뷔하고 디바에 리더로 합류했던 채리나가 탈퇴한 상황이었고 베이비복스의 초대 멤버였던 이희진,김이지등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실질적으로 베이비복스가 디바보다 앞서 데뷔한 선배임이 밝혀지고 이 사건에 대해 베이비복스 이희진은 “간미연이 평소 잠이 많은 친구인데, 그 때 너무 피곤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졸고 있었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라면서 “미연이가 자다가 말고 너무 놀라서 울면서 나갔다”해명했다. 디바와 베이비복스의 불화설에 대해 털어놓은 비키는 “그 땐 어려서 그랬는데 지금은 우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니, 이젠 그런 게 다 필요가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10]

일본 활동[편집]

5.5집 활동을 종료한 그녀들은 일본 NHK 아시아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우연>과 <Killer> 두곡을 열창했으며, 이벤트 형식으로 EP형식의 앨범도 릴리즈했다. 지난 2000년에서 열린 미니 콘서트 후에 2년만에 日에서 두 번째 미니콘서트등을 개최하고 역시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일본을 비롯하여 L.A에서도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이 시점부터 미국 진출에 힘이 가해진다.

6집 DEVOTION (2003)[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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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집의 활동이 끝난 후, 그 해에 대한민국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4인조 틴팝 걸그룹 핑클S.E.S. 등이 홀로걷기를 선언하며 베이비복스역시 리더 김이지가 중국에서의 드라마촬영으로 인해 해체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증폭되었지만 이를 부정이라도 하듯, 2003년 통산 정규 6th가 되는 <DEVOTION>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전 세계 동시발매였으며, 해외에서 선주문 40만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6집은 전 세계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발매되어 중국의 영어 시험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은 앨범이었다. 타이틀곡 <나 어떡해>는 김창환이 작곡한 댄스곡으로, 슬픈가사와 신나는 멜로디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나 어떡해>로 활동 하던 중 멤버 간미연이 오전 스케줄을 위해 10시쯤 벤을 타고 올림픽 대로를 지나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팬들에게 큰 걱정을 끼쳤지만 다행히도 외상은 없었다.

활동 후반 SBS 인기가요에서 뮤티즌송 제도 도입 후 첫 여성그룹 수상에 성공했다. 후속곡은 팬들의 투표로 "Loveless"가 선정되었으나 <바램>으로 짧게 선보였고, 무대에서 선보인 윤은혜의 헤어스타일이 인기를 끌었다. 또 한 섬도물산과 "asap 브랜드"와 제휴를 맺고 패션사업가로 나섰던적도 있다.

2003년 9월 멤버 이희진이 뮤지컬 <펑키펑키> 연습을 끝마친 뒤 새벽에 귀가하던 중 무장 괴한이 승용차를 타고 이희진에게 접근하여 이희진의 가방을 훔치고 폭행을 가한 뒤 도주했던 사건이 생겼었고, 베이비복스 멤버들이 뉴욕에 공연을 갔다가 항공기에 폭발물 오인 소동이 일어나 테러의 위협을 당해 20시간동안 공포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행 시간이 4시간 지체가 되어 SBS인기가요 스케쥴을 펑크 낼 뻔 했지만 다행히 스케쥴을 이상없이 소화해내는 헤프닝까지 발생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공연을 마친 뒤 중국의 영화배우 겸 가수인 곽부성이 베이비복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싶다며 두 가수가 저녁시간을 갖고 있을 때 중국 파파라치가 김이지곽부성이 함께 있는 사진을 퍼뜨려 스캔들이 나기도 했지만 각자 소속사측에선 사실이 아니라며 논란을 일축시켰다.

또 한, 베이비복스는 핑클을 이어 걸그룹으로는 두 번째로 SBS에서 개최하는 "통일음악회"의 참여를 위해 평양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몽골 대통령에게 초청을받아 콘서트를 연적도 있었는데 개런티 대신 공로상을 받고 멤버 당 1000평 크기의 땅과 집 다섯채를 선물받으며 대한민국의 지상파 뉴스에도 등장할 만큼 큰 이슈였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멤버 이희진간미연이 알고보니 국가사기를 당한것이었다고 밝혀 다시한번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2003년 2월 9일에는 미국 LA 베벌리힐스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당시 베이비 복스의 콘서트는 미국 LA의 KSCI 방송 주최 설날맞이 행사 중 하나였다. KSCI는 중국인 주주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미국 방송으로 중화권에서의 베이비 복스의 인기가 이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1순위로 추천된 것이었다. 설날을 명절로 여기는 현지 아시아권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펼친 당시 행사에서 베이비 복스는 약 50분간 자신들의 히트곡과 팝을 섞어 공연했다.

또한 2002년 말부터 일본 도쿄 TV에서 방영 된 애니메이션 '플라토닉 체인'의 주제곡을 불러 화제가 됐는데, 그 곡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일본어로 재녹음하였다. 2003년 4월 말에는 도쿄 시부야 라이브홀에서 미니콘서트를 열어 일본 시장에 대한 문을 두드렸다.

한편 중국 드라마 출연으로 인지도를 높인 베이비 복스의 김이지는 6개월 간 2억 원의 개런티를 받고 삼성 카메라 CF를 찍었다. 광고는 중국 전역에 걸쳐 방송되는데, 삼성전자 현지 법인을 통해 미화로 개런티가 지급되었다.

2003년 3월 21일과 22일,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열린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은 태국 정부가 주최하는 국제 가요제로, 태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권 톱가수들은 물론, 세계적인 스타들도 참여해 벌이는 옴니버스 가요제였다.

활동 종료후 코리안 뮤직 어워드(KMA)에서 올해의 가수상(대상)을 수상했다.

6집 활동과 동시에 중국에서 발표된 맥시 싱글 "I'm Still Loving You"가 대 히트를 기록하며 베이비복스는 중국내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중앙 인민라디오방송국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에서 "I'm Still Loving You"로 정상에 등극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외국 가수가 1위에 오른 건 베이비복스가 처음이다.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은 가수의 인기도와 라디오방송횟수, 음반판매량 등을 합쳐 매주 인기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으로, 가요관계자들은 "'보아의 오리콘차트 1위와 맞먹는 성과'"라면서 "'한국가수의 자존심을 세운 일'"이라고 축하했다.

2003년 연말, 베이비복스는 1999년 중국에 진출한 이후 4년간 해외공연만 45회를 달성하고 거리로 환산하면 90만 1500km 즉, 지구를 약 20바퀴를 돈거와 맞먹는 기록을 세워 기네스 북에도 오르며 한류스타로서의 위엄을 떨쳤다.

2004~2006 7집의 실패와 그룹의 해체[편집]

7집 Ride West (2004)[편집]

7집 음반의 준비를 시작하던 중 힙합 뮤지션을 다수 소유하고있던 벙갈로 뮤직이 아시아권 가수들을 찾기 위해 MTV와 채널[V]를 모니터하던 중 중화권차트 1위에 오른 바 있으며, 홍콩·태국·대만에서도 인기가 높은 베이비복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벙갈로뮤직측은 지난해 말 관계자를 한국에 보내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 SBS <인기가요> 등을 통해 베이비복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지켜본 후 미국 음반시장 진출을 제의하기에 이르렀고 DR뮤직과 함께 계약을맺으며 앨범 전체의 프로듀싱을 맡게되었다. 제니퍼 로페스가 랩과 코러스 등으로 참여하는등 지금까지의 국내 가수의 정규앨범에 세계적인 팝스타가 함께 노래를 불러 수록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고 힙합계의 전설 투팩이 생전 녹음했던 곡들을 샘플링하여 투팩이 랩을 하면 베이비복스의 래퍼 김이지가 이에 화답하듯 래핑하는 형태를 취하는 형태의 곡들을 녹음하게되었다. 2003년 겨울부터 녹음을 시작해서 2004년 1월의 모든 녹음과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끝마쳤고[22] 뮤직비디오에는 세계 최고의 경주용 자동차를 등장시키기 위해 홍콩 등지에서 차를 공수해 오는 등 40억원 가까운 제작비가 소요되었다. 앨범을 준비하던 2004년 4월에는 태국의 명문 골프홀인 방콕CC에 아일랜드홀인 10번홀 정면에 가로 20m, 세로 30m의 대형 베이비복스홀이 생기기도 했다. 이 모든것은 태국에서 베이비복스가 큰 인기를 얻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23]

2004년 7집 활동중 베이비복스의 이희진

2004년 4월, 7번째 정규 앨범이되는 <Ride West>를 발표한다. 타이틀곡은 <Xcstasy>로 벙갈로 뮤직의 소속 랩퍼인 플로스 피가 랩핑에 참여했고 SBS 인기가요를 통해 첫무대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방송 전날에 SBS 심의실 측은 <Xcstasy> 라는 제목으로는 방송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알렸고 부랴부랴 ‘환상’으로 제목을 바꿔 18일 방송을 마쳤다.[24] <Xcstasy>의 활동은 랩퍼 플로스 피의 다른 음반 작업때문에 미국으로 출국해야해서 2주만 계획되었지만 플로스 피가 베이비복스의 활동을 위해 음반 작업을 연기하고 총 4주동안 타이틀곡 무대에 올랐다. [25] 6월부터는 제니퍼 로페즈가 참여한 <Play Remix>로 후속곡 활동을 펼쳤다. 활동을 종료한 뒤 7월에 광주 염주체육관에서 '빨간 토요일'이란 타이틀로 단독콘서트를 계획했는데 이 공연은 투팍을 샘플링해 논란을 빚은 '엑스터시'를 비롯해 7집 신보 'Ride west'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꾸며질 예정이었지만[26] 이하늘과의 법정 다툼과 이미지 손상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다.

8월에는 일본 나카오카 후생회관에서 열린 ‘2004니가타-서울 산업 관광 문화교류사업전’ 전야제 무대에 서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고 도쿄의 홀리데이호텔에서 기자회견과 미니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으며 일본 언론들은 베이비복스의 일본 방문을 일제히 보도했다.[27] 11월에는 원자바오총리앞에서 중국 남녕에서 열리는 `제1회 CAFAIR(동아시아연맹) 박람회` 폐막식 공연에 참석해 열창의 무대를 꾸몄고 이 행사의 참여는 공연을 주관하는 CCTV 관계자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현지에서의 베이비복스 인기를 그대로 반증시켰다.[28] 가수 12월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대규모 합동 콘서트를 갖기도 했는데 이 공연은 이벤트성 행사가 아닌 유료 공연으로는 2002년 베이비복스 단독 콘서트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가수로서 이례적인 공연 허가를 받았으며, 주최측인 Vnet midas와 DR china는 이 공연을 주최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6개월간의 교섭 끝에 어렵게 공연 비준을 받아 절차가 까다로운 중국공연을 성사시켰다. [29]

이하늘의 미아리 복스 발언과 법정 다툼[편집]

활동 중반 케이블TV M.net의 '힙합더바이브' 코너에 게스트로 출연한 이하늘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죽은사람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며 공개 비난했고 이에 플로스 피는 “지적에 감사한다. 베이비복스 음악에 최선을 다했는데 하늘씨의 음악성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DJ DOC의 랩도 그저 미국랩을 빌려 쓰는 정도에 그쳤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이 없어 보인다. 자신도 남의 것을 가져다 활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것은 아니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공인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라며 DJ DOC 발언에 맞대응했다. 이 후 DJ DOC의 이하늘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장문의 베이비복스와 플로스 피를 비방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미아리복스'라는 성적 비하 단어를 사용하며 큰 물의를 일으켰고 베이비복스에게 큰 이미지 손상을 입혔다 이에 베이비복스 측은 이하늘에게 '6월19일까지 사과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30] 이하늘은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미아리복스’란 단어 선택은 내가 생각해봐도 직설적인 표현이었다며 사과했지만 베이베복스 소속사에 대해“당신들이 당한 명예훼손과 당신들이 실추시킨 투팍의 명예 중 어떤 것이 큰지를 생각해 보라”며 “나는 후자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DR뮤직의 윤등룡 대표는 이하늘에 대한 형사소송을 제기했다.[31] 하지만 동료 연예인 김진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이번 사건이 베이비복스가 최근 앨범에 미국의 래퍼 투팩(2pac)의 랩을 삽입한 데서 시작된 것임을 지적하며 "어쨌든 이번 일로 투팩이 조금은 웃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고[32] 많은 힙합 아티스트의 팬들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비난의 말을 던졌다. 이 사건에 대해 가요 관계자 강모씨는 "힙합 뮤지션들이 아이돌스타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 힙합계에서는 흔히 있는 '디스'의 한 형태"라며 "이하늘이 에미넴을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특정 연예인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33]

투팍 레코드사의 저작권 고소[편집]

투팍의 어머니가 설립한 아마루(Amaru) 레코드사 측은 라이센스 계약을 하지 않고 투팍의 음악과 트레이드마크를 사용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베이비복스와 기획사를 고소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34] 이에 대해 베이비복스는 "투팍의 음악 샘플링은 미국 힙합의 메카 '벙가로 뮤직'의 한 업체로부터 제의를 받아 합법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아마루는 투팍의 전체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법적인 하자가 없으며 투팍의 저작권은 아마루 뿐 아니라 투팍 스테이트, 인터스코프 등 여러 레이블이 공유하고 있으며, 베이비복스는 작년 11월 데스로우와 DTTG로부터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음원, 초상권 및 영상 사용권을 구입한 뒤 지난 앨범을 출시했다고 밝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35] 결국 합법적으로 음원을 사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헤프닝으로 끝났다.

앨범의 부진과 심은진의 탈퇴[편집]

이하늘과의 접전으로 베이비복스는 7집의 프로모션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고 결국 9월. 호주에서의 스케쥴을 끝으로 모든 활동을 종료했다. 12월, DR 뮤직의 대표 윤등룡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심은진과의 재계약을 성사하지 못했고 팀에서 탈퇴한다는 소식을 알렸다.[36]

해체[편집]

2004년 연말 심은진이 탈퇴를 하자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중국인 멤버를 추가로 투입한다고 언론에 밝혔다.[37] 하지만 2005년 DR뮤직은 윤은혜와의 재계약이 불발됐으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탈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38] 이듬해 이어서 나머지 멤버들이 차례차례 탈퇴하게 되면서 결국 베이비복스는 9년간의 활동끝에 총 8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2006년 2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베이비복스 Re.v[편집]

2007년, DR뮤직은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따온 베이비 복스 리브를 제작하며 본래있던 멤버들을 전부 다르게 교체하게 된다. 활동 초반에는 베이비복스 팬들의 반발이 심했으나 타이틀곡 'Shee'로 나름대로 인기를 끌게된다. 하지만 2007년 멤버 명사랑이 탈퇴하고 이어 한애리도 탈퇴하고 새 멤버 오민진박소리를 영입하지만 줄곧 멤버들이 탈퇴하게 되며 2009년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뒤 이어 2010년 베이비복스 리브, 베이비복스와 컨셉이 많이 닮아있는 라니아가 출범했다.

불화설과 해체 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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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는 무대에서의 강렬한 이미지와 멤버들간의 나이차로 인해 불화설이 생겼고 멤버들이 한 멤버를 따돌림시켰다는 루머가 돌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2010년 8월 22일 《SBS 김정은의 초콜릿》에 공식적 마지막 활동이었던 2004년 이후로 6년만에 지상파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 활동 당시 히트곡들을 열창했으며, 그동안 무수히 쌓여왔던 불화설의 진실을 밝혔다. 불화설은 전혀 아님이라고 밝혔고, 멤버 윤은혜가 베이비복스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배우로 완벽한 전업을 위해였다고 방송을 통해서 전했다.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훈훈한 모습이 보기좋다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이 후 간미연 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간미연의 친한 친구"에 동반출연하며 의리를 지켰다.

2010년 8월 10일 등촌동 SBS홀에서 "김정은의 초콜릿"을 녹화중인 베이비복스의 모습

현재 리드보컬 간미연은 2006년 솔로앨범을 발표해 2010년 디지털 싱글 [미쳐가]로 좋은 반응을 얻고, 2011년 4월 신화에릭이 랩핑에 참여한 미니앨범 [WATCH]의 타이틀곡 [파파라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막내 윤은혜는 2005년 배우로 전업해, 배우로서 큰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배우로서의 자리를 굳혔으며 예능에서 보여준 소녀장사 이미지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된다.메인보컬이었던 이희진도 배우로 전업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는 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에서 연지연역을 맡아 연기력을 입증시키고 있다.리더였던 김이지는 결혼에 골인 한뒤, 아이를 출산해 방송을 쉬고 있는 중이며 서브보컬 심은진도 배우로 전업, 뮤지컬 등으로 좋은 활동을 펼치고 현재는 ETN에서 심은진의 Feeling up을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복스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지는 의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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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3일 메이저 데뷰한 그녀들의 1집 앨범은 페미니스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주제였으며, 일본의 걸 그룹 스피드 등을 모방한 다른 걸그룹과는 다르게 POP을 편승하여 '아시아의 스파이스 걸스'를 표방하였다.

걸그룹 최초로 장르를 도입한 그룹 역시 디바,O-24도 아닌 베이비복스였다. 1집 활동이 끝난 뒤 탈퇴했던 멤버 정시운은 뛰어난 랩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사회 정서 상 여성이 랩을 구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대중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디바가 힙합을 편승한다며 랩을 선보이게 되면서 베이비복스가 랩을 시도했던 사실은 대중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여성이 랩을 하는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증명해주는 헤프닝이 있다. 같은 해 11월에 데뷔한 S.E.S.의 데뷔곡 "I'm Your Girl"의 끝 부분 10초 쯤에, 여성 멤버 바다가 같이 따라부른 랩 파트 자체만으로 큰 논란거리가 되었었으며, 4대 PC 통신에서는 그 랩부분을 당장 삭제하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었던 헤프닝이다. 이러한 헤프닝은 그 당시 가요계의 분위기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를 반영해 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1집 때 랩을 담당하던 멤버 정시운의 탈퇴로 인해 정시운 대신 랩을 담당하게 된 멤버 김이지의 랩은 요즘 걸그룹들에서 대세를 이루는 저음 랩의 원조였다.


베이비복스는 K-POP 걸 그룹 최초로 섹시 코드를 도입했다. 베이비 복스의 멤버들의 평균 신장은 168cm로서 거의 170cm에 준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늘씬하고 섹시한 신체조건이다. 활동 당시에 다른 어떤 그룹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체조건을 가졌었던 그룹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장점을 그녀들은 한껏 부각시켰다. 1999년의 3집 '겟업'과 '킬러'는 엄청난 히트였다. 이 앨범으로 활동하는 동안 베이비복스는 아찔한 노출 의상과 현란한 율동 등을 선보이며 성적매력을 물씬 풍겼으며, 멤버 모두 춤에 능했기 때문에 안무도 대단히 섹시하고 격렬했다(요즘의 걸그룹들은 무용과 출신 멤버 혹은 춤 전담 멤버가 팀마다 한 명씩은 있는데, 베이비복스 멤버였던 김이지 역시 무용과 출신이다). 이러한 장점들은 이후 베이비 복스의 독보적인 성격을 결정지었다. 4집 'Why'(2000년), 5집 'Boyish Story'(2001년), 5.5집 '우연'(2002년), 6집 'Devotion'(2003년)에 이르기까지 베이비 복스는 섹시한 걸그룹의 지존이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민국의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으로 핫팬츠와 배꼽티, 염색머리, 피어싱 등을 착용했으며 당시에는 큰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의 K-POP 걸 그룹들은 베이비복스의 시도가 아니었다면 속살을 모두 가리고 나와야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보수적이었던 사회적 정서에 맞지 않게 지나친 섹시어필이라는 이유로 과소평가 당하기 일쑤였고, 베이비복스가 활동했던 당시에 활개 치던 안티 팬들은 베이비복스의 콘셉트에만 시선이 맞춰져 그녀들의 음악성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민국 여성 아이돌 그룹으로는 S.E.S.를 이어 두 번째로 해외에 진출했던 원조 한류 그룹이다. 하지만 S.E.S.는 주로 일본을 공략한 반면, 중국과 동남아를 먼저 공략한 팀은 베이비 복스였고, 그곳에서 최초의 걸그룹 한류 열풍을 만든 팀도 베이비 복스였다. 중국을 시작으로 일본,태국,대만,베트남,홍콩,미국등에 진출하여 아시아를 중심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최근 2010년대부터 다시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류 열풍의 주역인 K-POP 아이돌 그룹들이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그녀들이 먼저 열어 준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2004년의 7집 'Ride west'는 2009년의 원더걸스보다도 5년 앞서 영어 앨범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린 최초의 시도였다. 닥터 드레(Dr.Dre) 등이 소속된 미국 음악사에게서 먼저 제의를 받아 투팍(2Pac)과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등이 참여하여 화제를 모았고,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 시장에 안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DJ.DOC의 이하늘이 공개적으로 베이비 복스를 디스하면서 상황은 끝났다(아마 한국 가요계에서 드물게 보는 공개 디스였을 것이다). 이하늘은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비 복스를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걸그룹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결국 심은진이 먼저 탈퇴했고, 윤은혜가 그 뒤를 따라 탈퇴했다. 팀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요즘 연예부 기자들은 걸그룹 계보의 시작을 S.E.S.핑클에서 찾는다. 그 다음에는 샤크라, 주얼리 등을 꼽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디바, LUV, O24, 클레오 등 S.E.S.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숱한 걸그룹들의 이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현재의 많은 걸그룹들이 S.E.S.핑클 선배들을 보고 자랐다고 말하며 그들을 따르고 싶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과연 그 걸그룹들의 사장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S.E.S.는 춤과 노래가 다 되었지만 거의 언제나 귀여운 이미지로 일관했다. 바다의 안정된 보컬과 유진, 슈의 외모, 춤 실력, 특색 있는 보컬이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키가 작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SM의 방침 때문이었을까, S.E.S.는 섹시함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한편 핑클은 춤이 전혀 되지 않았고 노래는 사실 옥주현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S.E.S.보다 큰 키를 가졌음에도 그들 역시 섹시함을 표방한 적이 없다('Now'에서 잠깐 시도는 했으나). 두 그룹 모두 현재 걸그룹들을 상징하는 섹시한 안무, 과감한 노출 의상, 팀마다 한 명씩은 있는 래퍼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연예부 기자들이나 걸그룹들은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 걸그룹들의 모습은 S.E.S.핑클이 아니라 베이비복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즉 걸그룹들의 사장들은 S.E.S.핑클이 아니라 베이비복스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사실말이다.

베이비복스는 동시대에 등장한 여타 걸그룹들의 모범이었다. 리드 보컬이 둘(간미연, 이희진), 서브 보컬이 둘(심은진, 윤은혜), 랩퍼가 하나(김이지)인 구성은 대부분 요즘 걸그룹들의 구성의 원조다. 또한 1997년 당시, 대한민국의 걸그룹중 가장 많은 멤버수를 가진 그룹이었고 오늘날에 익숙히 카라,원더걸스등이 5인조 걸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이비복스는 차별화 된 여성 아이돌 그룹이었다. 더 이상 S.E.S. 같은 귀여운 걸그룹이나, 핑클처럼 이미지로 승부하는 걸그룹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세는 결정지어졌다. 오늘날 포미닛, 애프터 스쿨, 시크릿, 레인보우 등 누구도 S.E.S.핑클의 성공 방정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그들 모두 베이비 복스의 길을 걸으며 그 세계를 레드 오션으로 만들고 있다.

한류 1세대, 대한민국 최초의 섹시 여성 댄스그룹 베이비복스는 자그마한 소속사로 인해 고급스럽지 못했던 마케팅, 대형 기획사에 비해 매우 미흡했던 소속사의 매니지먼트 능력, 수많은 추문들과 안티팬, 메이저급 기획사에 소속되었지만 그저 일본의 걸그룹을 베끼는 수준에 그친 걸그룹들에 가려져 과소평가 받았던, 시대를 앞서간 걸그룹이었다.

해외 활동[편집]

중국 활동[편집]

99년 11월 - 00년 1월 초창기 활동[편집]

1999년 11월, 중국에서 라이선스 계약을 채결하고 앨범을 먼저 발표한 베이비복스는 99년 3집의 국내활동이 끝나고 12월 북경 TV의 `밀레니엄쇼'에 출연하면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1월 4일부터 21일까지 북경 상해 등 주요도시에서 중국프로모션투어로 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이 후 호남위성TV에서 최고의 인기프로인 ‘쾌락대본영’(快樂大本營)의 스페셜코너에 참가,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공연 활동 내역[편집]

날짜 세부 내용
2000년 10월 24일 단독 콘서트 (시부야 On Air West)
2000년 12월 2일 Korea Super Expo 2000 슈퍼 라이브
2001년 1월 16일 Da Live 2001 (국립대 홀)
2001년 11월 16일 Korea Super Expo 2001 슈퍼 라이브 (인텍스 오사카)
2002년 11월 17일 NHK 한일 교류 드림 라이브 한국대표 (마쿠하리 멧세)
2004년 7월 30일 한일 적십자 자선 콘서트 (니가타 현 나가오카 후생 회관)

구성원[편집]

포지션 : 리더,서브보컬,메인래퍼

포지션 : 리드보컬

포지션 : 메인보컬

포지션 : 서브보컬

포지션 : 서브보컬

이전 구성원[편집]

포지션 : 서브보컬

포지션 : 리더,메인래퍼

포지션 : 메인보컬

포지션 : 서브보컬,피아노

앨범[편집]

앨범 판매량 (한터기준) 활동 곡 (순위)
1집 Equalizeher 45,338(1998년 9월 공식기록) 남자에게,머리 하는 날(47위),비밀
2집 BABY VOX II II 230,000 야야야(3위), Change(6위)
3집 Come Come Come Baby 300,000 Get up!(1위), Killer(1위), Missing You(3위)
4집 Why 200,000 (신나라레코드 기록) Why(2위), 배신(3위)
5집 Boyish Story 90,000 Game Over(3위),인형(5위)
5.5집 Special Album 440,000 우연(1위), Go(17위)
6집 DEVOTION 210,000 나 어떡해(1위), 바램(7위)
7집 Ride West 80,000 Xcstasy(3위),Play Remix(9위)
최고 판매량 최저 판매량 평균 판매량 총 판매량
440,000 45,338 199,000 1,595,338

가요 프로그램 1위[편집]

연도 수상 내역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수상 경력[편집]

  • 1997년 클레오 음악잡지 이달의 음반 'EqualizerHer'
  • 1998년 SBS 가요대전 여자 신인상
  • 1998년 SBS 가요대전 인기상
  • 1998년 스포츠서울 가요대상 신인상
  • 1998년 밀리오레 인기상
  • 1999년 KM 가요대전 본상
  • 1999년 SBS 서울가요대상 본상
  • 1999년 SBS 서울가요대상 최고가수상
  • 1999년 SBS 가요대전 본상
  • 1999년 KBS 가요대상 본상
  • 1999년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가수상
  • 2000년 제1회 애견문화인의 상
  • 2000년 SBS 서울가요대상 인기상
  • 2000년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
  • 2000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신세대중창가요부문 수상[11]
  • 2000년 iTV 한국연예인대상 본상
  • 2001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1년 (주)모델라인 주최 가수부문 '베스트 드레서' 수상
  • 2002년 4월 10일 중국 라디오방송국 협회가 뽑은 ‘최우수 한류가수상’
  • 2002년 MBC 골든디스크 인기상
  • 2002년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공로상
  • 2002년 kmtv 코리안 뮤직어워드 한류특별상
  • 2002년 SBS 가요대전 본상
  • 2002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2년 적십자 홍보사절 임명
  • 2003년 SBS 서울가요대상 본상
  • 2003년 kmtv 코리안뮤직어워드 본상
  • 2003년 SBS 가요대전 본상
  • 2003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3년 itv 한국연예인대상 본상
  • 2003년 코리안 뮤직 어워드(KMA) 올해의 가수상(대상)
  • 2004년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공로상
  • 2004년 태국 채널V 시상식 아시아 센세이션상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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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