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코 스포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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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가 그린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화.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이탈리아어: Ludovico Maria Sforza, 1452년 7월 27일 ~ 1508년 5월 27일)는 밀라노의 공작으로, 이탈리아 밀라노스포르차 왕조 일족이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들이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본명보다도 무어인과 닮은 검은 얼굴빛이나 칠흑같이 검은 머리 때문에 일 모로(il Moro; 무어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일부 학자들은 모로라는 별명이 루도비코의 문장인 뽕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일대기[편집]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지금의 롬바르디아에 있는 비제바노에서 태어났다.

1491년 1월, 루도비코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어린 딸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하였다.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결혼하자 베아트리체의 남동생 알폰소 데스테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누이 안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였다. 당시 결혼식 축전 감독을 맡은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나토 브라만테였다.

조반니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초상화.

베아트리체와 알폰소의 누이 이사벨라 데스테(1475-1497)는 만토바 후작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와 결혼하였다.

루도비코에게는 많은 애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체칠리아 갈레라니는 루도비코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루도비코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결혼식과 같은 해에 그녀는 루도비코의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의 모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흰 족제비는 루도비코의 문장에 그려진 짐승이었다.

1476년 루도비코의 형 갈레아초가 암살당하자 공작 자리는 그의 일곱 살 난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에게 넘어갔다. 루도비코는 잔 갈레아초가 미성년자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섭정인 자신이 밀라노의 실세 노릇을 했음에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잔 갈레아초의 권력을 약화시켜 밀라노의 통치권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잔 갈레아초가 1494년에 죽음에 따라, 10월 22일에 루도비코는 밀라노 귀족들의 용인 아래 루도비코가 공작 자리에 앉았다.

같은 해, 그는 프랑스의 샤를 8세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동시에 이탈리아 정계에 개입하게끔 선동질하였다. 그는 두 사람의 경쟁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얻고자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형세는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프랑스에 의해 자신의 처지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대(對)프랑스 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돈과 함께 자신의 조카딸 비안카를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시켜 주는 대가로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밀라노 공작 칭호를 받았다.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처음으로 물리친 후(원래 다 빈치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모은 80톤의 청동으로 무기를 만들었음), 루도비코는 훗날 1499년에 프랑스의 새로운 왕 루이 12세에 의해 밀라노에서 쫓겨나게 된다. 1500년, 루이 12세는 루도비코의 기지가 있는 노바라를 포위하였다.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양측 군대가 대치하게 되었다. 자국인끼리 싸우고 싶지 않았던 스위스 용병들은 노바라를 내버려 두고 돌아가기로 했다. 1500년 4월, 루도비코는 스위스인으로 가장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프랑스 측에 붙잡혀 프랑스 투렌에 있는 로슈 성에 갇혀 지내다 죽었다.

밀라노 공작 자리는 나중에 루도비코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스포르차에게 되돌아갔다. 루도비코의 또 다른 아들 프란체스코 2세 또한 밀라노 공작 자리에 앉아 짧은 기간 통치하였다. 역시 루도비코의 또 다른 아들인 조반니 파올로는 성공한 콘도티에리로서 가문 내에서 최초로 카라바조 후작이 되었다.

바깥 고리[편집]


전 대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
밀라노의 공작
1494년 ~ 1499년
후 대
루이