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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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
Kolleen Park
Kolleen Park from acrofan.jpg
기본 정보
본명 박 영미
출생 1967년 5월 1일(1967-05-01) (46세)
미국 미국
국적 미국 미국[1]
직업 음악가
활동 시기 1989년 ~ 현재
가족 킴 박(언니)
켈리 박(언니)
소속사 킥 뮤지컬 스튜디오
호원대학교 주임교수

박칼린(Kolleen Park, 한국명: 박영미, 1967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 감독·교수이다. 연극배우, 보컬 트레이닝 전문가, 음대 교수, 음악 전문 감독, 뮤지컬 연출 등 공연계에서 많은 직업을 거쳐왔다.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아버지 '박근실'과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아이렌' 사이에서 태어나[2] 내내 한국 부산직할시(현재 부산광역시)에서 살면서 한국 전통 문화를 습득했고 한국 무용과 피아노로 음악 예술을 시작했으나 9살에 다시 미국으로 가 첼로를 배우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여고 2년을 다니느라 부산에서 생활했다.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 종합예술대학에 진학해 첼로를 전공했으나 1991년 돌연 국악을 배우려 입국. 서울대학교 국악 대학원에 입학하여 명창 박동진에게 발탁되어 판소리를 사사했다. 이후 부산 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대한민국 음악감독 1호가 되었다. 2002년 《오페라의 유령》, 2004년 《노트르담의 곱추》, 2006년 《아이다》, 2009년~2010년 《시카고》 등등 7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이고 2010년에는 KBS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현재 소속사는 킥 뮤지컬 스튜디오이며 호원대학교 뮤지컬과 겸임교수을 거쳐 동아방송예술대학 공연예술계열 뮤지컬전공 전임교수로 재직했으다.[3]. 현재는 KAC한국예술원 뮤지컬학부 학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산하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생애[편집]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편집]

아버지는 195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인텔리였다. 미국에 대한민국 유학생이 스무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학생이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크리스마스 때 미국 유학생들에게 친필로 카드를 보낼정도였다.[4] 어머니는 5살 때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5] 1944년 고향 리투아니아가 구 소련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었다.[6] 아버지가 대학 2학년이던 시절 어머니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성악 공부를 한적이 있었고 각 나라의 전통 노래를 배웠는데 그중에 아리랑이 끼어있었다. 1950년대였던 당시에도 180cm가 넘을정도로 키가 컸던 아버지는 동양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7] 어머니는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배워온 아리랑을 불렀고 이후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8] 둘다 전쟁을 겪었던 아픔과, 비슷한 크기에 멀리있던 조국이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박칼린은 그리하여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칼린은 어머니에 대해 "생명력이 강하시고 삶과 인간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대화를 중시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필요할때만 말을 건네는 성격이다. 국제 결혼이 흔치 않던 시절 아버지는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해 세 명의 딸을 낳은 상태였고 가족사진을 사촌형님한테 보내 "부모님한테 잘 말해달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렸다. 어머니는 당시 부산 수영국제공항을 통해 세 딸을 끌어안고 먼저 한국에 와 시부모님한테 먼저 인사를 드렸다. 이를 본 친할머니는 두 달을 드러눕고 말았다. 일이 남아있던 아버지는 2~3달 뒤에나 한국에 왔다.[9]

어린 시절[편집]

미국에서 태어나 어릴적 한국에 온 후 부산에서 7년을 살아온 박칼린은 처음으로 부산사투리를 배웠다.[10] 게다가 친척들중엔 전라도 출신이 많아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 일본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쓰던 일본말까지 다양한 언어를 쓰면서 자라왔다. 그러나 연극을 한 이후로 표준어를 쓰게 됐다.[11]

부산에서 지낸 어린 박칼린은 내성적으로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서구식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진 않았다. 8살때부터 화교 학교도 다닌 박칼린은 그곳에서 중국어(한어)도 쓰려고 노력하면서 언어와 국적의 장벽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앞집 언니 친구들이 학교 숙제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야 된다며 놀이터에 가서 모래를 주워담고 있는데 갑자기 중학생이 오더니 "너는 너희 나라로 가라"며 혼을 냈고 그때 정체성의 혼란을 처음으로 겪었다.[12] 박칼린은 한국무용을 배웠던 큰언니 킴벌리, 개나리합창단원이었던 작은언니 캘리,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 아이렌 밑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박칼린은 부산에서 잘 적응했으나 9살이 될 때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11] 영어 영문학을 전공한 어머니는 10세 이전에 언어를 배우면 억양, 사투리, 발음 등 습득 속도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언니들의 11살이 되기 전에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영어를 잊어버린 박칼린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 1년 먼저 간 언니들을 따라 1976년 미국에 간 박칼린은 언니들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을정도였고 공항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겨우 언니들을 알아봤다. 외모가 서양쪽에 가까워 미국에서 적응이 쉬울걸로 예상했으나 이미 한국문화에 적응해버린 박칼린은 한국 특유의 문화와 미국문화간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11] 그렇게 미국에서 지내다가 다시 부산으로 와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됐다. 여름방학때 할머니를 보러 한국에 놀러왔다가 언니 둘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박칼린은 한국에서 그냥 있겠다고 하여 고등학교 2학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진학한 경남여자고등학교는 명문에 속해있었으나 칠판을 가득 매운 수업내용 등 미국학교와 확연히 다른 교육방식에 또 다시 적응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특히 영어선생님은 미국에서 생활하다 온 박칼린의 눈치를 보며 수업을 하는 웃지못할 상황도 벌어졌다.[13] 공부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예술방면에는 관심이 많았다. 연극반 등 특별활동을 하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고 처음으로 무대에도 섰다. 이때 음악을 맡았던 《대왕은 죽지 않는다》란 작품으로 고교경연대회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14] 대금과 가야금도 배웠다.

대학 시절[편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대학 재학 중에는 1989년대한민국MBC 대학가요제에서 《사막의 비》라는 곡으로 참가하여 본선 진출 입상을 한 바 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으로 다시 귀국하여 1991년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했다.[15] 7~8살때 부산에서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친밀감이 있었고 국악의 멜로디에 이끌려 국악과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 무형문화제로 지정되어 판소리를 하던 명창 박동진에게 선택되어 사사했다. 대학원에서 국악과를 다니고 있을 때 하와이에서 열린 명창·명인들의 공연이 있었을 때 박칼린은 무용선생님의 조수로 따라갔다. 당시 박동진을 모시지도 않았었고 같이 몇번 식사한 정도도로 서로에 대해 아는것이 거의 없었으나 마지막날 식사자리에서 박동진이 박칼린에게 "넌 소리를 해야겠다"고 하며 수업료도 받지 않고 박칼린을 가르쳐줬다. 박동진은 박칼린을 인간문화재 후계자인 전수자로 삼고싶어해 직접 문화재청에 가서 문의했더니 "한국의 문화재를 등록해 매년 지원금도 나오는데 외국인에게 해줄수는 없다"는 답변을 듣고 무산되기도 했다.[16]

뮤지컬과의 인연[편집]

박칼린은 미국에서 어렸을때부터 뮤지컬을 접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 연주자와 배우로 뮤지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엔 뮤지컬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박칼린이 부산에서 연극을 시작해 그게 인연이 되어 서울로 진출해 정극에서 활동하려던 찰나에 뮤지컬 《명성황후》팀에서 음악감독 제의가 들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1995년에 관객에게 선보인 《명성황후》는 배우도, 시설도 준비되어 있지 않던 황무지였다.[17] 박칼린은 1995년부터 1997년 미국 뉴욕 공연까지 《명성황후》에 참여했다. 일부 제작진들은 외국 출신이던 박칼린에게 불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중 어느 사건으로 인해 박칼린이 인정받는 계기가 왔다. 《명성황후》대본과 기본작곡은 되어 있었는데 편곡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상태였다. 20대 초반이었던 박칼린은 호주로 달려가 피아니스트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녹음기 하나 켜놓고 백지상태였던 모든 음향효과와 배경음악 등을 말로 표현하면서 밤새 만들어갔다. 모든 편곡이 완성되고 CD가 완성되어 이를 들고 한국에 오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 음반을 들려줬다. 배우와 제작진 30~40명이 모두 앉아 박칼린이 만들어온 것에 주목했다. 주요 장면들의 배경과 조명, 음악들을 목소리로 묘사하고 모든 배역의 노래를 다 부르면서 2시간 넘게 공연을 혼자 재연하자 제작진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11] 이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7년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11년까지 1000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했다.[18]

남자의 자격 출연[편집]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 출연해 인기를 얻었고, 칼린이 직접 기획한 컴필레이션 앨범 Kolleen Selects는 발매 3주만에 2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19] 이를 계기로 하루에 200~300통의 전화가 올정도로 많은 섭외요청이 있었다.[20]

에피소드[편집]

1996년 뮤지컬 《겨울나그네》 공연중 립싱크 사건이 있었다. 뉴욕 극장가 브로드웨이나 런던 극장가 웨스트엔드에서는 립싱크를 하는 경우가 없다. 당시 한 배역을 3명이 연기했는데 갑자기 이 세명이 모두 공연을 못나온다고 통보해버린 것이었다. 자기가 안나가도 서로가 나가면 되겠지 생각하여 스케줄을 잡아버린 탓이었다. 그 배역은 매력적임과 동시에 어려웠던 캐릭터였다. 어쩔 수없이 다른 배우를 3~4일간 벼락치기로 연습을 시키고 작곡가 김형석이 지휘를 하고 박칼린은 연주자 공간인 무대 아래에 숨어서 배우들의 노래를 다 부르며 립싱크를 시켰다.[21]

2010년 시카고 공연에서 여장남자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장하고 나와야 했다. 노래도 여자처럼 소프라노 목소리를 내야 했는데 그 목소리를 할 수 있는 배우가 거의 없었다. 감기가 유행이던 시절 제작진에게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박칼린은 해당 배우의 목소리가 완전히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고서는 몇년 전에 연기했던 배우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고 할 수없이 박칼린이 지휘와 노래를 하면서 배우가 립싱크를 했다.[22]

철학[편집]

박칼린은 뮤지컬과 <남자의 자격> 방송에서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박칼린 리더쉽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오고 있다. 박칼린은 리더쉽에 대해 "아래위 수직이 아닌 수평이다"라고 말한다.[23] 서로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고 진실되게 서로에게 장단점을 말해줄 수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것이 리더라고 생각한다.[11]

박칼린은 한 번 결혼 후 이혼한 경력이 있으나 이후 재혼은 하지 않았다. 독신주의는 아니라고 말한다. 박칼린은 화려하고 열정을 쏟아붓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24] 서로에게 평생을 일과 열정을 다해 서로에게 불을 지펴주는 뗄감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25]

학력[편집]

약력[편집]

  • 2012년 KAC한국예술원 뮤지컬학부 학부장
  • 2011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공동집행위원장
  •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대사
  • 2010년 호원대학교 방송연예학부 뮤지컬전공 주임교수
  • 2005년 동아방송예술대학 공연예술계열 뮤지컬전공 전임교수
  • 1994년 ~ 1996년 에이콤 뮤지컬 아카데미 강사

주요 연출 작품[편집]

방송[편집]

드라마[편집]

CF[편집]

  • 신한은행 2010년
  • 테그호이어 2011년
  • CJ E&M - 반려동물 입양 캠페인 2012년

수상 내역[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주형. "뮤지컬계 팔방미인 '박칼린'을 만나다", 《SBS》, 2008년 11월 29일 작성. 2010.11.29 확인.
  2. 황인혜. "'남격' 이경규 쥐락펴락한 '마녀' 박칼린은 누구?", 《TV 리포트》, 2010년 7월 12일 작성. 2010.7.22 확인.
  3. 예술감독 박칼린(네이버 카페 킥 뮤지컬 스튜디오)
  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072138 박칼린 "50년 전 美 유학길 오른 아버지, 부자냐구요?") TV리포트 2011년 4월
  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525345 '무릎팍도사' 박칼린 "죽을만큼 사랑한 적, 딱 한번 있다) 아시아경제 2011년 4월
  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11&aid=0000046142 박칼린, 국제결혼 성공 부모님 사진 공개) 엑스포츠뉴스 2011년 4월
  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2149995 박칼린 "부모님, '아리랑'-전쟁의 아픔으로 맺어진 사이) 서울신문 2011년 4월
  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525343 무릎팍도사' 박칼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은 '아리랑' 때문) 아시아경제 2011년 4월
  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525343 무릎팍도사' 박칼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은 '아리랑' 때문) 아시아경제 2011년 4월
  10. 무릎팍도사' 박칼린, 유세윤에 "'다이다이' 아세요?" 부산 사투리 실력 공개 리뷰스타 2011년 4월
  11.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2011년 4월
  12. 박칼린 “너네 나라 가란 말에 정체성 혼란 겪어” TV리포트 2011년 4월
  13. 박칼린 “한국의 학교시스템, 와닿지 않았다” 고백 TV리포트 2011년 4월
  14. 박칼린이 고백하는 유년 시절과 특별한 가족 이야기 레이디경향 2011년 4월
  15. 무릎팍 도사' 박칼린 "외국 국적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 전수자 못 돼" 마이스타뉴스 2011년 4월
  16. 박칼린, "故 박동진 선생의 인정만으로도 행복했다" OSEN 2011년 4월
  17. 박칼린 "음악감독 데뷔 후 '나댄다' 선입견에 미움받아" TV리포트 2011년 4월
  18. 뮤지컬 '명성황후' 14년 1000회 대기록 뉴시스 2009년 11월
  19. 이현우. "음반계 박칼린 효과 "3주만에 2만장"", 《스타투데이》, 2011년 2월 17일 작성. 2011년 2월 18일 확인.
  20. 박칼린, 무릎팍 출연 이유? "거짓없는 강호동과 깊은 대화 TV리포트 2011년 4월
  21. 박칼린 "뮤지컬서 립싱크 한 적 있다" 한국경제 2011년 4월
  22. 박칼린 "뮤지컬서 립싱크 한 적 있다" 한국경제 2011년 4월
  23. 박칼린, "수직이 아닌 수평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러더쉽 OSEN 2011년 4월
  24. 박칼린, '무릎팍'서 당당한 사랑고백 "연하남 짝사랑中" TV리포트 2011년 4월
  25. 박칼린 "종교도 바꿀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솔직 고백! 한국경제 2011년 4월

바깥 고리[편집]

심층 기사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