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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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38년)에 조선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위해 청의 제안에 의해 세워진 경계비이다. 세워진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닌 남동쪽으로 4km아래의 해발2150m의 분수령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의해 철거되었고, 현재는 돌무덤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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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

비 면에 대청이라고 횡서(橫書)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고 각서하였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고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은 鴨綠江이고, 동쪽은 土門江이며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워 명기한다는 것이다. [1]

[편집] 설립 배경과 과정

백두산 정계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대 때이다. 강희제는 만주족의 발상지로서 백두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1677년 12월에는 백두산을 ‘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다.<淸聖祖實錄> 강희12년9월2일병자 이후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고 백두산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지속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조정은 영고탑회귀설 등 대청 위기의식 등의 불안감으로 이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皇旨로 이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2] 이에 청나라는 목극동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맞이하여 백두산 정상인 천지에서 내려와 수원을 찾아내고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사계를 한 이후에 경계에 따라 설책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측은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북평사는 설책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 정한 책임이 두려워 목극등이 지정한 수원에서 남쪽으로 20리를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3]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되었지만, 이를 청이 알게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강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이를 묵인하였다.

[편집] 수립의 의의

조 선과 청나라 양국은 국경을 명확히 하고 이를 명문화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육지가 이어지는 백두산의 남쪽 부분을 조선이 영토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더불어 백두산에 대하여 조선의 宗山의식이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정계 후에 제작된 지도에 들어서야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 영고탑회귀설 등을 극복하고 청에 대한 불안감을 종식시킬 수 있게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4]

[편집]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 간도의 귀속문제와 더불어 백두산정계비의 ‘東爲土門’의 해석이 문제된다. 즉 비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 토문강이므로 이른바 동간도에 일대가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편집] 설립당시의 토문강에 대한 조선의 인식

숙종 시기의 이조참의 이광좌에 따르면 ‘황지의 이른바 토문강이란 華音(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합니다’라고 하였다.<비변사담록> 64책 숙종 38년 2월30일 또한 정계비를 설립한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동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差官接待事宜別單’에도 土門과 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같은 재야의 저술서를 보아도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또한 사계 당시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 천지의 이남을 조선의 경내로 해야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5] 더불어 정계비 수립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동이 역관김지남에게 경계에 대해서 묻고 김지남이 천지 이남을 조선의 경내로 주장함에 목극동이 이를 크게 다투거나 힐책하지 아니하자 접반사 박권이 기뻐하며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6] 즉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천지의 이남,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서 이를 조선의 경내로 하는데 합의한 것을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편집] 설립이후의 사정 변화

실제로 정계비의 해석이 문제되는 것은 170여년이 지난 고종대에 와서이다. 1860여년을 전후로 해서 조선인들은 세도정치의 수탈을 피해서 간도지역으로 많이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간도일대가 1677년 이후 청의 봉금지역으로 청인들은 거주가 금지된 지역이었고, 청나라의 힘이 약해졌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 청이 1881년 길림장군 명안,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어윤중·김우식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였고, 이후에는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즉 정계비 설립이후 170여년 동안에도 계속 토문강은 두만강이라고 인식되었으나, 간도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또한 청나라의 힘이 많이 약해진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은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기화로 ‘동위토문’의 해석을 문제삼으며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7]

[편집] 토문 혹은 두만의 의미를 둘러싼 최근의 연구

최근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土門투문’의 어원은 여진어로 구멍·동굴·샘·협곡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즉 토문강이라고 불리는 강은 특정된 하나의 강이 아니라 이런 특징을 가지는 하천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와도 비슷하다. 반면에 ‘豆滿투먼’은 여진어로 ‘萬’, 즉 많고 풍부함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한다. 이는 토문강은 여럿일 수 있지만 두만강은 하나 뿐임을 의미한다.[8] 이렇게 본다면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의 토문강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킬 수도 있다.

[편집] 참고자료

  • 숙종실록
  • 이광원,조선 초 기록중 '두만' 및 토문의 개념과 국경인식, 문화역사지리 제19권 제2호(2007) 45-57
  • 이화자, 17~18세기 월경문제를 둘러싼 조청 교섭,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논문, 2003
  • 조병현 이범관 홍영희, 지적학 측면에서 본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연구, 한국지적한회지 제23권 제1호 2007.6(1) : 17~28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편집] 주석

  1.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B9%E9%B5%CE%BB%EA+%C1%A4%B0%E8%BA%F1&masterno=72505&contentno=72505
  2. 동문휘고 원편 권 48, 강계 5~6쪽
  3. 숙종실록 권1, 숙종 38년 12월 병진
  4.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105
  5. 비변사담록 64책, 숙종38년 3월 24일
  6. 숙종실록 권3, 숙종38년 5월 정해
  7. 조병현 이범관 홍영희, 지적학 측면에서 본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연구, 한국지적한회지 제23권 제1호 2007.6(1) : 20페이지
  8. 이광원,조선 초 기록중 '두만' 및 토문의 개념과 국경인식, 문화역사지리 제19권 제2호(2007) 4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