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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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일본어: 源頼家 (みなもとのよりいえ) 1182년~1204년)은 가마쿠라 시대 전기,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쇼군(將軍)(가마쿠라도노鎌倉殿)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적자. 어머니는 호조 마사코(北條政子).

아버지 요리토모의 급사로 18세에 가독 상속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가마쿠라도노,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었다. 젊은 나이로 쇼군이 되어 기존의 관습을 무시한 요리이에의 독재적인 판단은 고케닌(御家人)들의 반발을 불렀고, 막부의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외가 호조씨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막부 유력 고케닌 13인의 합의체제가 형성되면서 요리이에의 독단은 억제되었다. 이로부터 3년 뒤 요리이에가 중병에 걸리자 요리이에를 지지하던 히키씨(比企氏) 집안과 그의 남동생 사네토모(實朝)를 지지하던 호조씨 집안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고, 결국 호조씨 일파의 공격으로 히키씨 집안은 멸망, 요리이에는 쇼군직을 박탈당하고 이즈(伊豆) 국 슈젠사(修禪寺)에 유폐되었다가 1204년 호조씨의 손에 암살된다. 요리이에의 추방은 싯켄 호조씨 집안이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쥐는 계기가 되었다.

목차

생애 [편집]

가마쿠라도노의 적자 [편집]

주에이 원년(1182년) 8월 12일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적자로서 가마쿠라 히키가타니의 히키 요시카즈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반슈(萬壽). 어머니는 요리토모가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동안에 아내로 맞이한 호조 마사코였다. 그때 요리토모의 나이는 36세, 가마쿠라에 들어온지 3년만에 얻은 첫 아들로,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축복을 한몸에 받으며 태어났다. 마사코가 요리이에를 가졌을 때 요리토모는 순산 기도를 위해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와카미야대로(若宮大路)의 정비를 실시했고 유력 고케닌들이 흙과 돌을 옮겨다 한 단 높게 올린 길을 닦았는데 이를 요리토모가 직접 감독했다. 요리이에의 유부모로는 요리토모의 유모였던 히키노아마의 양자 요시카즈(能員)가 선택되었고, 유모로는 히키노아마의 차녀(가와고에 시게요리의 아내)가 불려와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아내 외에도, 히키노아마의 셋째 딸(히라가 요시노부의 아내), 요시카즈의 아내 등 주로 히키씨 집안의 일족에서 선택되었다.

겐큐(建久) 4년(1193년) 5월, 요리토모가 후지에서 고케닌들을 모아 연 사냥에서 12세의 요리이에가 처음으로 사슴을 쏘아 맞히자 요리토모는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이를 마사코에게 알렸지만, 마사코는 "무장의 적자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며 사자를 되돌려 보냈다. 이에 대해서는 요리이에의 사슴 사냥은 신에 의해 그가 요리토모의 후계자로 간택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인정하게 하는 효과를 지녔고, 때문에 요리토모는 이것을 몹시 기뻐했지만 마사코로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덧붙여 이 사냥으로 소가(曾我) 형제의 구토(仇討) 사건이 일어나고, 숙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요리토모에게 모반 혐의를 받아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겐큐 6년(1195년) 2월, 요리토모는 마사코와 요리이에ㆍ오오히메(大姬)를 데리고 교토로 상경한다. 요리이에는 6월 3일과 24일에 입궐하여 교토에 요리토모의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널리 떨쳐보였고, 겐큐 8년(1197년), 16세에 종5위상 우근위권소장(右近衛權少将)으로 임명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마쿠라도노'로 떠받들어졌던 요리이에는 고금에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무예를 지닌 무사로 성장했다.

2대 쇼군 취임 [편집]

겐큐 10년(1199년) 1월 13일에 아버지 요리토모가 급사한다. 요리이에는 같은 달 20일에 좌중장이 되었다가 26일에 가독을 상속받고 제2대 가마쿠라도노가 된다. 이때 요리이에의 나이 18세였다. 1, 2월 무렵에는 무사들이 여럿 교토에 올라, 가마쿠라의 갑작스러운 정권 교체를 틈탄 교토의 불온한 움직임을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산자에몬(三左衛門)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요리이에가 가독 상속을 받은 석 달 뒤인 4월, 호조씨 등 유력 고케닌에 의한 13인의 합의제가 결성되면서 요리이에가 직접적으로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것은 정지되었다. 이에 반발한 요리이에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小笠原長経), 히키 무네카즈(比企宗員), 히키 도키카즈(比企時員), 나카노 요시시게(中野能成) 이하 젊은 근습(近習) 다섯 명을 지명해 그들이 아니면 누구도 쇼군을 알현할 수 없다는, 또 이에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아즈마카가미》는 요리이에가 자신의 측근이나 유모의 일족인 히키씨 집안을 중용하며 기존의 관습을 무시한 독재적 판단을 행한 여러 에피소드를 수록하고 있다.

합의제 성립 반년 뒤인 10월, 요리토모 때부터 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장관(長官)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요리이에의 남동생 센벤(千幡, 훗날의 사네토모)을 쇼군으로 세우려는 음모가 있다고 요리이에에게 보고한다(《교쿠요》죠지 2년 정월 2일조). 그러나 가게토키에게 반발한 고케닌 66명에 의한 가게토키 규탄의 연판장이 요리이에에게 제출되고, 가게토키는 변론을 요구하는 요리이에에게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 내려가 근신한다. 이후 가마쿠라로 돌아온 가게토키는 정무에 복귀하기를 요리이에에게 바랬지만 요리이에는 듣지 않았고 결국 가게토키는 가마쿠라에서 쫓겨나게 된다. 죠지 2년(1200년) 1월 20일, 실의에 빠진 가게토키는 일족을 거느리고 교토에 가는 도중에 현지 고케닌의 습격을 받아 일족이 모두 멸망한다(《아즈마카가미》). 교토 사람들은 가게토키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요리이에의 가장 큰 실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겐닌(建仁) 원년(1201년) 정월부터 5월까지, 가게토키의 지지자였던 죠씨(城氏) 일족이 겐닌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겐닌 2년(1202년) 7월 22일, 종2위에 서임되고 마침내 세이이다이쇼군이 된다.

쇼군 폐위 [편집]

가게토키가 죽고 3년 뒤인 겐닌 3년(1203년) 5월, 요리이에는 센벤의 유모 아와노 쓰보네(阿波局)의 남편이자 숙부인 아노젠세이(阿野全成,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친형제)를 모반 혐의로 체포, 살해하고 나아가 아와노 쓰보네를 체포하려 했지만 마사코가 인도를 거부했다. 이미 아노젠세이 사건이 있기 전인 3월부터 요리이에는 컨디션 불량을 보이고 있었는데, 7월 중순에 접어들자 병은 심해져 8월 말에는 거의 위독한 지경에 빠졌다. 그때까지 아직 요리이에는 죽지 않았지만, 가마쿠라는 "9월 1일에 요리이에가 병사하여 센벤이 그 뒤를 이었다"는 보고를 교토에 보냈고 이는 9월 7일 이른 아침에 교토에 도착, 나아가 가마쿠라에서 센벤을 세이이다이쇼군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음을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인 《메이게쓰기》외 여러 교토측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자가 가마쿠라를 출발한 직후 내지는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여겨지는 9월 2일에 가마쿠라에서는 요리이에의 유모부이자 그의 맏아들 닛벤(一幡)의 외조부인 히키 요시카즈가 호조 도키마사에게 모살되어, 히키씨 일족은 멸망한다.

1203년 8월 10일에 요리이에 자신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미시마 다이샤(三嶋大社)에 봉납한 반야심경. 요리이에의 자필이다.

홀로 고립된 요리이에는 다소 병이 회복되고 나서야 이 사건을 알고 격노했고, 도키마사를 토벌할 것을 명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9월 7일에는 가마쿠라도노라는 지위마저 잃고 대신 그 자리를 센벤이 차지하면서, 도키마사는 막부의 실권을 잡게 된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이에의 중병으로 그 뒤는 여섯 살의 맏아들 닛벤이 잇고 니혼고쿠소슈고(日本國總守護)와 간토 28개 구니의 소지토(總地頭)가 되며, 열두 살의 아우 센벤에게는 간사이 38개 구니의 소지토를 양보한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센벤에게 양보한 것에 불만을 품은 요시카즈가 센벤과 호조씨 토벌을 기획했다"(8월 27일조). "병상의 요리이에와 요시카즈가 호조씨를 토벌할 계획을 몰래 회의하는 것을 문 너머로 엿듣고 있던 마사코가 도키마사에게 보고해, 도키마사는 선수를 쳐서 자신의 집으로 요시카즈를 불러 죽인 뒤 닛벤의 저택을 공격해서 히키 일족을 멸했고 닛벤도 불타 죽었다."(9월 2일조)고 적고 있다. 다만 닛벤의 죽음에 대해서 교토측 기록인 《구간쇼》에는, 요리이에는 병이 깊어지자 스스로 출가하여 나머지는 모두 아들 닛벤에게 넘겨주려 했는데, 이에 히키 요시카즈가 권력을 잡을 것을 두려워한 도키마사는 요시카즈를 불러 모살했고 병상의 요리이에를 오쿠라고쇼(大倉御所)에서 고케닌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廣元)의 저택으로 옮겨 버리는 동시에 닛벤을 죽이려 군세를 보냈고, 닛벤은 간신히 어머니가 안고 도망쳤지만 나머지 일족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뒤이어 병이 나은 요리이에는 이를 듣고 격노하여 칼을 쥐고 일어섰지만, 마사코가 이를 말리고는 슈젠사에 가두어버렸다. 도망쳤던 닛벤은 11월에 잡혀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에게 죽었다고 한다.

죽음 [편집]

이즈 국 슈젠사에 호송된 요리이에도 이듬해 겐큐(元久) 원년(1204년) 7월 18일, 호조씨가 보낸 수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향년 23세(만 21세). 《아즈마카가미》는 그 죽음에 대해서 그저 빠른 소식으로 요리이에가 죽었음을 전해들었다고만 짧게 적혀 있다(7월 19일조). 살해 당일자의 《구간쇼》에는 요리이에가 목욕하고 있는데 습격을 받았고 요리이에가 격하게 저항하자 그의 목에 끈을 감고 급소를 눌러서 간신히 찔러 죽였다고 한다.

관직 역임 약력 [편집]

※ 날짜는 대부분 음력입니다.

일본 연호 서기 날짜 내용
겐큐(建久)8년 1197년 12월 15일 종5위상이 되고 우고노에노곤노쇼죠(右近衛權少將)에 임관(16세).
겐큐 9년 1198년 1월 13일 사누키노곤노스케(讚岐權介)를 겸임(17세).
11월 21일 관위가 정5위하로 승진.(나머지 직책은 예전대로)
겐큐 10년 1199년 1월 가독(家督)을 상속받음(18세).
1월 20일 사코노에츄조(左近衛中將)으로 옮겨감.
쇼지(正治) 2년 1200년 1월 5일 관위가 종4위상으로 승진.(나머지는 예전대로) 이때 나이 19세.
1월 8일 천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을 관복에 들이는 것을 허락받음.
10月26日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로 옮겨감.
겐닌(建仁) 2년 1202년 1월 23일 관위가 정3위로 승진.(나머지는 예전대로) 이때 나이 21세.
7월 22일 관위가 종2위로 승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선하(宣下). 이때 사에몬노카미 자리는 예전대로 유지.
겐닌 3년 1203년 1月23日 관위가 정2위로 승진.(사에몬노카미 자리는 예전대로 유지) 이때 나이 22세.
9월 7일 승려로서 출가
겐큐(元久) 원년 1204년 7월 18일 서거. 향년 23세(만21세).

묘소 [편집]

겐닌 2년(1202년)에 요리이에 자신이 발원하여 지은 겐닌사(建仁寺)에는 현재 요리이에의 목상(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안치되어 있다. 미시마 다이샤(三嶋大社)에는 겐닌 3년(1203년)에 요리이에가 갑자기 병을 얻었을 때, 그 쾌유를 빌며 요리이에가 손수 필사하여 봉납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남아 있다.

쇼군에서 폐위되고 유폐된 이즈 시 슈젠사에는 마사코가 요리이에의 공양을 위해 세운 시게츠전(指月殿)이 남아 있고, 에도 시대에 건립된 요리이에의 공양탑 등도 함께 남아 전하고 있다. 또한 인근의 아이들과 함께 인근의 산을 돌아다니며 노는 등 아이들을 좋아했다 전하며, 현지에서의 유지에 따라 요리이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장군애동지장존(將軍愛童地藏尊)이 남아 있다. 또한 슈젠지 온천 거리에서는 매년 7월에 요리이에 마쓰리가 개최된다.

요리이에의 자식들 [편집]

요리이에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적남 이치벤(一幡)은 히키 요시카즈의 변 때에 호조씨에 의해 피살되고 남은 아들들은 각각 승려로 출가했다. 셋째 아들 에이시쓰(榮實)는 그 생모가 고케닌 미우라 다네요시(三浦 胤義)에게 재가했는데, 겐포 2년(1215년)에 와다씨 집안이 주도한 반란인 이즈미 지카히라(泉親衡)의 난에서 쇼군으로 옹립되었다가 난이 실패하자 쫓기듯이 자해했다. 미우라 요시무라를 거쳐 승려였던 숙부 죠쿄(貞曉)에게 맡겨졌던 둘째 아들 구교(公暁)는 겐포 7년(1219년)에 사네토모를 암살한 죄로 처형되고, 이때 넷째 아들 젠쿄(禪曉)도 구교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죠큐 2년(1220년)에 호조씨의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살해된다. 이로써 요리이에의 네 아들은 모두 비명횡사했다.

외동딸 다케노 고쇼(竹御所)는 할머니 마사코 슬하에서 호조씨가 옹립한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의 정실이 되었으나 아이를 낳던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초산인데다 너무 나이가 많아 결국 사내아이를 사산). 다케노 고쇼의 죽음으로 요리이에의 혈통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평가 [편집]

호조씨 집안이 편찬한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 《아즈마카가미》 속의 요리이에는 유흥에 빠져 하인의 애첩이나 몰래 취하는 형편없고 어리석은 주군으로 그려져 있다. 히키씨 멸망과 요리이에 추방에 관한 《아즈마카가미》의 기술은 교토 측의 사료와는 명백히 상반되는 부분이 있으며, 이러한 요리이에에 대한 폄하는 호조씨 집안의 정치적 작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리이에의 근습이었던 시나노의 고케닌 나카노 요시나리(中野能成)는 히키씨 집안이 멸망한 직후인 겐닌 3년(1203년) 9월 4일에 도키마사로부터 영지 안도를 받았는데 "히키 요시카즈의 비법(非法)으로 영지를 빼았겼으나 특별대우를 주노라" 라는 내용의 서신이 이치카와 문서에 남아 있지만, 《아즈마카가미》는 요시나리가 요리이에에게 연좌되어 영지를 잃고 유배되었다고 적고 있다. 요시나리와 연계가 깊었던 도키마사의 아들 도키후사(時房)도 요리이에의 축국 상대가 되기도 했던 것 등, 요리이에 주변에는 호조씨 집안의 감시가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요리토모 사망을 전후해, 겐큐 7년의 정변이나 산자에몬 사건 등 조정의 반막부파에 의한 공세가 막부를 강하게 덮쳐오고 있었다. 13인의 합의제가 구축된 것은 요리이에가 요리토모의 뒤를 이어 불과 석 달 만의 일로 이것을 두고 요리이에가 정치적 능력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리이에 축출은 호조씨 집안만의 음모가 아니라, 막부를 세우는 주축이 되었던 도고쿠 무사들의 쇼군 독재에 대해 축적된 불만이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요리이에는 위정자로서 특별한 개성을 보여줄 기회도 없이 쫓겨나고 또 사망하면서, 가마쿠라 막부 내부에서는 고케닌들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전 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제2대 가마쿠라 막부 쇼군
1202년 ~ 1203년
후 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