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투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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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투하이(1448년 ~ 1510년)는 북원의 황후였다. 흔이 만투하이 체첸하틍(현명한 만투하이 여왕)이라고 부른다.

생애[편집]

타이슨 칸에센 칸에게 살해된 데 이어 서로 죽이고 죽는 권력 다툼 속에서 타이슨 칸의 아들도 칭키스칸의 이복동생이었던 벨구테이 가문의 자손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한동안 칸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타이슨 칸의 이복 동생인 만두굴이 칸 위에 오르게 되는데, 1467년 만두굴 칸타이슨 칸의 손자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 사망하였다. 그러나, 권력싸움에서 이긴 타이슨 칸의 손자 볼후 진왕도 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권력 다툼 속에 죽어간 두 사람이 바로 만두하이의 첫째 남편 만두굴 칸과, 나중에 만두하이와 결혼하게 되는 바트 멍흐의 아버지 볼후 진왕인데, 이 바트 멍흐가 바로 나중의 다얀 칸이되었다.

만두굴 칸이 죽었을 때, 만두하이가 서른 한 살이었고, 바트 멍흐는 여섯 살이었다. 쿠빌라이 자손들이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없는 상황에서 바트 멍흐는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귀한 황손이었다. 다시 말하여 바트 멍흐는 당연히 칸 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바트 멍흐는 아버지(볼후 진왕)사후 재혼한 생모로부터도 천대를 받는 버려진 아이가 되고 마는데, 이 아이를 거두어 돌보아 준이가 바로 만두하이였다.

만두하이는 칭키스칸의 직계자손이 거의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칸의 자리를 이어갈 사람은 바트 멍흐뿐이다 라고 판단을 하고, 바트 멍흐를 극진하게 돌보는 한편, 동몽골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어 바트 멍흐를 정식 칸으로 추대하였다.

1470년, 몽골족의 영웅 칭키스칸의 가묘가 있는 성지나이만 차강게르 앞에서 성대한 취임식이 열렸는데 바로 바트 멍흐가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바트 멍흐는 다얀 칸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다얀이란 바로 '大元'을 의미한다. 그 이름 속에 어린 칸을 앞세워 칭기스칸의 가문을 다시 부활하겠다는 만두하이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칭키스칸의 가묘 앞에서 치러진 취임식은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몽골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옛 선조의 영화를 재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만두하이는 어린 다얀 칸을 키워가면서 섭정으로서 동몽골을 다스렸다. 다얀 칸이 성장하자 만두하이는 1481년, 만두하이가 마흔두 살 때, 다얀 칸이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십오 년의 연상인 만두하이는 다얀 칸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다(세 쌍둥이 포함). 만두하이가 낳은 이 일곱 명과 다얀 칸의 후비가 낳은 네 명의 아들 도합 열한명의 아들들이 이후 칭키스칸 가계의 새로운 몽골족을 탄생시켰다.

만두하이는 이십오 년이나 연하인 남편을 키워 몽골역사에 남을 칸으로 만들었고, 아들들 역시 제대로 키워 칭키스칸의 가문을 부활시켰다. 이런 점에서 만두하이는 칭키스칸의 모친 호엘룬과 비교된다.

만두하이는 다얀 칸의 아내였지만, 다얀 칸에게는 어머니의 다름이 없었다. 특히 만두하이는 어린 칸을 키우면서 다얀 칸이 몽골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만두하이는 오이라트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음 몽골초원에서 동몽골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다음 장성한 다얀 칸에게 몽골의 통치권을 넘겼다.

1448년에 태어나 8세인 왕과 결혼해서 그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어려서 무능한 왕을 대신해 외적의 침입을 막고 동몽골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오이라트를 무너뜨리고 다얀 칸과 함께 칭기스칸 일족의 권위를 부흥시켰다.

가족관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