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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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이라는 단어는 16세기에 '신이 없음'을 의미하는 지닌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에서 기원하였다. 적극적인 무신론은 최소 18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며 무신론 사상과 무신론자들의 정치력이 강화됨에 따라 역사의 폭이 넓어졌다.

아마도 신이 없을 것이라는 자연적인 명제는 유신론 만큼이나 오래된 논리이다. 철학적인 무신론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부터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등장하였다.

윌 듀런트는 아프리카의 피그미 부족에서 그 어떤 숭배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들이 그 어떤 영적 존재나 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피그미 부족은 특별한 제사 의례없이 죽은 자를 그들의 물건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식을 치루었으며, 여행자나 외부인에 대한 그 어떠한 단순한 미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베다 시대스리랑카에서는 신의 존재 가능성만 공인되었기 때문에 성직자나 예배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1]

인도 철학[편집]

고대시대[편집]

소크라테스

유럽의 고대 시대에 유신론은 도시 국가로마 제국의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는 기본적인 믿음이였다. 역사적으로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믿지 않는 시민은 중죄로서 무신론자로 고발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아테네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단지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라는 주장을 대가로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당시 로마의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 취급되어 박해를 받았다. 당시의 무신론이 가지는 의미는 이교도무신앙자였으며, 정적으로 제거하려는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편집]

서구 문명의 철학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에 등자하는 첫 철학자들은 무신론자가 아니였으나, 신화 대신 자연현상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가령 그들은 번개를 바람의 충돌과 구름의 분열로 인하여,[2] 지진은 지구의 급격한 온도차로 인해 발생한 것[3]이라 추측했다. 초기 철학자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관념을 자주 비판하였다. 크세노파네스(기원전 6세기)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만약 소와 말이 손을 가지고 있다면, 말은 말처럼 생긴 신을 그릴 것이요, 소는 소처럼 생긴 신을 그릴 것" 라고 주장하였다.[4] 다른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세기)는 태양을 가리키며 "펠로폰네소스보다 훨씬 큰 불덩어리"라고 말했으나, 불경죄로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5]

최초의 완전한 유물론철학은 원자론주의자레우키포스데모크리토스(기원전 5세기)로부터 파생하였다. 그들은 이 세계의 형태와 발전을 무한한 우주 속 원자의 움직임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0-406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군가 저 위에 신은 있는가 물었다. 신은 없다; 없다, 신은 없다, 바보처럼 굴지 말라. 옛날의 거짓 우화를 앞세워 너를 기만하고 있다."[6]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약448-280년)은 특유의 풍자적인 양식을 이용하여 희극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전들이여! 신전들이여! 분명히 너희들은 신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논증은 무엇인가? 너희들의 증명은 어디에 있는가?[7]

소피스트[편집]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들은 그리스의 전통적 관념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는 "신들처럼 존중을 받는 것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8]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책 서문에 "신들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말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9]

멜로스의 디아고라스(기원전 5세기)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무신론자'로 알려져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편집]

기타[편집]

고대시대의 몰락[편집]

무신론에 대한 개념은 고대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졌는데, 성경 복음서의 저자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성경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0].

중국[편집]

동북아시아에선 강력한 유일신이나 인격적인 신이 존재하는 종교가 부재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신론 논쟁의 필요성이 부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무신론은 주로 영적인 존재와 작용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로는 범진이 있다. 유물주의 철학자인 그는 중국철학사에서 최초로 형질신용설을 주장했으며, 《신멸론》등을 통하여 자신의 무신론을 선전하였다. 완첨은 무귀론을 주장하였다.

중세시대[편집]

중세 이슬람에서는 학자들이 무신론의 관점을 인지하였으며 비록 그들이 실질적으로 무신론자라고 볼 수 없었지만, 종종 무신앙자들을 공격하였다.[11] 개개인이 무신론으로 비난을 받을때, 그들은 보통 무신론 지지자들 보다는 이교도의 관점으로 비추어졌다.[12] 한 주목할만한 현상은 9세기 학자 이븐 알-라완디무하메드가 포함된 종교적 예언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며, 그 종교적 도그마는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13] 이슬람 세계에서의 종교에 대한 비판들은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아부 아브르 알-라지 (865-925)와 시인 알-마아리로 이어진다.

유럽의 중세 시대의 무신론 표현에 대해 깔끔히 알려진바가 없다. 13세기 후반에 쓰여진 아이슬란드 사가 흐라픈켈의 유명무실한 등장인물이 "나는 신에 대한 신앙이 어리석다고 생각해."라고 발언한다. 그의 프레이르 신전이 불탄 이 후 그는 스스로 다른 제물을 바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이 처지를 사가에서는 '무신론적'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곱 그림은 그의 '튜튼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고대 북구 신화가 가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의심과 완전한 혐오감을 갖고 자기 자신의 체력과 선행에 의지하게 되는 사람을 언급한다는 것이다.[14]

기독교가 전파된 유럽에서는, 특히 종교 재판이 활동하던 국가에서 이단자들이 박해받았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다섯 가지 신존재증명(Quinquae viae)과 캔터베리의 안셀름이 쓴 존재론적 논증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의 타당성을 인정한 사례이다. 주로 당시에는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무신론자로 비난하였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정적들로부터 무신론자라 비난받았는데, 그가 교회의 종교적 최고 지위를 강요하였었기 때문이었다.[15]

르네상스[편집]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 비판에 대한 출판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무신론적 내용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

무신론(athéisme)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유례한 단어이다. 영어 단어 'Atheist'는 적어도 1566년에 나타났다.[16] 무신론에 대한 개념은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무신론'이란 단어는 모욕적인 비속어로 분류되었다.[17] 당대에는 자유사상가로 추측되는 익명으로 작성된 《테오프라스누스 레디비부스》라는 무신론 개요서가 널리 퍼져있었다.[18] 당시 유럽에서 무신론자임을 공공연히 밝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였는데, 프랑스 인본주의자 에티엔 돌레는 1546년 목이 졸린 후 화형을 당했으며, 이탈리아 자연주의자 줄리오 체사레 바니니 또한 1619년 화형당했다. 1689년 무신론자였던 폴란드 귀족인 카지미에시 위슈친스키바르샤바에서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비슷한 예로 1766년 프랑스에서도 귀족 장프랑스와 드 라 바가 참수형을 당한 후 불에 태워졌으며 시신이 훼손되었다.

중요한 계몽주의 사상가 중의 하나이자 《백과전서》의 저자인 드니 디드로 또한 그의 저서 《맹인 서간》을 근거로 무신론자라고 고발되었다.[19] 결국 그는 투옥되었으며 그의 저서들은 금서로 지정되고 불에 태워졌다.

영국의 유물론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도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고발되었으나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부정하였다. 그보다 먼저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크리스토퍼 말로 역시 그의 집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글이 발견되어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변호를 다 마치기 전에 결국 암살당했다.

계몽시대[편집]

이성의 축제, 노트르담, 1793년

1770년대 무신론은 여전히 대부분의 기독교 국가에서 불순한 사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나 점점 공개적인 지위로 발전되어갔다. 앙리 디트리히 돌바크는 1770년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를 통하여 고전 시대 이래 최초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신론자임을 고백하였다. 앙리 디트리히 돌바크는 드니 디드로장자크 루소,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벤자민 프랭클린을 포함한 당대 파리 지식인층의 명사였다. 무신론 사상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며 당국에 발견되면 즉시 불에 태워졌다.

이성숭배자크 헤베르피에르 쇼메테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중 무신론에 바탕을 두어 고안되었다. 이는 이신론자였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제창한 최고존재숭배에 의하며 중단되었다.[20] 두 숭배주의는 프랑스 혁명중 일어난 비기독교 운동의 결과물이다.

이성숭배는 1·3차 혁명과 9월학살이 있던 1792년과 1794년 사이에 발전하여 몇몇의 프랑스 교회들이 이성주의 신전으로 개조되었다. 이 교회들은 1793년부터 산별적으로 폐쇄되기 시작하여 1793년 11월 24일 가톨릭 미사가 금지되면서 모두 폐쇄되었다.

1782년 리버풀의 의사인 메튜 터너가 쓴 저서 《프리스틀리 박사 편지에 대한 철학적 무신앙 답장》은 영국 최초의 무신론 선언서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자신의 저서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통하여 기독교의 비현실성, 비윤리성들을 비판하였으나 유교적 입장을 근거로 한 것들이기에 완전한 유신론 비판서인지 확실하지 않다.

현대[편집]

19세기[편집]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 무신론이 정치 속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세기의 합리주의자유사상의 운동을 타고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계몽주의 시대인 1792년 태어난 낭만주의 시인인 퍼시 비시 셸리는 자신이 수필한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책자를 익명으로 출간하여 191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이 책자는 영어로 작성된 최초의 무신론 출간물이다. 독일에서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쓴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을 통하여 무신론이 유입되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막스 슈티르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19세기 독일 무신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자유사상가인 찰스 브래들로는 여러 차례 영국 국회에 당선되었음에도 성서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브래들로가 4번이나 재선되자 마침내 국회의장이 그를 입회하도록 허가하였다.[21] 그는 최초의 무신론자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성서 선서 법을 개정하였다.[22]

카를 마르크스

1844년 무신론 정치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에서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는 현실과 사회에서 유례된 고통으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를 환상적 행복이라 규정하고 사람들이 내세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를 고쳐나가 진실된 행복을 추구해야한다고 제안하였다. 같은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23]

프리드리히 니체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발언으로 잘 알려진 명사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니체가 직접 한 발언이 아니라 그의 작품 속 인물들 사이의 대화에서 나온 문장이다. 니체는 기독교적 유신론이 한 신앙 체제로서 서구 세계의 도덕적 근원이였으나 현대 사상의 결과 즉 허무주의의 부상과 기독교적 가치의 하락으로 붕괴되고 거부되었다고 논증하였다. 니체는 굳은 무신론자로서 허무주의와 인본주의의 부작용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초인 중심의 사회였다.

각주[편집]

  1. “보관된 사본”. 2011년 7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2월 6일에 확인함. 
  2. Anaximander, ap.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i. 6
  3. Anaximenes, ap.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i. 7
  4.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v. 14
  5. Diogenes Laertius, ii. 6–14
  6. “보관된 사본”. 2000년 1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3월 1일에 확인함. 
  7. http://books.google.com/books?id=4ZkwNhduqLEC&pg=PA141&dq=Shrines!+Shrines!+Surely+you+don%27t+believe+in+the+gods.+What%27s+your+argument%3F+Where%27s+your+proof%3F&hl=en&ei=GIMoTcH-LIP6lwf6tOy1AQ&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2&ved=0CCkQ6AEwAQ#v=onepage&q=Shrines!%20Shrines!%20Surely%20you%20don%27t%20believe%20in%20the%20gods.%20What%27s%20your%20argument%3F%20Where%27s%20your%20proof%3F&f=false
  8. Cicero, De Natura Deorum, i. 42
  9. Cicero, De Natura Deorum, i. 23
  10. http://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psalm%2014&version=NIV
  11. "Various Muslim theologians in the early Abbasid periods wrote treatises 'Against the Unbelievers,' ... the earliest extant work bearing this title is probably the Radd ala al-mulhid of the ninth-century Zaydi theologian al-Qasim b. Ibrahim. ... Nevertheless, in the discussions of God's existence the actual opponents are not identified as individuals. As a group they are sometimes referred to as heretics, unbelievers, materialists, or skeptics. These designations often appear together, and they do not always seem to be clearly distinguished in the authors' mind." Sarah Stroumsa, (1999), Freethinkers of medieval Islam: Ibn al-Rawandi, Abu Bakr al-Razi and their Impact on Islamic Thought, pages 121–3. BRILL
  12. Sarah Stroumsa, 1999, Freethinkers of Medieval Islam: Ibn al-Rdwandi, Abu Bakr al-Razi, and their Impact on Islamic Thought, page 123. BRILL.
  13. Encyclopaedia of Islam, 1971, Volume 3, page 905.
  14. Jacob Grimm, 1882, Teutonic Mythology Part 1, page 6.
  15. John William Draper, 1864, History of the intellectual development of Europe, page 387.
  16. Martiall, John (1566). 〈English recusant literature, 1558-1640〉. 《A Replie to Mr Calfhills Blasphemous Answer Made Against the Treatise of the Cross》 203. 51쪽. 
  17. Armstrong, Karen (1999). 《A History of God》. London: Vintage. 288쪽. ISBN 0-09-927367-5. 
  18. Hecht, Jennifer Micheal (2004). Doubt: A History. HarperOne. pp. 325, ISBN 0-06-009795-7.
  19. "The Philosophe"
  20. “War, Terror, and Resistance”. 2018년 8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0월 31일에 확인함. 
  21. British Humanist Association, Charles Bradlaugh (1833–91)
  22. Hansard, Oaths Bill 1888, Second Reading, 14 March 1888 Archived 2009년 6월 25일 - 웨이백 머신; Third Reading, 9 August 1888 Archived 2009년 7월 4일 - 웨이백 머신
  23. Karl, Marx (1844년 2월).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 2009년 7월 2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