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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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1905년 ~ 1952년 10월
태어난 곳 대한제국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명 무정, 김무정
복무 조선의용군
최종 계급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지휘 조선의용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차관,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방위사령관
무정
1905년 ~ 1952년 10월
태어난 곳 대한제국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조선의용군
최종 계급 조선인민군 육군 중장
지휘 조선인민군 제2지휘소, 제2군단, 평양방위사령부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차관

무정(武亭) 또는 김무정(金武亭, 1905년[1] ~ 1952년[2][3] 10월)은 중국 화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인, 정치가를 역임했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으로 활약했다. 본명은 김무정(金武亭)이며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다. 보통 성을 빼고 무정이라 부른다.

목차

이력 [편집]

독립운동 [편집]

1919년 3월에 3·1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중국에 건너가 허베이성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24년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후 포병중령이 된 그는 25년에 북경으로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후 중국공산당의 해방구가 있던 루이진(瑞金)으로 가서 홍군(중국공산당군) 포병장교로 국민당군과 싸웠다. 31년 루이진의 중화인민공화국 임정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국공내전 중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의 홍군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여 연안으로 간 그는 조선인 1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1937년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이 되고, 그해 말에는 중국 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 단장이 되었다.[4]

홍군이 개편된 팔로군의 포병장교로 일하면서 훗날 연안파가 되는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대의 사령관을 맡아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 후 팔로군 포병사령부 사령관까지 올라갔으며 연안파의 거물로 떠올랐다. 그는 팔로군에 있으면서 팽덕회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는데, 결혼도 팽덕회가 주선하여 이루어졌다.[5]

1941년 한인(韓人)들로 구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성격을 분명히 해 단체명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게 된다.[4]

1940년 김원봉조선의용대에 소속된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이 김원봉의 임정 합류에 반발, 갈등을 빚다가 42년 최창익을 우두머리로 화북 연안으로 건너오자 그들을 규합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산하 군대조직인 조선의용군을 창설,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고 그는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광복 이후 [편집]

8.15해방 이후 조선의용군이 중국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한 동안 따로 북조선에 건너왔다. 그가 북한으로 귀국하자,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명망과 자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 태도에 불편해 하며 불안을 느끼고 항상 경계하였으며 처음부터 그를 강력한 정적으로 보았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6] 그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비서가 되었으나, 46년 김일성은 그를 보안간부훈련대대부(保安幹部訓練大隊部)의 포병사령관으로 강등시켰다.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에는 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민족보위성 부상[7], 한국전쟁 때에는 김광협 소장이 한국군을 제대로 무찌르지 못하자 이 때문에 보직해임이 된 이후 그 후임으로 제2군단장으로 출전하였고, 북한군이 패퇴하였을 때는 평양방위사령관이 되었다.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방위사령관을 역임하였으나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무정에게 물어,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자에 대한 즉결처분을 행하고 평양을 UN군에게 내주었다는 죄목으로 지위에서 해임당하였다. 50년 12월 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서 명령불복종·전투조직의 불성실·퇴각시의 불법살인 등의 죄목으로 그를 숙청하였다. 죄수부대에서 복역하던 중 중국의 요구로 무정은 중국에 인도되었으나 52년 10월 병사했다. 본인의 화려한 경력으로 인해 일개 빨치산 부대 지도자였던 김일성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해임 사유로 판단된다.[8]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화북 지방의 독립 운동에서 무정이 큰 역할을 한 사실과 중국공산당에서의 활약을 기술하여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무정은 한국 전쟁 이후 비판을 받고 군직에서 사임했으나, 병에 걸리자 특별히 중국에서 치료를 받았고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졌다.[9] 유해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10]

무정을 연기한 배우 [편집]

주석 [편집]

  1. 1904년생 설이 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683&pt=nv
  2. 1951년 사망설이 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683&pt=nv
  3. 태항산 남장촌에 달 뜨고 별 뜰 때조국사랑, 고향 그리움은 뼈에 사무쳤네 :: 네이버 뉴스
  4. Daum 백과사전, 무정
  5.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39쪽, 나남출판
  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7.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9551 코나스넷)
  8. 이태,《남부군》(1989년, 두레
  9. 김일성 (1992년). 〈제1부 항일혁명편, 제24장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 5. 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0. 《연합뉴스》 (2003.10.21) 31년 만에 평양 방문한 서영훈 총재
전 임
(초대)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부상
1948년 9월 ~ 1950년 8월
후 임
조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