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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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툰 닥터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Tun Dr. Mahathir bin Mohamad
2007년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2007년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제4대 총리
임기 1981년 7월 16일 ~ 2003년 10월 31일
부통령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전임: 후세인 온(3대)

국적 말레이시아
출생일 1925년 7월 10일(1925-07-10)
출생지 말레이시아 알로르 스타르
정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학력 말레이시아 대학교
종교 이슬람교
배우자 시티 하스마흐
자녀 마리나, 미르잔, 멜린다, 모흐자니, 무흐리즈, 마이주라, 마자르
서명 Mahathir Mohamad signature.svg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Mahathir bin Mohamad 또는 Mahathir s/o Mohamad Iskandar Kutty, 1925년 12월 20일 - ) (IPA: [maˈhɑ.ðe bin moˈhɑ.mat̚]; 또는 Tun Dr. Mahathir Mohamad, 자위문자로 محضير بن محمد), 혹은 "Dr.M"이라고 알려진 말레이시아의 제4대 총리이다. 별명은 "Che Det"이며, 1947년 7월 20일 "말레이 여성들을 자유롭게 만들다"(Wanita Melayu Mencipta Kebebasan Sendiri)라는 칭호가 붙은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 싱가푸라(The Straits Times Singapura)에서 필명처럼 자주 사용되던 이름이다. 그는 1981년 7월 16일부터 2003년 10월 31일까지 총리로 재임했으며, 그 기간 동안 경제정책을 성공시키는 가 하면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신흥 중진국"으로 명명될 때까지,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국가 중 세계 무대에서 가장 유력한 나라였다.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반대파 억압을 빌미로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초기 삶[편집]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1925년 12월 20일 크다 주의 알로르 스타르에서 모하메드 이스칸다르와 완 틈파완 완 하나피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N 1] 프낭 출신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아버지 모하마드 빈 이스칸다르는 말레이인/인도인 혼혈이었고, 크다 출신인 어머니 완 틈파완 완 하나피는 순혈 말레이인이었다. 사실, 그의 집안은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두드러진 종교관이나 정치관이 없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2] 마하티르의 아버지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학교장이었는데, 이는 어머니 완 틈파완이 크다의 왕족들과 관계를 맺는 동안 그의 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두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마하티르에게는 6명의 반 형제자매(half-sibling)와 2명의 완전형제자매(full-sibling)가 있었다.[3]

마하티르는 근면한 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공부를 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는 체육에 약간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중학교(당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의 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다른 초등학교 친구들보다도 뛰어난 영어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4] 말레이시아가 일본에 점령당했던 제2차 세계 대전 무렵, 그는 사업 - 처음에는 커피, 그 다음에는 피상 고렝(pisang goreng, 바나나 튀김)과 기타 스낵류 - 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말레이시아는 고등학교가 없고,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싱가포르의 킹 에드워드 7세 대학교(현재 싱가포르 국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다. 당시 그는 훗날 부인이 되는 동창 시티 하스마흐 모하마드 알리(Siti Hasmah Mohamad Ali)를 만났다. 졸업 후, 그는 1956년 결혼하기 전까지 공직 의사로 활동했다. 그는 그의 업무를 마련하였고, 동년 알로르 스타르로 돌아왔다. 그는 마을의 첫 번째 말레이인 의사였고, 또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그는 커다란 집을 짓고,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으며, 자신의 폰티악 카탈리나(Pontiac Catalina, 자동차)를 운전해 줄 중국계 기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1957년, 그는 부인이 된 시티 하스마흐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 마리나(Marina Mahathir)를 낳았는데, 그 전에도 3명을 더 낳을 까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고 앞으로 28년 동안 3명을 입양하기도 했다.

정치 활동[편집]

정계 입문[편집]

말레이시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마하티르는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그는 단명한 말레이 연방(1946-1948) 시절 비(非)말레이인들의 시민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의과 대학에서 말레이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The Straits Times)의 학생 저널에서 체 뎃(C.H.E. Det)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말레이어의 공용어 지정 등을 주장하는 등, 말레이인의 권리 향상을 주장했다. 알로르 스타르에서 의사 활동을 하던 무렵(1959년 총선 전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크다 주당의 의장이 되었다. 비록 UMNO에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9년 총선에 불출마했는데, 이는 당시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마하티르가 압둘 라만이 자국을 독립 후에도 영연방의 일원으로 두려 하는 정책을 비판하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압둘 라만은 마하티르의 정책 - UMNO의 후보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도입하는 정책 - 에 반대하게 되었다. 이는 시위로 인해 정계 입문을 좀 늦춘 그에게 있어 충분히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길게 늦어지지는 않았다. 1964년 총선에서, 마하티르는 알로르 스타르에 기반한 코타 스타르 슬라탄의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5]

국회의원 시절에서 출당 후까지[편집]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당선된 마하티르는 평의원으로서, 당시 말레이시아의 사회적 갈등 - 싱가포르(당시 말레이시아의 영토)의 미래, 중국계들의 막대한 경제권 등 - 을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주요 정당이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 친 중국(pro-Chinese) 및 반 말레이(anti-Malay) 성향 - 의 지도자 리콴유(Lee Kwan Yew)를 "오만하다"며 큰 소리로 공격했다. 마하티르가 국회의원이 되고 1년이 지난 후, 싱가포르는 결국 추방되었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평의원으로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총선에서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n-Malaysian Islamic Party, 말레이시아의 야당)의 유소프 라와(Yusof Rawa)에게 패하였다.[6] 마하티르는 이 이유를 중국계 유권자들이 UMNO에서 PAS로 이탈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7] 당시 동년 5월 13일에 있었던 대규모 인종 폭동(5·13 사건이라고 부르며, 말레이계와 중국계간의 충돌로 빚어져 수백명이 사망했다)이 일어나면서, UMNO는 총선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사실, 마하티르는 작년에 일이 터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닌 그는, 압둘 라만에게 말레이인 이해관계 유지에 결점이 있었다며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는 곧 압둘 라만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8] 곧 마하티르는 1969년 말 UMNO의 최고회의에서 쫓겨난 데 이어 당에서 출당되었다.[5] 다만, 그를 체포하지 않도록 설득했다.[6][7]

정치적으로 소외된 뒤, 마하티르는 그의 첫 번째 책인 말레이 딜레마(The Malay Dilemma)를 썼는데, 이는 말레이인 공동체를 새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UMNO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충분한 지지를 이끌게 하여금 경제에 대한 관심과 권한이 중국계한테만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야 하고, 또 말레이인들이 충분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만약에 돈과 재산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않고 노동을 피하려 한다면 질 수 밖에 없음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압둘 라만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계속 했으며, 가차없이 금지되었다. 물론 그가 총리가 된 1981년 이후로만 해금되었다.

UMNO 복귀와 총리 취임[편집]

교육부 장관 시절[편집]

1970년 압둘 라만은 총리를 사임하였고, 부총리였던 압둘 라작(Abdul Razak)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라작 신임 총리는 마하티르에게 UMNO에 복당할 것을 격려했고, 이후 1973년 그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UMNO 최고회의에 복귀하면서[5] 라작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1974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한편 1974년 크다에 기반한 쿠방 파수의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대의원으로도 복귀하였다.[5] 교육부 장관으로서 취한 첫 조치는 당시 말레이시아 대학들이 학문적 커뮤니티(academic community)에 완전히 대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9] 또한 대학 캠퍼스에서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기도 했고, 교육부에 정치 활동을 한 학생 또는 강사에게 징계를 내릴 수 있도록 했으며, 정치 활동을 피하기 위한 조건으로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다.[10]

경선 승리와 부총리 취임[편집]

1975년, 그는 UMNO의 부총재에 세 번째로 도전했다. 이 경선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라작 총리와, 그의 부총리 후세인 온(Hussein Onn) 모두가 당의 지도부를 계승하기 위한 대결이었다. 여기서 라작이 선호했던 믈라카의 전 주(州)수상 가파르 바바(Ghafar Baba), 클란탄 주 왕가 출신으로 부유한 사업가 텡쿠 라잘레이프 함자(Tengku Razaleigh Hamzah), 그리고 마하티르가 당선되었다. 바로 이듬해 라작이 죽자, 새 총리로 취임한 후세인은 부총리 후보 3명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했는데, 야심만만하기로 유명했던 가잘리 샤피(Ghazali Shafie)를 고려하기도 했다. 마하티르의 경쟁자들은 각각 중요한 정치적 책임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후세인이 부총리 후보로 고려했던 가잘리는 당의 낮은 지지율로 부총재 경선에서 패하였다. 가파르의 경우, 상급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다가 영어도 잘 하지 못했고, 라잘레이프는 너무 젊어서 경험이 부족했는데다가 미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후세인은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후세인과 마하티르는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고, 또 여전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압둘 라만을 불쾌하게 만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주간의 망설임 끝에, 후세인은 마하티르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다만 둘 사이의 약속이 있자면, 후세인 자신의 후계자는 마하티르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총리 재직 시절[편집]

마하티르는 성공한 교육부 장관이자 산업자원부 장관(1978-1981, 부총리 재직 시절 겸직)으로 여겨졌다.[11] 임기 후반에는 중공업 정책(heavy industries policy)을 펼쳤는데, 정부지배기업(government-controlled corporation)인 하이콤(DRB-HICOM)의 설립, 국내 자동차 산업 등 제조 분야의 장기간 개발을 위한 투자 등이 그 정책에 의한 성과이다.[12] 그가 부총리 겸 장관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시간을 해외 방문을 통해 세계에 말레이시아를 홍보하는 데 사용했다.[10]

그러나, 마하티르는 그렇게 영향력이 큰 부총리는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던 후세인은 그의 대담한 정책 제안(bold policy proposals)을 거부했다. 후세인과 마하티르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가잘리와 라잘레이프가 후세인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어, 둘이 접촉할 때 마하티르를 우회해 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1981년 후세인이 건강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마하티르는 총리직을 승계하게 되었다.[5][13]

총리 재임시[편집]

후세인 온의 건강 문제가 화제가 되던 1981년, 부총리로 재임하던 그는 총리로 임명될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던 중 후세인 온이 사임하자, 그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재임 중 국방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동지인 무사 하탐을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2M내각이라고 했다.[14]

총리 시절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소위,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펼쳤다.[15] 재직 기간 동안 말레이시아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신흥 중진국'으로 떠올랐다. 이로써 '현대화의 아버지' 등으로 칭찬을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야당 탄압, 인권 유린, 언론 통제 등 독재 정치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취임 초반[편집]

1981년 7월 16일 56세의 나이로 총리에 취임하였다.[16] 그가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국가보안법 수감자 21명을 석방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저널리스트인 사마드 이스마일(Samad Ismail)과 후세인 정권의 차관급 공직자로 지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았던 압둘라 아흐마드(Abdullah Ahmad)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집권 초 2년 동안 당 개편을 위한 조치도 조심스레 취했다(마하티르는 당 내에도 자신의 반대파들이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무사 히탐(Musa Hitam)을 부총리로 임명했다.

임기 초반(1981년 ~ 1987년)[편집]

마하티르는 취임 초기 2년 동안 UMNO의 리더십을 굳히는 데 주력했는데, ABIM의 지도자 안와르 이브라힘을 UMNO로 넣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UMNO는 이슬람 부흥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안와르를 편입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ABIM을 누르는 데 성공한다.[17] UMNO는 1982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었고, 술탄(국왕을 임명하는 종교지도자)끼리의 다툼을 줄이고자 헌법을 개정하였다.

퇴임 후[편집]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부정적 평가[편집]

인권 침해[편집]

마하티르는 1998년 11월 APEC 정상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때 말레이시아의 인권 문제가 노출되면서 비판을 받았다.

세계 정상들이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순간부터 사건이 시작되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도착하자마자 그를 만나지 않고 당시 구속된 안와르의 부인 완 아지자부터 만났다.[18] 또한 각국의 사회운동가 600여명도 몰려들어 내정을 문제삼았다.

외부의 지원 속에서 시위는 밤낮 구분 없이 계속되었다. 카메라 기자로 위장했던 사법 경찰이 발각됐다. 그는 다수의 위협 앞에서 권총까지 빼들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겨냥을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플래카드를 덮어씌웠다.

시위는 유혈사태 직전까지 갔다. 급기야 시위자 색출을 위한 노란색 물대포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홀로'를 고집해 비판을 받았다.

설명[편집]

  1. Mahathir's birth certificate gives his date of birth as 20 December. He was actually born on 10 July; his biographer Barry Wain explains that 20 December was an "arbitrary" date chosen by Mahathir's father for official purposes.[1]

주석[편집]

  1. Wain (2010), p. 8
  2. Wain (2010), pp. 5–6
  3. Wain (2010), pp. 4–5
  4. Wain (2010), pp. 6–7
  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Mahathir bin Mohamad. 2012년 4월 2일에 확인.
  6. Tan & Vasil, p. 51
  7. Wain (2010), p. 28
  8. Wain (2010), p. 26
  9. Morais (1982), pp. 28–29
  10. Wain (2010), p. 39
  1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Wain_25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2. Milne & Mauzy (1999), p. 64
  13. Wain (2010), pp. 38–40
  14. 하기와라 (1996) pp.168-195
  15. (영어) Kit G. Machado (1987년 6월). Malaysian Cultural Relations with Japan and South Korea in the 1980s: Looking East. 《Asian Survey》 27 (6): 638. doi:10.1525/as.1987.27.6.01p00645. “The prime minister, Datuk Seri Mahathir bin Mohamad, urges Malaysians to look to both Japan and South Korea "for inspiration, methods, and skills" and "to emulate and learn ... [their] work ethics and attitudes" in order to further the country's economic progress.1 ... 1. Address at the 5th ASEAN-Japan Symposium in Kuala Lumpur, August 24, 1982, in Foreign Affairs Malaysia (hereinafter FAM), 15:3 (September 1982), p. 228.”
  16. Wain (2010), p. 40
  17. 하기와라 (1996) pp.168-195
  18. MBC뉴스데스크 (1998년 11월 16일). 말레이시아 인권, 경제, 언론 문제점 모두 노출[최창영]. 2013년 5월 1일에 확인.
전 임
후세인 온
말레이시아의 부총리
1978년 ~ 1981년
후 임
무사 히탐
전 임
후세인 온
말레이시아의 총리
1981년 ~ 2003년
후 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전 임
타보 음베키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2003년
후 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