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제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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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쿠 터 (세계유산)

이 문서는 류큐 제도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류큐국[편집]

건국[편집]

류큐국은 1429년, 제3대 쇼하시 왕(일본어: 尚 巴志王 (しょう はしおう))의 삼산통일(三山統一)에 의해 건국되었다.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중산(中山), 북산(北山), 남산(南山)의 삼산(三山)시대가 시작된다. 세 나라는 중산의 쇼하시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국이 세워진다. 그 외 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오키나와로 가 류큐국(슈리국)을 건국했다는 설도 있다.

제1 쇼씨왕통[편집]

쇼하시는 산잔 통일을 통해 류큐국을 연다. 하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하였고 중앙집권적 왕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쇼하시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간다.

제2 쇼씨왕통[편집]

쇼도쿠 왕이 급사하면서 쇼타이큐 왕의 중신이었던 카나마루가 왕위를 선양받는다. 그는 쇼엔 왕을 자처하여 제2 쇼씨왕통을 연다. 제2 쇼씨왕통때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 번침공해왔다. 당시 류큐의 수도 수리성의 정문에는 적이 접근해오면 좌우양면에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도록 곡선으로 성벽을 만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패배, 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된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다시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을 되찾는다.

류큐국은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침략의 위협에 시달렸다.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외교노선을 설정,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1]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의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지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독단적으로 류큐국을 병합하여 일본의 영토로 만들었고[1]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류큐국을 사실상 몰락시켰다 (류큐 처분, 琉球處分). 이 사건으로 류큐국은 멸망하였고 일본의 영토가 되었고, 이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별다른 논의 없이 미국이 27년 동안 점령한 뒤 일본의 영토로 다시 반환되었다.

평가[편집]

미국의 대학교수 이정식에 의하면 일본의 류큐국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간섭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펴게 된 동기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한다.[1]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9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