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표도로브나 (1759년)
| 마리아 표도로브나 | |
|---|---|
| 러시아 황후 | |
| 재위 | 1796년 ~ 1801년 |
| 대관식 | 1797년 4월 5일 |
| 배우자 | 러시아의 파벨 1세 |
| 왕가 | 혼전:뷔르템베르크 왕가 혼후:로마노프 왕가 |
| 출생 | 1759년 10월 25일 |
| 사망 | 1828년 11월 5일 (69세) |
마리아 표도로브나(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1759년 10월 25일 ~ 1828년 11월 5일)는 러시아의 황제 파벨 1세의 황후이다.
목차 |
생애 [편집]
황태자비 시절 [편집]
뷔르템베르크 공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딸로 슈체친에서 태어났다. 독일식 이름은 조피 도로테아 폰 뷔르템베르크(Sophie Dorothea von Württemberg). 부친의 영지 몽벨리아르가 프랑스와 가까웠기 때문에 프랑스 문물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1773년 러시아 황태자 파벨의 신부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헤센-다름슈타트 방백의 딸 빌헬미네(러시아명: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가 황태자비가 되었다. 조피는 그 오빠(훗날 루트비히 1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1776년 빌헬미네가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죽자 프리드리히 2세가 새로운 황태자비로 조피를 추천했다. 루트비히에게 많은 위자료를 지불하고 파혼에 성공한 조피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1776년 파벨과 결혼했다.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과 비슷한 점이 많은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아들인 파벨과는 사이가 무척 나빴고, 마리아 또한 남편과 마찬가지로 시어머니를 꺼리게 되어 관계가 악화되었다. 특히 예카테리나가 두 손자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을 그녀에게서 떼어놓은 것은 고부간의 사이가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782년 마리아는 첫 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낳았고 그 축하 선물로 예카테리나에게서 가치나 궁을 받았다. 남편 파벨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고, 어머니 예카테리나의 감시와 억압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가치나 궁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황후 즉위 이후 [편집]
1796년 예카테리아의 서거로 마리아는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 마리아는 러시아 최초의 여학교를 세웠고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즉위한 지 불과 4년만에 파벨 1세가 암살되면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그랬듯이 여제가 되려고 했지만 장남 알렉산드르의 설득으로 포기하고 아들을 황제로 세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태후가 된 마리아는 자신의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對 나폴레옹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것을 반대했다. 특히 자신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가 나폴레옹의 신부 후보가 되었을 때에도 혼담을 반대하고 네덜란드의 빌럼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인물 [편집]
마리아는 러시아의 역대 황후 중에 가장 키가 컸으며, 심한 근시였다. 그녀는 황실의 엄격한 법도나 에티켓을 꺼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무척 즐겼으며, 몸가짐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었다. 러시아 황실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검소한 절약가로 남편의 전처 나탈리아의 옷을 물려받아 입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1] 그녀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음악과 미술, 원예 등에 조예가 깊었다.
자녀 [편집]
- 알렉산드르 1세(1777~1825)
- 콘스탄틴(1779~1831)
-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1783~1801) 오스트리아 대공비
- 엘레나 파블로브나(1784~1801)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세자비
- 마리아 파블로브나(1786~1859)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1788~1819) 올덴베르크 공자비
- 올가 파블로브나(1792~1795)
- 안나 파블로브나(1795~1865)
- 니콜라이 1세
- 미하일 파블로비치
주석 [편집]
- ↑ Waliszewski, Kazimierz, Paul the First, p. 17
| 전 임 예카테리나 2세 |
러시아 황후 1796년 ~ 1801년 |
후 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