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복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베이비복스

베지밀뽀끄스.jpg

기본 정보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장르 댄스 팝,
활동 시기 1997년 ~ 2006년
소속사 DR뮤직
구성원
김이지 이희진 간미연 심은진 윤은혜
이전 구성원
정현전 정시운 차유미 이가이
대표곡(활동곡)
남자에게 (민주주의) 1997년
머리하는 날 1997년
야야야 1998년
Change 1998년
Get up 1999년
Killer 1999년
Missing You 1999년
Why 2000년
배신 2000년
Game Over 2001년
인형 2001년
우연 2002년
나 어떡해 2003년
바램 2003년
Xcstasy 2004년
Play 2004년

베이비복스(Baby V.O.X)는 1997년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여성 5인조 댄스그룹이다. '야야야','Get up','Killer','우연','인형','나 어떡해'등을 히트시키며 국내 최초 섹시댄스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00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K-POP 그룹 최초로 중국에서 단독콘서트 개최 및 중국 계림시 홍보사절, 국내 걸그룹 최초 일본 콘서트 개최, 중국 음악방송 차트 1위(K-POP 차트가 아닌 종합차트), 아시아 판매량 250만장 등의 화려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태국, 일본, 대만, 호주, 몽골 등에 진출하여 한류 1세대로 통할만큼 범 아시아적으로 사랑을 받기도 했다.

목차

데뷔 과정 - 1집 활동기 [편집]

1996년, DR뮤직에서 5인조 여성그룹을 기획하게 된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스파이스 걸스를 표방하며 기획된 그룹의 팀명은 "베이비 복스"로, 속뜻으로는 Baby Voice Of Expression의 약자이며 "신선하고 깨끗한 목소리를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사실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은 애초 1집에서만 사용하기로했던 팀명이었다. 1988년 새또래의 멤버 이가이 (본명 이희정)가 캐스팅되고 그 후 CF나 잡지등으로 활약하던 "이희진", 부산에서 가수를 꿈꾸던 "정현전", 잡지 모델로 활동하던 "정시운",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 ' 작곡가 신성호의 조카이자, 캘리포니아 출신 "차유미" 이 다섯이 모여 팀을 결성하게 된다. 미국에서 녹음을 마친 뒤 1996년 12월 경 데뷔 예정이었지만, 멤버 "이가이(이희정)"의 건강상태가 안좋아져 급하게 공개오디션을 개최하여 멤버 김이지를 섭외하게 된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때문에 데뷔를 미루던 김이지"는 끝내 1집 보너스 수록곡 <비밀> 녹음에만 참여하고 데뷔한다. 1997년 7월 3일, 그녀들은 경향신문을 통해 메이저 데뷔를 했다. 타이틀곡은 "민주주의"였지만, 사회를 비판하는 가사등의 이유로 지상파 3사에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말았다.(현재까지도 금지곡) 그리고 의상컨셉으로 바지쪽에 그려져있던 원모형안에 십자가가 그려진 마크가 한 종교단체의 마크와 흡사하여 그 단체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고 의상을 수정해야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타이틀곡의 부진이후 갱스터 디스코장르의 중독성 강한 곡 "머리하는날"을 내세웠고, 9월이 되서야 데뷔 2개월 만에 공중파 방송국에 출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한국의 스파이스 걸스"라 기획되었지만, 당시 최고의 인기 그룹 H.O.T와 닮아있어, "여성 HOT"로 홍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역효과가 되어 당시 H.O.T.의 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여성들의 지지를 받고자 기획했던 앨범은 별다른 성과 없이 막을 내릴 위기에 처하게된다.

멤버교체 [편집]

활동 중 멤버 차유미는 적응하기 힘든 연예계와 더불어 소속사의 열약한 환경탓에 미국으로 도망가게 된다. 차유미는 메인보컬이라는 큰 비중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멤버들은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머리 하는 날'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베이비복스의 촬영을 구경하던 고등학생 간미연을 영입하고 11월 초에 신문 및 방송을 통하여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멤버 교체를 통해 1집의 계획과는 반대로 귀여운 의상을 입고 어필했으며, 1집 초창기 보다는 인기를 끌게 된다. 하지만 성적이 저조하자 보너스 트랙으로 실렸던 "비밀"이라는 곡으로 활동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DR뮤직에서는 비쥬얼적으로 정현전과 정시운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힘들다는 판단 끝에 2명을 탈퇴시킨다.

시간이 흐른뒤 베이비복스가 이름을 알리고 난 후에 1집의 완성도 높은 노래와, 사회의 문제를 담은 가사가 화제가 되어 대한민국 가요계에 영향을 미친 100개의 앨범중 한개로 선정되었다.

  • 판매량은 5만장을 기록했으며, 1집 유통을 맡았던 유통사 Cream이 물량 확보를 하지못하여 음반 판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 가요프로 30위권 진입
  • 1집 종료 후, 정시운, 정현전 탈퇴

1998년 2집 BABYVOX Ⅱ [편집]

98년 2월, 밴드 컨셉의 앨범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밴드이미지는 히트 요소가 없고 당시 허술하고 부족하던 방송 시스템때문에 악기를 선보일수 없다는 판단하에 댄스곡으로 전향하여 안무를 짜고 7개월간 하루 7~8시간씩 안무연습을 하게 된다. 마침내 9월, 다른 사무실에서 걸그룹을 준비하던 심은진과 1집의 예정멤버 이가이를 합류시켜 2집을 발표한다. 작곡가 김형석이 프로듀스한 <야야야>는 발매 2주만에 가요차트 10위안에 들며 히트를 예고했으며 1집활동부터 지내왔던 합숙소에 팬들이 몰려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져 이사를 수차례가는 헤프닝도 일어났다. 뒤 이어 발표한 후속곡 <Change>또한 인기를 끌게 된다. 1집과는 상반된 이미지로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초창기의 컨셉을 좋아하던 팬들에게는 실망스러웠던 앨범이었다고 한다. 후속곡 활동중 팬클럽 "베이비 엔젤스"가 창설되었고, 연말 가요시상식에서 인기상,신인상등을 수상하며 2집활동을 마치게 된다. 활동 당시 DR뮤직이 판매량 신고를 하지 않음에 따라 판매량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KBS 뮤직뱅크 판매량 챠트에서 최고 5위를 기록해 최소 20만장 내외의 판매고를 올렸을것으로 추정된다.

  • 그 해 신인상, 인기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후보
  • 팬 클럽 베이비 엔젤스 창단

이가이의 탈퇴 [편집]

2집 활동 종료 후,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다. 멤버 이가이가 나이를 속인 것이 발각되어 탈퇴를 선언한 것 이다. 그녀는 1988년 데뷔한 여성 그룹 세또래의 일원이었고, 세또래 멤버들의 증언에 따라 4대 PC통신에 퍼져 결국 사장 윤등룡과 dr뮤직 측은 PC통신 천리안에 장문의 사죄문을 올렸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가이가 탈퇴함에 따라 1999년 3월 DR뮤직은 베이비복스 새 멤버 공개 오디션을 개최한다. 최종적으로 3인이 뽑힌 가운데 당시에는 파격적인 연령이었던 중학교에 재학중인 윤은혜가 최종 멤버로 뽑히게 되었고 베이비 복스의 막내로 합류하게 된다. 다른 그룹들과는 다르게 유난히 멤버 교체가 잦았던 베이비복스의 완전한 멤버가 결정된 계기가 되었다.

1999년 3집 Come x3 Baby [편집]

99년 봄, 윤은혜를 합류하고 약 7개월간의 공백기 끝에 통산 정규 3rd가 되는 <come come come baby>를 발표한다.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이틀 곡 <Get up> 한곡만 녹음을 해놓고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Get up>은 박진영이 작사에 참여를, 김형석이 작곡을 맡았으며 3집 녹음 중 귀신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서울에 위치한 녹음실에서 당시에 지방에 체류중이던 윤등룡대표를 보았다며 대박의 조짐이 일것 같다고 인터뷰를 한적도있다.

컴백 초반 <Get up>의 작사가 여부를 두고 각종 메스컴이 작사가 이름을 각각 다르게 기재하고 있어 팬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3집 앨범 자켓에는 "서윤경"이라고 기재가 되어있지만 한 지상파 방송국에선 "서윤정"으로, 또 베이비복스의 인터뷰와 각종 방송에서는 "박진영"이 작사했다고 밝혀 궁금증을 자아냈으나 실제로 작사는 박진영이 참여했으며 자신의 아내인 서윤정의 이름으로 저작권을 올렸다고 밝혔으며 <Get up>의 작사가는 박진영으로 보는것이 맞다.

<Get up>의 첫방송이 끝나자, 배꼽티와 다리를 쓸어올리는 안무, 자극적인 가사등으로 PC통신에서는 하루종일 베이비복스의 얘기로만 뒤 덮이는 헤프닝이 발생했다. 파격적인 무대 의상 등으로 화제를 모으는데에 성공한 그녀들은 <Get up>으로 베이비복스는 2년만에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수상했다.

데뷔 2년만에 첫 1위를 수상한 베이비복스의 모습.

그 인기를 몰아 발표한 후속곡 <Killer>도 대 히트를 기록. 당시 최고의 가수 H.O.T.,젝스키스,조성모 를 꺾은 노래였다. 이 후, 이벤트 형식으로 <Missing you>를 선보였지만 예상외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며 성공리에 3집 활동을 마치게 된다. 3집 활동 종료 후 베이비복스는 중국에 진출하였으며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의 홍보대사가 되기도 했다.


  • 그 해 본상,인기상,최고가수상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수상
  • 데뷔 후 첫 1위수상
  • 당시 중학생이던 윤은혜를 합류

스캔들과 안티 생성의 시작 [편집]

3집 활동 중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남성 틴팝 그룹 H.O.T.의 멤버 '문희준'과 베이비 복스의 멤버 간미연이 사귄다는 루머가 H.O.T.의 팬들 사이에 퍼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H.O.T.의 일부 극성 팬들이 지어낸 전혀 근거 없는 루머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은 전혀 사귀지 않았으나, 문희준이 일방적으로 간미연을 쫓아다녀서 생긴 일이었다.) H.O.T.의 팬들은 베이비 복스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수많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고, 침묵시위를 펼치고, 무대 위의 베이비 복스가 보는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기도 했다.

1999년 8월 20일 대구 동성로에 있는 한 대형 레코드 매장에서 팬 사인회를 연 베이비 복스는 '문희준 극성 팬이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일일이 청소년 팬의 가방 검사를 한 뒤 사인대에 줄 서게 했다. 그럼에도 한 여학생 팬이 간미연의 사인대 앞에서 문희준의 브로마이드를 꺼내놓고 사인하라고 윽박질러 매니저들이 긴급히 끌어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간미연은 1999년 8월 13일 서울 면목동의 한 레코드점에서 팀 동료들과 팬 사인회에 참석했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 한 여중생이 사인을 받아가며 악수를 청하더니 슬며시 면도칼로 간미연의 오른손 검지를 베려고 시도했던 것. 천만다행으로 1㎝ 정도 상처가 나긴 했지만 깊지 않아 응급조치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소속사 측은 "간미연과 문희준은 서로 마주 대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데 왜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 때문에 아예 간미연의 곁에는 2명의 매니저를 전담 보디가드로 기용하는 등 신변 보호 비상대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H.O.T.의 일부 극성팬들은 베이비 복스에게 '황산을 뿌리겠다'는 등의 테러위협을 했으며, 베이비 복스의 소속사 DR 뮤직에는 간미연을 향한 경고 및 협박성 항의전화가 쇄도하였고, '널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희준오빠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해줄게. 몸조심하길.'이라는 내용이 적힌 피 묻은 협박편지와 함께 간미연의 눈 부위를 도려낸 사진과 8개의 면도날을 동봉해 보내 간미연의 위해를 기도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여 큰 불안감과 충격을 받은 간미연은 며칠 간 방송 스케쥴을 소화할 수 없었으며, DR 뮤직이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요청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베이비 복스 소속사 대표 윤등룡의 딸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였고, 베이비 복스가 간미연의 모교인 성덕여자상업고등학교의 축제 행사에 참석했을 때 간미연은 후배들과 동료들로부터 수많은 욕설과 언어폭력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H.O.T. 극성 팬들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살해 협박사건을 수사 중이었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1999년 9월 15일 강남구 논현동의 베이비 복스 사무실에 또 다시 면도칼과 협박편지가 우송됐다는 베이비 복스 측의 신고를 받았다. 경찰서 측은 이를 수거하여 서울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지문 감식을 의뢰했다. 경찰은 또 다시 이런 협박편지가 온 것은 이번 수사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H.O.T. 팬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H.O.T. 팬클럽에 대한 정식조사도 검토하였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협박전화가 끊기긴 했지만 일부 PC통신엔 여전히 간미연의 대한 비난과 은근한 협박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H.O.T.의 팬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DR 뮤직이 H.O.T.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인기를 얻으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거나 '간미연에게 간 협박편지에 묻은 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혈액조사를 했는데 매니저의 혈액이었다', '마감뉴스에 자작극이라고 나왔다'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소속사와 간미연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며 터무니없는 루머를 재생산하기까지 한다.

물론 H.O.T. 팬들의 간미연 살해 위협 사건으로 인해 베이비 복스라는 그룹을 남녀 노소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려지게 하여 의도치 않은 유명세로 그룹의 홍보 효과를 얻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H.O.T. 팬들이 주장하던 '자작극설'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당시 베이비 복스의 소속사 대표 윤등룡은 소속사 홈페이지를 통해 H.O.T.의 팬들에게 입장 표명의 글을 직접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H.O.T. 측도 "교제설은 전혀 근거없다"며 이 소문을 일축했다.

1999년 10월 9일 서울 여의도 MBC 공개홀의 생방송 '음악캠프'와 10월 10일 등촌동 SBS 공개홀에서 열렸던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박지윤과 베이비 복스가 무대에 올라 각각 <아무 것도 몰라요>와 <킬러>를 부르며 춤을 추자 구름처럼 몰려든 H.O.T.의 팬들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길을 보내며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들은 흰색 풍선을 들고 입장해 H.O.T.가 나올 때는 열광적으로 이를 흔들고 다른 가수들에게도 마음에 들면 열심히 풍선을 흔들곤 했으나 H.O.T.의 문희준과 베이비 복스의 간미연, 강타와 박지윤과의 열애설 때문에 박지윤과 베이비 복스는 팬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거없는 소문에 애꿎게 여가수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변에서는 한마디씩하기도 했다.


2000년 4집 - 2001년 5집 [편집]

약 6개월뒤 그녀들은 3집의 인기에 힘입어 4집 발표한다. 타이틀곡 <Why>의 안무는 일본의 최고의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 등의 안무를 지도했던 "사쿠마 히로유키"가 참여했으며, 의상 코디로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등이 참여하며 화려한 제작진들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앨범의 전체적인 지휘 역시 전작품들을 프로듀싱한 작곡가 <김형석>이 맡았다. 음악성과 대중성을 추구한 타이틀곡 <Why>는 2000년 5월 2일, 중국 구이린에서 펼쳐진 ‘한중 우호의밤’ 공연에서 먼저 선보였고, 같은 달 13일 MBC 음악캠프를 통해 컴백무대를 가졌다. <Why> 활동 초반 PC통신 유저들은 일본의 대표 여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곡과 똑같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작곡가 김형석 측은 샘플CD조차 사용 안했다며 일축시켰고 이로 인해 우타다 히카루측과 얘기가 오고갔으나 전혀 사실무근임을 확인하고 헤프닝으로 끝났다.

2000년 4월 중국 계림에서의 베이비복스

<Why>로 다시 한번 히트에 성공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녀들에게 안티팬들이 극성에 달하기 시작되었다. 2000년 5월 25일 오후 8시30분께 한양대 안산 캠퍼스에서 예정된 경인방송의 <뮤직엔진>에 출연하기 위해 소속사 차안에서 대기하던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윤은혜를 향해 물총을 조준했다. 물총을 맞은 윤은혜는 통증을 호소하며 한참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이때문에 베이비복스는 공연을 취소하고 곧바로 서울 한남동 순천향 병원으로 이동, 윤은혜가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귀가했다. 병원에선 윤은혜가 각막 손상을 입어 4~5일 정도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밝혀 베이비복스는 당분간 방송 활동을 못할 위기에 놓였었지만, 안대를 쓰고 스케줄을 소화했고 이 후, 별다른 휴식기간 없이 다시 방송에 복귀했다.

또한 남성그룹 여성팬들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욕설을 뱉으며 위협하는 바람에 6월 중 개최된 팬사인회에서 H.O.T.의 팬들이 문희준의 동생이름을 언급하며 팬사인회를 방해하고 시비를 걸며 팬사인회를 안전하게 끝마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사인회장에서 빠져나오는 베이비복스의 벤에 계란과 돌을 던지며 폭언을 뱉으며 상식 밖의 행동을 펼쳤으며, 공개방송에서도 일명 "꺼져라 테러"로 베이비복스의 무대를 망쳐놨다. 이러한 일에 H.O.T.팬들은 사과는 커녕 오히려 더 비아냥 거렸고 이때의 행동은 지금까지도 많은비판을 사고있다.

경북 울산의 모 고교에 재학 중이던 C모양은 베이비복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자 ‘간미연 사건은 자작극’이란 소문을 퍼뜨리며 조직적으로 활동을 방해했다. 베이비복스의 3집 활동 때부터 수차례의 테러위협이 있어도 철없는 학생의 소행이거니 하며 그냥 넘겼던 DR뮤직은, C모양이 자신의 소재까지 밝히며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 2000년 7월에 경찰에게 베이비복스의 협박범으로 잡힌 C모양은 에이치오티의 여고생 팬이었다. 그러나 베이비복스가 처벌을 원치 않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2000년 7월 16일 일요신문에서는 안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주제로 간미연을 취재할정도로 안티들이 극에 달했었다.

활동 중 한 특집 방송으로 인해 스킨 스쿠버 촬영을하러 사이판으로 간 베이비복스는 태풍 주의보가 내려진지도 모른 채 바다속으로 들어갔다가 멤버가 물속에서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멤버가 또 교체될 뻔한 큰 상황에 닥쳤으나 다행히 멤버들이 모두 구조되었다.

수많은 안티와 추문에 휩싸인 베이비복스는 뒤 이어 후속곡 <배신>을 발표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던 섹시한 의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히트에 성공했으며 방송활동이 뜸했음에도 불구하고 SBS 인기가요 에서 최고 3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안티들의 공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세번째 후속곡으로 예정되어있던 발라드 곡 <허락>의 활동이 취소되었다.

4집 활동 종료 후 베이비복스의 모습

베이비복스는 중국에 클론이정현과 함께 콘서트를 하러 출국하여 무대에 올라갔지만 공연사기를 당하여 호텔비를 내지 못해서 호텔에 체류가 되어 비행기 티켓조차 구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이 점은 한류를 알리기 위해 무부분별하게 진출하여 나타난 사건이었다며 비판당했다.

2000년 10월 4집의 활동을 마치고 중국으로 넘어가 8만 관중앞에서 단독콘서트를 선보였고, 한인 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CF를 찍게되었다. 또 한, 200010월 22일 팬 사인회 및 콘서트 준비로 일본에 출국한 베이비복스는, 팬사인회 현장에서 230명에 육박하는 팬들이 모이는 바람에 제대로 사인회를 진행하지 못하며 그녀들의 인기를 입증시켰다. 다음 날 개최된 미니 콘서트에서 700백석이 매진되고도 모자라 많은 관객들이 그냥 돌아가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그 해 일본 메이저 음반기획사 소니뮤직 등에서 러브콜이 왔으나 중국활동으로 인해 제대로된 일본활동을 펼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의 바쁜 일정을 마친 베이비복스는 10월 28일 중국 계림시 관광사절로 위축받았다. 계림시측은, 베이비복스가 4집 타이틀곡 'Why'의 뮤직비디오를 계림시에서 촬영했으며 그녀들이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친 뒤, 관광객이 급증했고 아시아에서 고루고루 큰 인기를 끌고있는 베이비복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친 베이비복스는 11월 베이징에서 콘서트를 가졌으며 이는 외국인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단독콘서트를 가진 셈 이었다.

또 한, 이 시점부터 베이비복스의 중심적인 보컬을 맡고 있던 이희진의 분량이 다소 적어지고 서브보컬을 맡고있던 간미연의 분량이 늘어났으며, 포지션의 변화가 확연히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 그 해 인기상,본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후보
  • 중국 진출 및 한인 최초로 CF 촬영
  • 중국에서 80,000명의 관객을 동원해,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SBS 뷰티풀 라이프 [편집]

배신 활동 당시 "SBS 뷰티풀 라이프"에 출연 해, 故 조오련 수영 선수와, 일반인 참여자, 탤런트 소지섭과 대한해협 횡단에 동참했다. 많은 스케쥴에도 불구하고, 수영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 대한해협 횡단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4집 활동중 가장 뜻깊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5집 Boyish Story (2001) [편집]

2001년 5집 활동중 베이비복스의 모습

4집 활동이 끝난 뒤, 활발한 해외활동을 마친 베이비복스는, 2001년 본인들이 작사, 작곡에 참여한 5th 앨범 <Boyish story> 발표한다. 원래는 1월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5월로 컴백이 늦춰졌다. 늦춰진 이유에서는 멤버 전원이 앨범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어 작곡공부등의 이유로 컴백이 늦춰진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부터 베이비복스는 국내보다는 해외에 활동 비중을 두었고 5집 앨범을 당시에는 최초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일본,대만 등에 동시발표했다. 타이틀곡으로 선정됐던 <게임 오버>로 베이비복스의 기존 컨셉인 '섹시함을 탈피하고 보이쉬함을 추구한다'며 컴백했지만 멤버 심은진을 제외한 멤버들은 모두 섹시하고 여성스러움을 부각시키는 옷을 입고 무대에서자 항의를 받은적도 있다. 활동 후반 7월 2일, <Game Over>는 V채널에서 1위를 수상했다.

그리고 여자 가수로는 처음으로 비무장지대에서 단독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게임 오버 활동이 끝난 뒤, 소속사인 DR뮤직은 <게임오버>를 이을 후속곡을 <가까이>로 정하고 8월 말까지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언론에 공개했으나, 미디엄 템포의 댄스곡 '가까이'의 가사말은 진한 사랑 행위를 연상시켰고 팬클럽 사이트 등에서 ‘성을 상품화 시키는것 같다.수위가 너무 심하다’는등의 질타가 이어지며 베이비 복스의 공식 팬클럽 "베이비 엔젤스"는 소속사 DR뮤직에 공개 질의서까지 보내게된다. 이미 <가까이>로 지상파 방송사의 사전심의를 통과한 후였지만 부랴부랴 베이비복스는 후속곡을 <인형>으로 교체하게 된다.

2001년 7월에는 멤버 간미연이 중국 연예 잡지의 '한국 여성 연예인 가운데 최고 인기 연예인' 랭킹에서 김희선을 2위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리더 김이지는 한·중합작 20부작 드라마 '적혈매괴'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전례가 없던 회당 350만원의 파격적인 출연료를 받기로 해 중국 내 베이비 복스의 인기를 반증하기도 하였다. 또 이희진에게는 중국에서 드라마 출연 섭외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멤버들 가운데 특히 이희진에게 드라마 출연 섭외가 잇따르던 것은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는데, 자그마한 얼굴에 웃는 모습이 중국의 한족과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에 소속사에 들어 온 대본만 7~8개 정도였다.

2001년 7월 7일 심양을 시작으로 한 달간 7개 도시를 도는 중국 투어를 하였다. 그 전까지 홍보 차원에서 거의 무료로 공연해 왔던 베이비 복스는 당시의 투어 공연에서 상당한 수준의 개런티를 받았다. 50여개에 이르던 중국 내 자생 팬클럽의 성원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었다. 중국 공연을 마친 베이비 복스는 도쿄 등 4개 도시를 도는 일본 투어도 추진했다. 이미 일본 공연 기획사가 공연 제의를 해왔고 조건 등 마무리 작업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베이비복스는 중국에 위치한 산간벽이 어린이들을 위해 전산 학교를 세워 컴퓨터 80여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해외활동 중 베이비복스는 지난 해에 이어서 두번째로 중국에서 공연사기를 당했다. 베이비복스는 심양 지역에서 두번의 공연이 있었지만 개런티는 커녕 호텔비도 내지 못해서 체류되야만 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중국에 '베이비 복스 전산학교', '베이비 복스 쇼룸'이 생기다 [편집]

중국 베이징에는 베이비 복스의 이름을 딴 학교가 생기기도 하였다. 중국 정부에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산간벽지에 학교를 세워주는 '희망 공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1년 9월 27일에 베이비 복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중국 언론과의 회견이 대대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베이비 복스는 '현대모니터' 중국 법인(현대 톈진(천진) 다매체 유한공사ㆍ법인장 김호연)과 함께 베이징 근교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와 옌창현 칭룽전 초등학교 등 2개 학교에 42대의 컴퓨터와 현대모니터를 기증했다. 학생 정원 1,200명이었던 북경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에서는 아예 컴퓨터 교육 교실과 학교 간판을 베이비 복스로 갈아 달며 뜨거운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베이비 복스는 이후로도 컴퓨터를 기증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실시하여 중국 내 각 성에 베이비 복스의 이름을 단 학교들이 생기게 되었다.

전 해였던 2000년 10월에 계림시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바 있던 베이비 복스는 2001년 '여위쥐'(중국 내에서 여행ㆍ유람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으로 관광청에 해당하는 기관)가 새로 설립한 리조텔에 출자하여 리조텔 내부에 '베이비 복스 쇼룸'이 오픈됐다.

이 쇼룸에서는 베이비 복스의 CD 및 공연 사진과 브로마이드 등을 비치해 판매했으며 리조텔에서 발생한 수익금으로 계림시 초등학교에 도서를 기증하였다. 계림시는 베이비 복스가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이후 계림시의 한국인 관광객이 26% 증가된 점(계림시 방문 외국 관광객 증가율 1위)에 고무되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류, 관광 비용 일체를 계림시에서 부담하여 베이비 복스 멤버들의 부모님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2001년 11월 5일 계림시의 계산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는 '베이비 복스 흉내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이에 앞서 베이비 복스는 2001년 11월 3일 이 호텔에서 열린 국제 관광제 개막행사에 참가하였고, 4일에는 카퍼레이드, 5일에는 팬 미니콘서트에도 참여했다.

베이비 복스 측은 "지난 3년 간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됐지만 일부에서는 외국인들에 대해 견제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버는 만큼 투자하고 베푼다는 차원에서 중국 내에서의 공익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베이비 복스는 2001년 9월 한ㆍ중수교 9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심양(선양), 베이징 공연에서 기획사인 희래예술단(대표 유정자)으로부터 공연 개런티는 물론 체류경비까지 받지 못하는 등 사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공연을 강행하여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데 대해 중국 팬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그 해 본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 퀄리티 면에서 5집 앨범이 찬사를 받았다.
  • 멤버들이 직접 작곡레슨을 받고 앨범에 참여했으며 김이지가 작곡에 참여한 "부디"는 큰 호평을 받았다.

스페셜 앨범 (2002) [편집]

2002년 8월 15일 개최된 단독콘서트에서의 베이비복스

다음 해, 2002년. 이전 앨범들의 프로듀서 였던 김형석과 결별하고, 김창환과 작업한 < 스페셜 베스트 앨범 '우연' >을 발표한다. 원래는 3월 발표예정이었으나, 딜레이 되어 5월에 발표된다. 타이틀곡 <우연>은 3집이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되고 2주연속으로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1위 수상을 함과 동시에 월드컵 응원가로 채택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5.5집 활동과 동시에 베트남태국에 진출을 하고 CF와 음반사와 계약을 맺으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활동 중반 멤버 이희진이 모 방송에서 예능 오락프로를 녹화하던 중 말뚝박기 게임을 하다 척추를 부상당해 전치4주 진단을 받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고 동반 출연한 심은진은 찰과상을 입었다.

가요계의 불황기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복스 활동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1달 반 가량의 짧았지만 성공적인 활동 후, 그녀들은 활동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베이비복스 가요제"가 개최되었고 1차전에 약 4000명이 몰리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그곳에서 발탁된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장리인에게 2007년, DR뮤직의 윤등룡대표는 서울 중앙지법에 장리인과 그의 현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소장을 제출했다. 장리인이 소송에 휘말리게 된 것은 이미 지난 2003년 DR뮤직과 한차례 전속계약을 체결한 데서 비롯됐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각종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상당한 비용을 썼고 음반 준비도 서두르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어쩐 일인지 2003년 8월 장리인의 친모가 ‘공부를 계속 시키고 싶고 공부가 끝난 후 재계약을 체결하겠다’고 요청해와 국제적인 신의를 생각해 계약을 일시적으로 풀어줬다”고 설명했다. DR뮤직은 저간의 사정을 바탕으로 지난 1년여간 SM엔터테인먼트와 장리인을 잇달아 접촉했으나 협상이 원할치 못해 결국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계약서에 따르면 장리인은 계약파기시 손실액과 위약금 등 총 500만위안(약 6억4000만원)을 물어줘야한다”면서 “하지만 한국 음반기획사 간의 관계를 고려해 기존 장리인에게 투자됐던 비용에 해당하는 2억원만 돌려받자는 취지에서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1]

7월, 김이지는 중국 드라마 '적혈매괴'의 촬영을 위해 홀로 중국으로 떠나 약 두 달 간 현지에서 생활하였다. 이희진은 KBS FM '가요광장'의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였으며, 심은진은 2002년 8월부터 KBS '이색극장'에 출연하여 단막 오락극에서 코믹 연기를 펼쳤다. 윤은혜는 MTV의 VJ로 활동하였다.

첫 단독 콘서트 [편집]

2002815일에는 리더 김이지가 재학했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데뷔 6년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총 2회의 공연을 선보였으며, 콘서트는 성공적이었다.

베이비 복스는 그 동안 중국 무대에 주력하다보니 국내 팬들에 소홀하다는 질책도 많이 받았는데, 그 때문에 대중문화 수출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국내 팬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8월 15일의 국내 첫 단독 콘서트의 성공은 의미가 컸다. 베이비 복스는, "중국 팬들의 사랑도 좋지만 한국 팬들의 지지를 얻을 때 더 큰 힘이 난다"며 데뷔 이후 발표했던 모든 히트곡을 라이브로 열창하며 화려한 무대를 꾸몄다.

공연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쑈쑈쑈'. 기존 콘서트의 틀을 깨는 '난장 파티'를 연출하며 확실한 볼 거리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연 실황의 모습은 Mnet에서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방송에 송출되었고 추후에 VCD화 되어 발매 되었으나, 물량이 적어 지방에 사는 팬들은 구입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2002년부터 국내 활동에 주력하기로 했던 베이비 복스는, 콘서트를 끝으로 그 해 10월까지 멤버 각자의 특기를 살린 활동을 벌인 후 재집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성그룹 디바와의 마찰 [편집]

5.5집 활동을 마치고 KMTV에서 개최된 연말 시상식에서 3인조 걸그룹 디바와의 충돌로 인해 디바의 지니는 공연을 하기 싫다며 호텔로 잠적했고 두 그룹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져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서고 있던 중 디바멤버들은 모두 스테이지를 내려왔고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마찰들이 생겼으며 일이 너무 커지자 언론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큰 이슈였다. 이 일이 있고 10년 뒤 SBS의 예능 프로그램 강심장에 출연한 베이비복스와 디바는 이 사건에 대해 10년만에 입을 열였으며 디바의 멤버 비키는 리허설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베이비복스가 멤버 간미연 씨가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성의 없이 했다더라”고 당시 사건을 회상했다. 이어 비키는 “내가 선배고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화가 났다. 선배가 지나가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나 싶어 ‘인사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가, 똑바로 하던가’라고 말했다”고 전했으나 디바는 이미 1995년 룰라로 데뷔하고 디바에 리더로 합류했던 채리나가 탈퇴한 상황이었고 베이비복스의 초대 멤버였던 이희진,김이지등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실질적으로 베이비복스가 디바보다 앞서 데뷔한 선배임이 밝혀지고 이 사건에 대해 베이비복스 이희진은 “간미연이 평소 잠이 많은 친구인데, 그 때 너무 피곤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졸고 있었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라면서 “미연이가 자다가 말고 너무 놀라서 울면서 나갔다”해명했다. 디바와 베이비복스의 불화설에 대해 털어놓은 비키는 “그 땐 어려서 그랬는데 지금은 우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니, 이젠 그런 게 다 필요가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2]


  • 그 해 본상,인기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 베트남,대만 등에 진출 해 큰 인기를 얻었다.
  • 당시 월드컵 주제가 등으로 사용되었다.
  • 활동 중반에 라틴 믹스로 활동하였다.
  • 베이비 복스 역대 앨범중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5.5집 종료 후 [편집]

5.5집 활동을 종료한 그녀들은 일본 NHK 아시아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우연>과 <Killer> 두곡을 열창했으며, 이벤트 형식으로 EP형식의 앨범도 릴리즈 한 바 있다. 지난 2000년에서 열린 미니 콘서트 후에 2년만에 日에서 두번째 미니콘서트등을 개최하고 역시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일본을 비롯하여 L.A에서도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이 시점부터 미국 진출에 힘이 가해진다.

6집 DEVOTION (2003) [편집]

5.5집의 활동이 끝난 후, 그 해에 대한민국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4인조 틴팝 걸그룹 핑클S.E.S. 등이 홀로걷기를 선언하며 베이비복스역시 리더 김이지가 중국에서의 드라마촬영으로 인해 해체를 하는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증폭되었지만 이를 부정이라도 하듯, 2003년 통산 정규 6th가 되는 <DEVOTION>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전세계 동시발매였으며, 해외에서 선주문 40만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6집은 전세계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발매되어 중국의 영어 시험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은 앨범이었다. 타이틀곡 <나 어떡해>는 김창환이 작곡한 댄스곡으로, 슬픈가사와 신나는 멜로디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나 어떡해>로 활동 하던 중 멤버 간미연이 오전 스케줄을 위해 10시쯤 벤을 타고 올림픽 대로를 지나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팬들에게 큰 걱정을 끼쳤지만 다행히도 외상은 없었다.

활동 후반 SBS 인기가요에서 뮤티즌송 제도 도입 후 첫 여성그룹 수상에 성공했다. 후속곡은 팬들의 투표로 "Loveless"가 선정되었으나 <바램>으로 짧게 선보였고, 무대에서 선보인 윤은혜의 헤어스타일이 인기를 끌었다. 또 한 섬도물산과 "asap 브랜드"와 제휴를 맺고 패션사업가로 나섰던적도 있다.

20039월 멤버 이희진이 뮤지컬 <펑키펑키> 연습을 끝마친 뒤 새벽에 귀가하던 중 무장 괴한이 승용차를 타고 이희진에게 접근하여 이희진의 가방을 훔치고 폭행을 가한 뒤 도주했던 사건이 생겼었고, 베이비복스 멤버들이 뉴욕에 공연을 갔다가 항공기에 폭발물 오인 소동이 일어나 테러의 위협을 당해 20시간동안 공포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행 시간이 4시간 지체가 되어 SBS인기가요 스케쥴을 펑크 낼 뻔 했지만 다행히 스케쥴을 이상없이 소화해내는 헤프닝까지 발생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공연을 마친 뒤 중국의 영화배우 겸 가수인 곽부성이 베이비복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싶다며 두 가수가 저녁시간을 갖고 있을 때 중국 파파라치가 김이지곽부성이 함께 있는 사진을 퍼뜨려 스캔들이 나기도 했지만 각자 소속사측에선 사실이 아니라며 논란을 일축시켰다.

또 한, 베이비복스는 핑클을 이어 걸그룹으로는 두번째로 SBS에서 개최하는 "통일음악회"의 참여를 위해 평양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몽골 대통령에게 초청을받아 콘서트를 연적도 있었는데 개런티 대신 공로상을 받고 멤버 당 1000평 크기의 땅과 집 다섯채를 선물받으며 대한민국의 지상파 뉴스에도 등장할 만큼 큰 이슈였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멤버 이희진간미연이 알고보니 국가사기를 당한것이었다고 밝혀 다시한번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2003년 2월 9일에는 미국 LA 베벌리힐스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당시 베이비 복스의 콘서트는 미국 LA의 KSCI 방송 주최 설날맞이 행사 중 하나였다. KSCI는 중국인 주주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미국 방송으로 중화권에서의 베이비 복스의 인기가 이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1순위로 추천된 것이었다. 설날을 명절로 여기는 현지 아시아권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펼친 당시 행사에서 베이비 복스는 약 50분간 자신들의 히트곡과 팝을 섞어 공연했다.

또한 2002년 말부터 일본 도쿄 TV에서 방영 된 애니메이션 '플라토닉 체인'의 주제곡을 불러 화제가 됐는데, 그 곡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일본어로 재녹음하였다. 2003년 4월 말에는 도쿄 시부야 라이브홀에서 미니콘서트를 열어 일본 시장에 대한 문을 두드렸다.

한편 중국 드라마 출연으로 인지도를 높인 베이비 복스의 김이지는 6개월 간 2억 원의 개런티를 받고 삼성 카메라 CF를 찍었다. 광고는 중국 전역에 걸쳐 방송되는데, 삼성전자 현지 법인을 통해 미화로 개런티가 지급되었다.

2003년 3월 21일과 22일,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열린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은 태국 정부가 주최하는 국제 가요제로, 태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권 톱가수들은 물론, 세계적인 스타들도 참여해 벌이는 옴니버스 가요제였다.

활동 종료후 코리안 뮤직 어워드(KMA)에서 올해의 가수상(대상)을 수상했다.

2003년 6집 활동 중의 베이비복스

6집 활동과 동시에 중국에서 발표된 맥시 싱글 "I'm Still Loving You"가 대 히트를 기록하며 베이비복스는 중국내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중앙 인민라디오방송국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에서 "I'm Still Loving You"로 정상에 등극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외국 가수가 1위에 오른 건 베이비복스가 처음이다.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은 가수의 인기도와 라디오방송횟수, 음반판매량 등을 합쳐 매주 인기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으로, 가요관계자들은 "'보아의 오리콘차트 1위와 맞먹는 성과'"라면서 "'한국가수의 자존심을 세운 일'"이라고 축하했다.

2003년 연말, 베이비복스는 1999년 중국에 진출한 이후 4년간 해외공연만 45회를 달성하고 거리로 환산하면 90만 1500km 즉, 지구를 약 20바퀴를 돈거와 맞먹는 기록을 세워 기네스 북에도 오르며 한류스타로서의 위엄을 떨쳤다.

  • 그 해 본상,인기상,한류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1위
  • 전세계 동시 발매를 했던 앨범이었고, 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사회에 환원했다.

7집 Ride West (2004) [편집]

7집 활동 준비 중 방콕에 위치한 명문 골프장에 "베이비복스 홀"이 세워져 세계적인 골퍼들과 함께하는 행사도 계획할만큼 이미 해외에서는 자리를굳힌 베이비복스였다. 그리고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태국 게이 쇼에 베이비복스의 안무와 코디들을 모방한 여장남자들이 무대에 올라 한국 관광객들도 놀랍다며 베이비복스가 해외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입증 시켰고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점령을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의 활동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는일만 남았던 베이비복스였다.

미국에서 다수의 힙합 뮤지션들을 소유하고있던 벙갈로 뮤직에서 베이비복스를 눈여겨보던중 미국진출 프로젝트를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전체적인 방향을 미국 POP 시장에 돌려 팝 가수 제니퍼 로페즈2pac등의 음원을 샘플링하기로 했다.

2004년 1월, 제니퍼 로페즈가 신곡의 후반 부 코러스를 따로 녹음을 해주고 피처링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언론에 알리며 홍보를 시작했으며, 앨범 통산 7th가 되는 [Ride West]를 발표한다. 제목처럼 많은 프로듀서가 참여한 앨범으로 발매전부터 화제를 모았고, 프로듀서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2PAC의 앨범에 참여한 미국 프로듀서 FLOSS P가 참여했다. 또 한 뮤직 비디오에만 40억을 투자했다고 밝혀 이슈가 되었다. 베이비 복스는 이 뮤직 비디오에서 사망한 투팍의 미발표 곡을 듀엣으로 함께 부르는 것처럼 재녹음해서 선보였다. 대한항공 격납고는 B747-400과 같은 대형 항공기 2대와 중형기 1대가 동시에 주기할 수 있는 큰 공간으로, 자동차 레이싱을 하는 광장에서 베이비 복스가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내어 촬영 팀 모두 만족을 표했다.

수록곡 으로는 2pac의 생전 목소리가 담겨 발표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타이틀 곡 <Xcstasy>와 더불어 미국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가 직접 참여한 <Play Remix>등이 수록되었다.

2004년 7집 활동중 베이비복스의 이희진

7집 활동 시작함과 동시에 활동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지상파 방송국에선 "Xcstasy"라는 제목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SBS에서는 "환상"이라는 제목을 써야했다. 무대를 선보인 후, 가요 팬들에게 호불호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요차트 중상위권에 오르며 반응이 뜨거웠다. 타이틀곡 활동은 원래 2주로 계획되었지만 프로듀서 겹 랩을 맡은 FLOSS P가 예상보다 많이 한국에 머물게되어 한달로 연장되어 이루어 졌으며, 활동이 상대적으로 짧았던 이유를 알수있다. 활동 중순 대한민국의 음악 채널 Mnet의 프로그램 'HIPHOP THE VIBE'에 출연한 DJ DOC이하늘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투팍의 랩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며 베이비복스측에 공개 디스를 했고 이 과정에서 미아리복스라는 악의적인 별칭을 사용했다. 이 후, Xcstasy의 부분 중 투팩의 랩이 표절이라는 여론이 형성이 되면서 투팍가족들에게 고소를 당했으나, 합법적인 샘플링이었음을 인정받고 무마되었다. 또한 베이비복스의 소속사 대표는 이하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며 승소했다. 고소에서 승소했다는 사실이 기자들에게 알려지자 엄청난 기사가 쏟아질뻔했으나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일이 더 커지는걸 원하지않는다며 일단락시켰다. 하지만 소송에서 패한 이하늘은 공개사죄는 커녕 비아냥거렸고 사건이 끝난뒤 DJ DOC의 새앨범이 발표되면서 이하늘이 엄청난 힙합 뮤지션인냥 포장되어 마케팅으로 이용했다. 이후 이하늘은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사죄를 했으나,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알고지내던 기자에게 모두 연기였다며 전혀 반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큰 비난을 받았다.

사건이 진행될 동안 베이비복스는 부랴부랴 활동곡을 "Play Remix"로 재개했지만 흥행에 실패한다. 베이비복스는 활동정리후 8월 UN등의 인기 가수들과 함께 "6•25 참전 용사 돕기" 자선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태국에서 개최된 "한국 • 태국 프렌즈콘서트 "에서 무대를 선보이던 리더 김이지가 코뼈에 금이가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했다.

2004년 9월 베이비복스는 호주에서의 스케쥴을 끝으로 모든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끝내 심은진은 DR뮤직과의 재계약을 성사하지 못했다.

이 사건에 대해 가요 관계자 강모씨는 "힙합 뮤지션들이 아이돌스타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 힙합계에서는 흔히 있는 '디스'의 한 형태"라며 "이하늘이 에미넴을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특정 연예인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3]

그리고 일본 소속사와 억대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시장에도 정식 진출예정이었으나, 이하늘로 인한 이미지 타격과 더불어 멤버 심은진의 탈퇴로 계약이 무산되며 DR뮤직은 큰 타격을 받았다.

  • 배우 소지섭과 함께 대한항공 홍보대사로 위축받았다.
  • 그 해 한류공로상 등을 수상 / 가요프로 3위
  • 활동 중반 Xcstasy를 피아노 믹스로 리믹스해 활동하였다.
  • 상반기 걸그룹 판매량 1위, 뮤직비디오 차트 걸그룹 1위

멤버들의 탈퇴와 해체, DR뮤직의 매니지먼트 [편집]

심은진의 탈퇴로인해 심은진이 베이비복스를 배반했다는 기사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불화설이 생기게 된다. 소속사 dr뮤직 측에서는 심은진이 계약만료로 인해 솔로로 독립하고 싶다는 이유로 DR뮤직과의 계약을 종료했다고 밝혔다. 또한 dr뮤직측에선 외국인 멤버를 영입해 8집을 발표하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하지만 2005년 멤버 윤은혜가 탈퇴하며, 이듬해 이어서 나머지 멤버들이 차례차례 탈퇴하게 되면서 베이비복스는 2006년 2월에 데뷔 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짚고 갈 점은, 멤버들은 재계약을 못했던 이유다. 당시 가요계의 매니지먼트회사 들은 현재처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계약조건에 큰 간섭을 못 받았었기에,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약 10년간 활동하며 수익금 분배를 제대로 받은적이 없었음과 동시에, 제대로된 대우도 받지 못했고 그저 상품으로만 쓰였기 때문이다.

DR뮤직은 이러한 매니지먼트로 인하여 2009년에도, 베이비 복스 리브를 떠나보내야했다.

또한 DR뮤직은 가수이기 이전에 베이비복스는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 윤은혜가 있던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트 클럽등에 행사를 돌게 했고, 이미지 메이킹을 고급스럽게 하지못하여 상당한 음악성을 지닌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에 없어서는 안될 그녀들이었지만 DR뮤직의 이해할수없는 매니지먼트로 과소평가받고 무시당했다.

대한민국의 여러 음악평론가들은 베이비복스가 SM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메이저급 회사에 소속되어있었다면 더 크게 발전할수 있었으며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꿨을것이라고 밝혔고, 실제로 베이비복스는 이미지가 좋지않은 그룹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이 되어

같은 가요계의 선배였던 DJ DOC 등에게 만만히 보이고 공개디스를 받은적도 있었다. 그로 인해 수치심에 빠지고 회의감이 든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더 이상 활동을 이어나갈수 없었으며 이후의 활동에도 많은 이중잣대가 따라야만 했다.

베이비복스 Re.v [편집]

2007년, DR뮤직은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따온 베이비 복스 리브를 제작하며 본래있던 멤버들을 전부 다르게 교체하게 된다. 활동 초반에는 베이비복스 팬들의 반발이 심했으나 타이틀곡 'Shee'로 나름대로 인기를 끌게된다. 하지만 2007년 멤버 명사랑이 탈퇴하고 이어 한애리도 탈퇴하고 새 멤버 오민진박소리를 영입하지만 줄곧 멤버들이 탈퇴하게 되며 2009년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뒤 이어 2010년 베이비복스 리브, 베이비복스와 컨셉이 많이 닮아있는 라니아가 출범했다.

베스트 앨범 [편집]

2007년, DR뮤직에서 지난 베이비복스의 9년간의 활동을 담은 베스트 앨범을 기획하겠다고 팬들에게 전했으나 한국 발표가 무산되어 중국,태국,일본에만 발표되었다.

  • CD에는 우연 라틴 버전, Xcstasy 피아노 믹스, 나 어떡해 발라드 버전, 7집의 미 수록곡 fire[당시 가제는 'Hot'] 등이 수록되었고, DVD에는 지금까지의 뮤직비디오와, 윤등룡대표가 9년간의 활동중 에피소드 등을 설명하는 영상이 담겨있다.
  • 화보집도 수록되어 있다.
  • 2012년에 베이비복스 15주년을 앞두고 10주년 당시 국내 발매가 무산되어 불이익을 당한 국내 팬들이 베스트앨범 발매요청 서명운동을 벌였다.

불화설과 해체 후 [편집]

해체 후 그녀들은 2010년 8월 22일 《SBS 김정은의 초콜릿》에 공식적 마지막 활동이었던 2004년 이후로 6년만에 지상파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 활동 당시 히트곡들을 열창했으며, 그동안 무수히 쌓여왔던 불화설의 진실을 밝혔다. 불화설은 전혀 아님이라고 밝혔고, 멤버 윤은혜가 베이비복스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배우로 완벽한 전업을 위해였다고 방송을 통해서 전했다.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훈훈한 모습이 보기좋다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이 후 간미연 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간미연의 친한 친구"에 동반출연하며 의리를 지켰다.

2010년 8월 10일 등촌동 SBS홀에서 "김정은의 초콜릿"을 녹화중인 베이비복스의 모습

현재 리드보컬 간미연은 2006년 솔로앨범을 발표해 2010년 디지털 싱글 [미쳐가]로 좋은 반응을 얻고, 2011년 4월 신화에릭이 랩핑에 참여한 미니앨범 [WATCH]의 타이틀곡 [파파라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막내 윤은혜는 2005년 배우로 전업해, 배우로서 큰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배우로서의 자리를 굳혔으며 예능에서 보여준 소녀장사 이미지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된다.

메인보컬이었던 이희진도 배우로 전업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는 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에서 연지연역을 맡아 연기력을 입증시키고 있다.

리더였던 김이지는 결혼에 골인 한뒤, 아이를 출산해 방송을 쉬고 있는 중이며 서브보컬 심은진도 배우로 전업, 뮤지컬 등으로 좋은 활동을 펼치고 현재는 ETN에서 심은진의 Feeling up을 진행하고 있다.

예술가적 기교 [편집]

1997년 7월 3일 메이저 데뷰한 그녀들의 1집 앨범은 페미니스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주제였으며, 일본의 걸 그룹 스피드 등을 모방한 다른 걸그룹과는 다르게 POP을 편승하여 '아시아의 스파이스 걸스'를 표방하였다.

걸그룹 최초로 장르를 도입한 그룹 역시 디바,O-24도 아닌 베이비복스였다. 1집 활동이 끝난 뒤 탈퇴했던 멤버 정시운은 뛰어난 랩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사회 정서 상 여성이 랩을 구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대중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디바가 힙합을 편승한다며 랩을 선보이게 되면서 베이비복스가 랩을 시도했던 사실은 대중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여성이 랩을 하는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증명해주는 헤프닝이 있다. 같은 해 11월에 데뷔한 S.E.S.의 데뷔곡 "I'm Your Girl"의 끝 부분 10초 쯤에, 여성 멤버 바다가 같이 따라부른 랩 파트 자체만으로 큰 논란거리가 되었었으며, 4대 PC 통신에서는 그 랩부분을 당장 삭제하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었던 헤프닝이다. 이러한 헤프닝은 그 당시 가요계의 분위기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를 반영해 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1집 때 랩을 담당하던 멤버 정시운의 탈퇴로 인해 정시운 대신 랩을 담당하게 된 멤버 김이지의 랩은 요즘 걸그룹들에서 대세를 이루는 저음 랩의 원조였다.


베이비복스는 K-POP 걸 그룹 최초로 섹시 코드를 도입했다. 베이비 복스의 멤버들의 평균 신장은 168cm로서 거의 170cm에 준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늘씬하고 섹시한 신체조건이다. 활동 당시에 다른 어떤 그룹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체조건을 가졌었던 그룹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장점을 그녀들은 한껏 부각시켰다. 1999년의 3집 '겟업'과 '킬러'는 엄청난 히트였다. 이 앨범으로 활동하는 동안 베이비복스는 아찔한 노출 의상과 현란한 율동 등을 선보이며 성적매력을 물씬 풍겼으며, 멤버 모두 춤에 능했기 때문에 안무도 대단히 섹시하고 격렬했다(요즘의 걸그룹들은 무용과 출신 멤버 혹은 춤 전담 멤버가 팀마다 한 명씩은 있는데, 베이비복스 멤버였던 김이지 역시 무용과 출신이다). 이러한 장점들은 이후 베이비 복스의 독보적인 성격을 결정지었다. 4집 'Why'(2000년), 5집 'Boyish Story'(2001년), 5.5집 '우연'(2002년), 6집 'Devotion'(2003년)에 이르기까지 베이비 복스는 섹시한 걸그룹의 지존이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민국의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으로 핫팬츠와 배꼽티, 염색머리, 피어싱 등을 착용했으며 당시에는 큰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의 K-POP 걸 그룹들은 베이비복스의 시도가 아니었다면 속살을 모두 가리고 나와야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보수적이었던 사회적 정서에 맞지 않게 지나친 섹스어필이라는 이유로 과소평가 당하기 일쑤였고, 베이비복스가 활동했던 당시에 활개 치던 안티 팬들은 베이비복스의 콘셉트에만 시선이 맞춰져 그녀들의 음악성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민국 여성 아이돌 그룹으로는 S.E.S.를 이어 두 번째로 해외에 진출했던 원조 한류 그룹이다. 하지만 S.E.S.는 주로 일본을 공략한 반면, 중국과 동남아를 먼저 공략한 팀은 베이비 복스였고, 그곳에서 최초의 걸그룹 한류 열풍을 만든 팀도 베이비 복스였다. 중국을 시작으로 일본,태국,대만,베트남,홍콩,미국등에 진출하여 아시아를 중심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최근 2010년대부터 다시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류 열풍의 주역인 K-POP 아이돌 그룹들이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그녀들이 먼저 열어 준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2004년의 7집 'Ride west'는 2009년의 원더걸스보다도 5년 앞서 영어 앨범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린 최초의 시도였다. 닥터 드레(Dr.Dre) 등이 소속된 미국 음악사에게서 먼저 제의를 받아 투팍(2Pac)과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등이 참여하여 화제를 모았고,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 시장에 안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DJ.DOC의 이하늘이 공개적으로 베이비 복스를 디스하면서 상황은 끝났다(아마 한국 가요계에서 드물게 보는 공개 디스였을 것이다). 이하늘은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비 복스를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걸그룹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결국 심은진이 먼저 탈퇴했고, 윤은혜가 그 뒤를 따라 탈퇴했다. 팀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요즘 연예부 기자들은 걸그룹 계보의 시작을 S.E.S.핑클에서 찾는다. 그 다음에는 샤크라, 주얼리 등을 꼽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디바, LUV, O24, 클레오 등 S.E.S.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숱한 걸그룹들의 이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현재의 많은 걸그룹들이 S.E.S.핑클 선배들을 보고 자랐다고 말하며 그들을 따르고 싶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과연 그 걸그룹들의 사장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S.E.S.는 춤과 노래가 다 되었지만 거의 언제나 귀여운 이미지로 일관했다. 바다의 안정된 보컬과 유진, 슈의 외모, 춤 실력, 특색 있는 보컬이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키가 작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SM의 방침 때문이었을까, S.E.S.는 섹시함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한편 핑클은 춤이 전혀 되지 않았고 노래는 사실 옥주현에 의존하다시피 했다.S.E.S.보다 큰 키를 가졌음에도 그들 역시 섹시함을 표방한 적이 없다('Now'에서 잠깐 시도는 했으나). 두 그룹 모두 현재 걸그룹들을 상징하는 섹시한 안무, 과감한 노출 의상, 팀마다 한 명씩은 있는 래퍼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연예부 기자들이나 걸그룹들은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 걸그룹들의 모습은 S.E.S.핑클이 아니라 베이비복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즉 걸그룹들의 사장들은 S.E.S.핑클이 아니라 베이비복스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사실말이다.

베이비복스는 동시대에 등장한 여타 걸그룹들의 모범이었다. 리드 보컬이 둘(간미연, 이희진), 서브 보컬이 둘(심은진, 윤은혜), 랩퍼가 하나(김이지)인 구성은 대부분 요즘 걸그룹들의 구성의 원조다. 또한 1997년 당시, 대한민국의 걸그룹중 가장 많은 멤버수를 가진 그룹이었고 오늘날에 익숙히 카라,원더걸스등이 5인조 걸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이비복스는 차별화 된 여성 아이돌 그룹이었다. 더 이상 S.E.S. 같은 귀여운 걸그룹이나, 핑클처럼 이미지로 승부하는 걸그룹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세는 결정지어졌다. 오늘날 포미닛, 애프터 스쿨, 시크릿, 레인보우 등 누구도 S.E.S.핑클의 성공 방정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그들 모두 베이비 복스의 길을 걸으며 그 세계를 레드 오션으로 만들고 있다.

한류 1세대, 대한민국 최초의 섹시 여성 댄스그룹 베이비복스는 자그마한 소속사로 인해 고급스럽지 못했던 마케팅, 대형 기획사에 비해 매우 미흡했던 소속사의 매니지먼트 능력, 수많은 추문들과 안티팬, 메이저급 기획사에 소속되었지만 그저 일본의 걸그룹을 베끼는 수준에 그친 걸그룹들에 가려져 과소평가 받았던, 시대를 앞서간 걸그룹이었다.

해외 활동 [편집]

중국 활동 [편집]

99년 11월 - 00년 1월 초창기 활동 [편집]

1999년 11월, 중국에서 라이센스 계약을 채결하고 앨범을 먼저 발표한 베이비복스는 99년 3집의 국내활동이 끝나고 12월 북경 TV의 `밀레니엄쇼'에 출연하면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1월 4일부터 21일까지 북경 상해 등 주요도시에서 중국프로모션투어로 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이 후 호남위성TV에서 최고의 인기프로인 ‘쾌락대본영’(快樂大本營)의 스페셜코너에 참가,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공연 활동 내역 [편집]

날짜 세부 내용
2000년 10월 24일 단독 콘서트 (시부야 On Air West)
2000년 12월 2일 Korea Super Expo 2000 슈퍼 라이브
2001년 1월 16일 Da Live 2001 (국립대 홀)
2001년 11월 16일 Korea Super Expo 2001 슈퍼 라이브 (인텍스 오사카)
2002년 11월 17일 NHK 한일 교류 드림 라이브 한국대표 (마쿠하리 멧세)
2004년 7월 30일 한일 적십자 자선 콘서트 (니가타 현 나가오카 후생 회관)

구성원 [편집]

이전 구성원 [편집]

앨범 [편집]

앨범 판매량 활동 곡 (# 순위)
1집 Equalizeher 52,035 남자에게,머리 하는 날(#32),비밀
2집 BABY VOX II 201,884 야야야(#02), Change(#02)
3집 Come Come Come Baby 337,503 Get up!(#01), Killer(#01), Missing You(#04)
4집 Why 222,731 Why(#02), 배신(#03)
5집 Boyish Story 100,140 Game Over(#01),인형(#05)
5.5집 Special Album 350,994 우연(#01), Go
6집 DEVOTION 129,433 나 어떡해(#01), 바램(#7)
7집 Ride West 70,556 Xcstasy(#04),Play Remix(#16)
최고 판매량 최저 판매량 평균 판매량 총 판매량
350,994 52,035 183,159 1,465,276

수상 경력 [편집]

주석 [편집]

  1.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